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속에서 들끓던 야수 같고 어수선한 것들이
걷히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 때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도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 현상을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 김 형경
‘좋은 이별’ 애도심리 에세이에서
크리스마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어제 읽다 잠이 든 김형경 작가의 ‘애도 심리 에세이를 다룬 ’ 좋은 이별‘을 마저 읽는다.
작가는 애도와 슬픔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그 감정이 가슴속에 오래 남아 그 응어리가 우울증으로 변질되어 평생 그 사람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상태는 슬픔을 감춘 그 사람의 깊숙한 밑바닥에 앙금처럼 살그머니 가라앉아 침잠해 있는 상태이다. 침잠한 상태로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어느 순간 불현듯이 흙탕물처럼 일어나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러면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이 여러 가지 상태로 표출이 된다. 우울증이 대표적인 증상으로 무력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며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김형경 작가는 애도와 슬픔을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어떤 경로를 통하든 소리 내어 펑펑 울어보는 방법을 첫 번째로 지목하고 있다.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속에서 들끓던 야수 같고 어수선한 것들이 걷히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 때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도 생긴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 경험을 담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울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한바탕 큰소리 내어서 우는 행위를 아리스토텔레스도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하지 않는가.
위키 백과에 의하면 ‘카타르시스(katharsis)는 그리스어로 정화를 의미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 우울 긴장, 등의 응어리진 감정이 풀리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 정화작용을 비극에서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상황이나 비참함을 보고 마음에 있던 응어리나 슬픔이 해소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카타르시스(katharsis)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관람할 때의 체험을 카타르시스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체험의 본질은 인간을 한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 환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관찰했는데,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끼게 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인간은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체험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영혼은 한 차원 더 고양된다고 보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우, 비극에서 체험되는 숭고와 카타르시스를 아폴론적으로 순화된 디오니소스라고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폴론적 이성에 의해 억눌린 충동을 가리킨다. 이는 억누르면 억눌릴수록 더욱 강한 폭발력을 지니게 되는데, 비극의 감상은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하나의 처방인 셈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비극은 극장이라는 아폴론적 형식을 통해 디오니소스적 폭발력이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이를 안전한 곳으로 전환 시킴을 의미했다.’
작가는 애도와 슬픔을 극복하는 두 번째 방법으로 노래방 활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작가는 스트레스가 가득 차 몸이 터질 것 같을 때 혼자 노래방에 가서 점심시간 내내 노래만 불렀던 경험이 몇 차례 있다고 한다. 서너 곡 노래한 후 얼마간 내압이 가라앉으면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생각하며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한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카타르시스 해소라는 차원에서 소리 내어 펑펑 울어보는 방법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 보인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단하게 부딪치는 사건과 배신에 대해 ‘용서’라는 주제를 우리는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타인이나 심지어 가족에게도 얼마나 많은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는가.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해서 마음 주고 돈도 주었는데 배신하고 떠난 연인이 있고, 가까운 가족처럼 믿고 서로 의지하며 잘해 줬는데 어느 날 말없이 등을 돌린 동료나 친구도 있다.
한 가정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로서 그렇게 우애가 깊고 사랑하던 나의 동기간이 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웃고 장난치며 맛있는 음식을 서로 양보하고 나누어 먹으며 나 자신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나의 형제였다. 그러던 나의 형제자매가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유산분배로 인한 갈등에서 발생하는 깊은 배신감과 모멸감은 가까운 동기간이므로 더욱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용서는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용서는 꼭 상대방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하면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 사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가해자보다 강해졌다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상대방보다 이해와 관용의 폭이 넓으며 관대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마음속의 평화와 자유는 용서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고귀한 품격 높은 선물이다.
상대와 화해하고 용서하기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고 나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영원한 지옥을 안고 미움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 Q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사랑 눈감으면 모르리 사랑 돌아서면 잊으리
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심신의 평화를 위해 상대를 용서하는 관용을 베푸는 일은 결국은 나 자신의 자유를 얻는 일과 같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날씨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아 성탄절 예배에 참석을 하였다. 교회 성가대원들이 칸타타라는 주제로 특별 합창을 5곡을 불렀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 다니던 누이를 따라 함께 부르곤 했던 캐럴을 생각나게 하는 날이었다.
점점 추워지는 날을 맞아 사랑과 관심에서 소외된 이웃이 없었으면 한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가득한 크리스마스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Thursday, December 25th.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