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즐겁고 기쁜 것?

어떻게 보았느냐를.

by James Kim





“삶이라는 것은 즐겁고 기쁜 것이니까요!


삶은 천국이고, 우리는 모두 천국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걸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예요.

알려고만 한다면 내일 당장 온 세상이 천국이 될 거예요.


주인과 하인 따위가 없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하인들의 하인이 될 거예요.

그들이 내게 해 주었듯 그렇게요.


- 표도르 도스도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중년의 지주로서 우스꽝스러운 짓과 방탕한 행동을 일삼지만, 재산을 모으는 능력이 뛰어나다. 훗날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드미트리 표도르비치’는 카라마조프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첫째 아내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가 낳은 장남이다. '미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은퇴한 장교로 성격이 급하고 정열적이다.

‘이반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둘째 아내 ‘소피야 이바노브나’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며 신문에 실릴 정도로 글을 잘 쓴다. 신을 믿지 않으며 차가운 성격이다.

‘알렉세이 표도르비치’는 카라마조프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둘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로, '알료샤'라고도 부른다. 수도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존경하던 조시마 장로가 세상을 떠나자 수도원에서 나온다.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가 가장 존경하는 신부다. 알료샤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알료샤에게 수도원을 나가라고 말한다.


이렇듯 먼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요 인물을 소개하며 글을 풀어나가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길기도 하고 애칭이 많아 헷갈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글의 서두에 나오는 ‘삶이라는 것은 즐겁고 기쁜 것이니까요!’로 시작하는 말은 삼남 ‘알렉세이’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의 형이었던 ‘마르켈’이 17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 전에 했던 말들을 옮긴 것이다.

[민음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권 25쪽]


우리는 삶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삶은 고해(苦海)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하는 괴롭고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과정인가?

아니면 삶이란 즐겁고 기쁜 과정으로서 영원히 살고 싶은 만큼 가치가 있는 긍정적인 여정인가?

어쩌면 삶은 그 둘 중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두려움과 상실에 머물 때 삶은 끝없는 고해로 굳어지고, 하루하루는 견뎌야 할 의무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반대로 삶의 관점을 성장과 의미의 가능성으로 바라볼 때, 고단함은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삶은 감당할 만한 여정이 되고, 기쁨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일상의 틈새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삶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상황의 크기가 아니라, 그 상황을 해석하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삶은 천국이고, 우리는 모두 천국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걸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예요.

알려고만 한다면 내일 당장 온 세상이 천국이 될 거예요.


조시마 장로의 형인 마르켈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즐겁고 기쁜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니 삶은 결국 천국이 되는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점을 알려고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되어 내일 당장 온 세상이 천국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중요하다. 꼭 같은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이는 긍정적인 눈길로 아름답게 바라보아 천국을 만들고, 다른 이는 부정적인 눈길로 불편하게 바라보아 지옥을 만든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세상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같은 풍경 앞에서 우리가 선택한 해석이 마음속에 지어 올린 결과물이다. 그래서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았느냐를.


마르켈은 하인들이 방에 들어오면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스러운 여러분, 소중한 여러분,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겨 계속 살게 해 주신다면, 내가 몸소 여러분에게 봉사하도록 하겠으니, 이는 모두들 서로서로에게 봉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겸손을 가장한 수사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가장 근원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자신을 낮추는 순간 타인은 높아지고, 봉사를 약속하는 순간, 관계는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을 나누는 위계(位階)가 아니라 연대로 바뀐다. 마르켈의 말은 존엄은 지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단순한 예절이나 신앙적 언사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대답이 된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깃든 그 겸허함 속에서 우리는 존중이 의무나 명령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 선택이 관계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만드는 힘은 거창한 조건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속에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책에서 마르켈을 통해 건넨 낮은 말과 섬김의 약속처럼, 서로를 귀히 여기려는 작은 선택이 쌓일 때 삶은 더 이상 견뎌야 할 고해가 아니라, 함께 건너는 의미 있는 여정으로 조용히 완성된다.

주인과 하인 따위가 없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하인들의 하인이 될 거예요.

그들이 내게 해 주었듯 그렇게요.


이때 마르켈의 병세를 살피러 왔던 의사가 이 말을 듣고는 마르켈의 어머니에게 다음처럼 말을 한다.

“당신의 아드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아드님은 병세가 심해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한 태도의 완성이었다. 섬김을 말로 남긴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한 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을 낮춤으로써 타인의 존엄을 높였던 한 인간의 선택은 침묵 속에서도 오래 남아 있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겸허의 방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오늘, 누구의 하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일상에서 미덕과 좋은 습관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신의 뜻으로 대신하면서, 진정한 행복의 유일무이한 근원인 신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이 <지복 직관 Beatific Vision>,즉 신을 직접 목격하는 더 없는 행복이다.’고 말했다.




Wednesday, February 4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