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두려움을 가지고 쓰는 글
“나는 농경민의 후예다.
나의 모국어 속에서는 여전히 흙냄새가 난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끔하게 다듬어진 표준어의 그늘 속에서
고향 벌판의 해 질 녘 풍경과 들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그 너른 대지위로 피어나는 꽃과 새들이 나의 자음과 모음이다.
빗방울을 굴리는 토란잎의 수선거림,
강물 위로 텀블링을 하는 물고기의 은비늘,
대숲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수만 마리 되새 떼의 날개짓이
풍요로운 음소의 바탕이 된다.”
- 손 택수
‘시인으로 산다는 것’ 중 ‘모국어’에서
‘시인 20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시인들이 쓴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시인들은 시가 아닌 수필을 쓸 때 시와는 다른 글을 어떤 느낌으로 쓰는지 늘 궁금하다. 그들은 소설가나 에세이스트들과는 다르게 많은 말과 사연을 몇 줄의 글로서 함축시켜 시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아름답게 전달하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를 쓰는 시인들이 에세이를 써서 수필집을 내는 경우도 자주 있어서 그들의 에세이 책을 읽어보면서 역시 시를 잘 쓰는 사람인 시인들은 에세이도 아름다운 표현을 아낌없이 구사하여 시처럼 잘 쓰는구나 하고 생각한 경우는 많이 있었다.
신현림 시인은 ‘왜 시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흔히 얘기하듯 운명인 거 같다’라고 말하면서 ‘시인을 꿈꾸기 전에 시를 좋아했고, 힘들 때면 시를 읽으며 견뎠고, 시로 숨 쉬며 산 청춘이 있었다’ 한다. ‘시를 왜 좋아했나 생각해 보니 풀과 같이 자연이란 깨달음, 더없이 낮아지고 선량해지는 고마움이 가슴에 물결처럼 퍼져가 나를 좀 더 사람스럽게 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누가 나에게 시를 왜 쓰느냐 물으면 착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말해왔다. 실제 인생에서 착하게 산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라며 시가 인생의 착해짐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쓴다는 행위는 시인이든 작가이든 간에 쓰는 사람을 더 사람스럽게 만들고 착하게 살도록 하는 중요한 행위 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어설픈 예술은 관객의 감각을 타락시킨다는 말처럼 독자의 고급 수준에 맞추는 글이나 시를 쓰기 위해 애쓰는 집필 과정은 쓰는 이를 분명코 단련케 한다.
읽는 이들을 위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조리 정연하게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심성이 거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글을 쓰는 지난한 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순화되어 더 인간적이고 논리적인 착한 사람으로 서서히 변모하지 않겠는가?
손택수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이 곧 자신의 확장된 신체이다’라고 에둘러 말하면서 ‘읽는다는 점에서 방랑과 독서는 같은 것이다. 방랑이 공간을 읽게 했다면, 독서는 자신의 내면을 읽게 한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여행은 돌아다니며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견문을 확장하는 여행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같은 것이다. 글을 읽는 순간, 독자는 그 글의 주인이며 그 글을 쓴 작가가 되는 것이다.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것은 그 글을 쓴 작가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며 동시대를 함께 살며 동질감을 느끼는 행위인 것이다.
글과 시를 쓰며 쓰는 이가 좀 더 사람스러워지고 좀 더 착해지듯이 글과 시를 읽으며 읽는 이도 좀 더 사람스러워지고 좀 더 착해지게 되는 것이다.
시인 손택수가 말하듯 글 속에는 자기가 살아온 흔적이 남아있다. 그의 글 속의 ‘말끔하게 다듬어진 표준어의 그늘 속에서는 고향 벌판의 해 질 녘 풍경과 들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고 시적으로 표현을 해 놓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글 속에 자기가 살아온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알고 있다. 글 속에는 어릴 적 고향의 들판을 스치는 바람이 묻어있고, 청춘의 고뇌와 열정이 담겨있고 젊음이 묻어있는 풋사랑의 추억도 담겨있다.
박형준 시인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미래의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라고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행복이란 이 순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오롯이 몸으로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강은교 시인은 ‘언제부턴가 나도 무능해졌다. 무능이 나의 일이 되어갔고, 나의 여행길은 무능의 진혼길이 되어갔다. 아파트 높은 곳에 앉아 여행하면서 창밖을 내려다보는 일이 하루의 중요 일과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무명 시인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여행 속에 앉아서 여행을 떠난다.’면서 곧이어 ‘여행은 고독이다. 여행은 존재의 권력이다. 끊임없는 출발이다.’라고 여행의 정의를 말하면서 ‘시는 그런 고독의 호수이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차고 정결한 바람이다.’라고 썼다.
김언 시인은 예술을 논하면서 ‘모든 예술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또한 관통하지 못해서 풍성한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 작품도 사람의 삶과 죽음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라고 말하면서 ‘덕분에 예술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그래서 시인은 죽음이 두려워서 시를 쓰고, 그의 삶이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이미지를 본다고 한다.
여태천 시인은 불안과 피로의 시간에 대해 시인과 어린이를 비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는 저녁이 있고,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리고 나무, 벤치, 아이들이 있다. (....) 그러나 불안은 기어이 찾아온다. 말하자면 나는 불안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불안은 피로와 함께 온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지 잘 몰라 슬프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언어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때로는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가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왜곡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매우 두렵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언어로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마음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고 말한다.
시인은 지식이나 권력으로 무장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을 만나면 두렵고 머리가 아프다 한다. 반면에 오고 가는 말은 몇 마디 없지만 조용한 그 말들의 울림을 즐긴다 한다.
나도 오늘 내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언어로 내가 알고 있지 못한 사실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 정말 슬프고 안타깝고 두렵고 부끄럽다.
Sunday, January 4th.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