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안 도현
문득 한밤중 잠이 깨어 달아나버린 잠을 잡으려 하였지만 소용없음을 느끼고 책을 읽습니다. 독서할 때면 습관처럼 틀어놓는 배경 음악의 피아노 연주곡에서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The river in the pines’가 천천히 흘러나옵니다.
아~ 가을이구나!
또다시 이렇게 깊어가는 가을은 나의 저 멀리 묻어둔 자의식에서 버석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던 옛일들을 소환해 냅니다.
어느 청량한 가을날 바람이 세게 불어 낙엽이 도로 위를 흩날리고 무슨 일에선가 누군가에게 건네줄 꽃다발을 손에 쥐고 바람 부는 길을 걸어가던 아름답고 행복한 가을의 잔상이 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은행나무 가로수로 가득한 시골의 어느 호젓한 지방 도로 위에 지난밤바람에 은행잎들이 떨어져 길이 온통 노란색입니다. 그 길을 가만히 지나치자니 차바퀴에 의해 놀란 노란 잎들이 모두 일어나 함께 춤을 추던 기억도 있습니다.
문경새재 옛 선비들이 과거 보러 넘던 가을 길을 터벅터벅 걸어봅니다. 하늘에 걸린 흰 구름과 떨어지는 붉은 잎사귀는 고개 들어 하늘 쳐다보는 나그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 고개를 숙이던 생각도 납니다.
어느 해 한계령을 넘어가던 차에서 보던 만물상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던 설악의 단풍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눈물이 날 듯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던 장면과 시기였습니다. 다시 한계령 옛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붉게 물든 단풍을 보고 싶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가을을 말할 때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순하고 여린 새싹 피어 잎이 되고 모든 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도 아름답지만 여름을 열심히 살아내고 이제 휴식을 취하는 가을의 나무와 떨어지는 잎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비록 지치고 시들어버린 잎사귀이지만 열심히 한때를 가치와 존재감을 가지고 살아냈으니까요. 젊고 싱싱한 푸른 잎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랍니다. 가을의 떨어지는 낙엽도 꽃보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붉음이 남아있습니다.
‘가을엔 조화가 있고 가을 하늘에는 광채가 있다. 이는 여름 내내 듣거나 볼 수 없던 것이다. 마치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마치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이라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셀리’는 가을을 노래했습니다.
여름 동안 수고하고 힘든 삶을 꾸려준 생명들이 가을에 늙고 병들어 힘이 들지만 가을 하늘은 더욱 맑고 푸르러 높아집니다. 우리네 인생사도 비슷하지 않은가요. 힘든 청춘을 보내고 바쁜 중년을 거쳐 늙고 병든 노년의 문턱인 가을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청춘인 꽃피고 새싹 움트는 봄을 보내고 녹색의 푸르른 잎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땀 흘리며 보냈던 중년의 여름을 기억하면서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을 맞이합시다. 우울하고 쓸쓸한 가을이 아니라 높고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며 봄이나 여름에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여유로움과 다정함을 가지고 가을을 맞이합시다. 가을 속에는 봄이 담겨있고 여름도 담겨있습니다. 노년의 인생에도 청년이 담겨있고 중년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언제까지나 소년과 소녀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윤동주 시인의 ‘소년’을 가만히 음미해 보시기를.....
소년(少年)
-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오늘 아침 기온이 급격히 내려간 듯합니다. 그만큼 가을이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만추(晩秋)입니다. 기온은 차가워져도 마음은 따뜻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쯤은 더 가을이 깊어져 늦기 전에 설악의 주전골 단풍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오색약수터에서 가슴을 톡 쏘는 탄산 약수를 한잔 마시고 용소폭포로 오르는 환상적인 아름다운 가을 길을 걸어 봐야겠습니다.
그러면 높고 파란 하늘이 보일 것이고 붉은 단풍잎이 보일 것입니다.
나의 묻어 지나간 청춘과 젊음도 함께 해온 가을을 느껴 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벗들이여, 함께 가을 길을 천천히 걸어갑시다.
Tuesday, October 28th.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