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행복

자아감을 찾는 여정....

by James Kim





“나무들은 키가 컸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북부의 어느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 서서

이 나무들을 굽어보는 나는 더 컸다.

스물여섯 살짜리 고아인 나는 혼자였고 게다가 이제는 맨발이었다.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그냥 계속해서 길을 걷는 것뿐.”


셰릴 스트레이드 Cheryl Strayed [wild]에서


힘들고 외로운 일이 있을 땐 길을 걷는다. 나 혼자 생각할 일이 있을 때도 길을 걷는다. 길을 걷다 보면 힘들고 외로운 일이 점차 별거 아닌 것이 되거나 그 부피나 무게가 줄어든다. 생각하는 일은 그 일의 가중치와 해결점이 점차로 명료해지면서 걷기가 끝날 때쯤은 어떻게든 종결점에 이르게 된다. 내가 걸을 때 좋아하는 코스는 주로 좁은 오솔길이나 사람이 잘 안 다니는 숲 속 길을 선택한다. 아파트가 천지인 서울에 살면서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나지막한 산과 함께하는 산책로가 여러 곳 있다.


나는 나름 A코스, B코스, C코스로 분류해 놓고 날짜와 요일을 달리해서 가능한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려 노력을 한다.

A코스는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 5분여 걸으면 산책로 입구 계단이 나오는 가장 가까운 코스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한적한 오솔길에 들어서면 새도 지저귀고 청설모가 나무 위를 오르락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간중간에 운동시설도 갖추어있어 뭉친 근육을 풀어주며 1시간 넘게 즐길 수 있는 코스다. 물론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아파트 건물들은 어쩔 수 없는 도심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B코스는 15분여를 걸어서 도착하는 곳으로 국사봉이라 불리는 나지막한 산봉우리인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가파르게 계단으로 되어있고 너무 빨리 올라가 별 재미가 없다. 대신 산 정상 7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은 산책하기 딱 좋은 오솔길로 꾸며져 있다. 오솔길로 이어진 둘레길을 걷다 보면 멀리로는 도봉산이 보이고 남산도 보이고 인천의 계양산 꼭대기도 보인다. 나지막한 서울의 지붕들이 다닥다닥하게 붙어있고 여의도의 빌딩들도 우쭐우쭐 솟아있다. 걷다가 보면 중간중간 벤치도 보이고 흔들 그네도 설치해 놓아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나무 숲이 있는 그늘 자리에 ‘숲 속 도서관’이라는 명패를 붙인 지붕을 씌운 책장이 놓여있다. 관할 구청에서 설치해 놓은 듯하고 처음에는 책이라 해봐야 구정 홍보지나 종교 서적 몇 가지가 전부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동네 주민들이 집에서 다 읽은 책들을 가져다 놓아 종류가 풍성해졌다. 벤치에 앉아 솔바람을 맞으며 책 몇 장을 넘기고 돌아오는 산책길은 발걸음이 훨씬 가볍다.

C코스는 관악산 둘레길과 연결되는 산책로인데 걸어서 가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서 가끔씩 가는 곳이다. 특히 봄철에는 그곳에서 많이 피는 산진달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꼭 찾아가는 곳이다. 능선을 따라 넓게 조성된 산책로 아래쪽으로 역시 좁은 오솔길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나는 그곳으로 주로 걸어가고는 한다. 오래된 아카시아 나무의 높이를 쳐다보면서 이리저리 해찰하며 걷기에 딱 좋은 곳이다.

산책은 도시에서도 머리를 식히고 발을 내딛는 행위를 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우스갯소리로 책 중에 최고의 책은 ‘산책’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갑작스럽게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은 20대 여성 ‘셰릴 스트레이드’가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매혹적이지만 힘든 여정을 담고 있다. 4,285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The Pacific Crest Trail을 홀로 걸어 아홉 개의 산맥과 사막과 황무지, 인디언 부족의 땅으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그녀는 온갖 고통과 시련을 통과하며 자신의 삶에서 잃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회복해 나간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4,285km의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10배가 넘는 장거리 코스이다.

그녀는 30kg이 넘는 배낭의 무게를 지고 어깨와 등이 짓무르고 6개의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다음처럼 굳건히 이어간다.


“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 등에 지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일은 내가 그 짐을 지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내가 질 수 없는 짐을 지고 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암 판정을 받고 나서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읊조린다.

“나는 내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어. 언제나 누구의 딸, 엄마, 그리고 아내였지. 나는 나 자신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작가는 자신의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강하면서도 자립의 의지를 가지고 굳건한 정신세계를 가진 나 자신인 인물로 살기 위한 선택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고난과 역경의 PCT를 계획하고 실천한 것은 아닌지. 누구나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겨 부유하는 삶은 언젠가 후회와 실망을 하게 된다. 어렵고 결정하기 힘들지만 자신을 위한 선택을 과감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한다.

중년의 나이 되어 지난 주말 네팔로 트레킹을 떠나 있는 내 여동생에게도 용기와 건투를 빌며 건강한 몸으로 더 굳건한 자존감을 찾아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법정 스님은 그의 책 무소유에서 여행과 떠남에 대해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걷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혼자서 걷든 둘이서 걷든 자신을 관조하며 낙엽 지는 가을 길을 걸어보면 자연 알게 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그리고 왜 나 자신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를....

유행과 경향이 영어로는 trend인데 트렌드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요즘 걷기와 산책과 트레킹이 심신을 치유하고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애용되고 있는 트렌드이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올레길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의 유명 둘레길 걷기가 한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도보 여행길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걷는 네팔 트레킹도 인기가 있다.


얼마나 걷기 열풍이 몰아치는지 내가 애용하는 산책 A코스의 끝부분 지점에는 무허가 건물과 사찰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게르마늄 맨발 걷기 장을 만들어 놨다. 깔끔하게 주변 조경 시설과 정비를 마치고 걷기 후 편히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세련된 나무 벤치와 함께 수도 설비까지 완비해 놓았다. 나도 맨발로 걸어보니 따끔따끔 맨발이 가려운 듯하면서도 시원하여 혈액 순환이 잘 되어 건강이 좋아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즈음 걷기에 적당한 온도와 기후가 이어지고 있다. 가벼운 옷차림에 덧옷을 하나 준비하고 스니커즈를 신고 가까운 골목길이라도 걸어보자. 나의 자아감을 찾는 시간이 오롯이 나와 함께 할 때 나의 시간이 된다.


니체는 걷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가을이 끝나고 이제 곧 겨울이 온다는 뜻이다.

모두 마음이 따뜻한 겨울을 맞이했으면 한다.



Friday, October 31st.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