그리운 것들은....

가슴에 오래 남아 그대로

by James Kim





“그것은 5월 중순쯤 잎 피어나는 저물녘의 앞산이고

토끼풀꽃과 자운영꽃이 만발한 저물녘의 강변이었다.

징검다리에서 발을 씻고 나는 그 파르르 살아나는

푸른 어둠 속의 꽃에 맨발을 들이밀곤 했다.

아, 뼈까지 다 푸른 어둠에 물드는 것처럼 나는 숨이 막히곤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하며 다른 사람들을 부른다.”


김 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산문집에서



시인 김용택은 ‘자전거 여행’을 쓴 김훈 작가와 나이가 같다. 김훈 작가는 김용택을 나의 친구라 부른다. 그의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는 진메마을이다. 그는 그의 시 대부분이 섬진강을 배경으로 하여 쓰인 탓에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1997년에 초판 발행된 그의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를 읽으면 배고프고 가난한 옛 시절의 전라도 시골의 모습을 눈에 선하게 보이듯이 상상하며 그려낼 수 있다.


그의 글 제1부 ‘돼지 잡는 날’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나는 매우 난감해진다. “늘 하는 일이 독서인데 글을 쓰는 사람의 취미가 독서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알고 보면 나같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도 친구를 갖고 싶다. 한가한 저녁 벗들을 불러 모으고 마당에 앉아 또는 술집에 앉아 평안한 마음으로 시를, 인생을, 세상을, 남자의 외로움을, 삶의 고독함을, 나이의 쓸쓸함을 더듬거리고도 싶다.”라고 썼다.


그는 결코 그의 글을 미화시켜 아름답게 쓰려고 하지 않으며 꾸미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옛날 배고픈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놨는데 시인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나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그 쳅터의 제목은 ‘내 소원은 멸치볶음이요’인데 글을 읽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한때 내 소원의 첫째와 둘째와 셋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멸치볶음과 계란프라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멸치볶음과 계란프라이를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가 본 적이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그때의 배고픈 시절이 생각나 잠시 눈을 감고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한때 점심시간에 무료 급식으로 나누어 주던 노란 강냉이 빵이 생각난다. 당번 몇 명이 학교 소사 아저씨네 부엌으로 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네모나게 자른 강냉이(옥수수) 빵을 학생 수에 맞춰 커다란 대야에다 담아주었다. 거칠지만 따뜻하고 고슬고슬한 노란 강냉이빵을 손에 들고 먹는 기쁨은 학교에 가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남아있다. 그때 먹은 옥수수 가루는 아마도 미국에서 보내준 원조식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설이나 추석 명절은 즐거울 수밖에 없는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절구에 빻아서 만드는 쑥떡을 시작으로 해서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하얀 쌀밥과 맛있는 음식들이 어머니의 손을 통해 마술처럼 줄줄이 나오는 신비를 경험하는 축복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어찌 이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있는가? 거의 두어 달 전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며 명절날을 기다린 것 같다.

새 옷이며 양말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때가 설날과 추석이다. 어머니가 장날 미리 사다가 몰래 숨겨 놓았다 설날이나 추석날 아침에 꺼내서 주었다. 새 옷을 입고 친구들을 만나서 서로서로 자기 새 옷을 자랑하고 혹시라도 더럽혀질까 조심조심하며 하루를 보냈다.


김용택은 소설가나 수필가가 아니라 유명한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를 많이 읽어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장편시 ‘그 여자네 집’을 읽고 완전 그의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땅달막한 키에 딱 촌놈같이(용서를 바랍니다.) 생긴 깍두기 머리의 시인 김용택은 나와 센서빌리티 sensibility가 일맥상통한다.

나는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며 나의 첫사랑을 생각했고 나의 누이도 생각나고 나의 고향도 생각이 났다.


여기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추석 특집으로 올려드리니 깊은 감상에 젖어보시기 바란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 오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꼍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옹송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꼍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오늘은 추석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말이 모두에게 해당되기를 바란다.



Monday, October 6t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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