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위한 탄생성 Natality
“스스로 항상 최고임을 입증해 보이며
언젠가 사라질 것보다 불멸의 명예를 선호하는
<가장 뛰어난 자 Aristoi>만이 참된 인간이다.
그 외에 자연이 제공해 주는 각종 쾌락에 안주하는 자는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가치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일체의 활동인 ‘정치적 행위’에 있다고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일찍이 강조했다.
아렌트는 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프린스턴대학교의 최초의 여성 교수이다. 독일에 있을 당시 그녀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이었으며 기혼자이던 그와 연인 관계로 지내기도 했다.
성(聖) 아우그스티누스의 ‘시작이 있었고 인간이 창조되었다’에서 영감을 얻은 아렌트는 “인간은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난다”라고 그 유명한 <탄생성 Natality>을 주창했다.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서 그녀가 하고 싶은 <탄생성 Natality>은 단순히 생물학적 출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세계 안에 전혀 없던 어떤 새로움을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뜻한다.
인간의 삶은 소멸을 향해 닫혀 있는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움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며, 각자는 그 시작의 문을 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 말, 선택을 통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관계와 이야기, 역사의 한 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창의적인 존재라는 뜻이 아닐까?
죽음이 인간을 유한하게 만든다면, 탄생성은 인간을 창의적으로 만든다. 하나는 끝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의 문법이다. 그리고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주어진 삶을 반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없던 어떤 시작을 세상에 놓아두려 하고 있는가.
아렌트가 말하기를 ‘인간은 태어나는 것 자체로도 기적이지만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영광을 누린다’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행위능력이란 인간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이 한없이 불가능한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모든 인간이 저마다 유일하고, 그래서 각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유일하게 새로운 무언가가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지론이다.
따라서 당신이 오늘 하려고 하는 행동은 단순한 결과의 산출이 아니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가능성을 현실 속에 출현시키는 창조적 사건이다. 그 행위는 세계의 흐름을 새롭게 바꾸어 놓는 시작의 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누군가는 용서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저항을 시작하며, 누군가는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다.
이러한 선택들은 이전까지의 인과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균열을 현실에 만들어 낸다. 바로 그 틈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불가능해 보이던 변화가 현실이 되고, 굳어 있던 질서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당신의 행위 능력은 단순한 실행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이야기 구조를 바꾸는 서사적 힘에 가까운 것이다.
한 사람의 시작이 또 다른 시작을 부르고, 그 연쇄 속에서 역사는 새로 써진다. 한 문단으로 정리하면 이처럼 인간의 유일성과 탄생성에 근거한 행위 능력은, 세계를 주어진 상태로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게 하는 근원적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을 일을 추구하는, 공동체적이고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아렌트는 주창하고 있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권력다툼이나 제도 운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일체의 활동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듣고, 말하고, 판단하는 공동의 세계를 말한다.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행위(action)와 언어(speech)는 바로 이 정치적이라는 공간 안에 존재한다.
공동체적이라 한 표현은 혼자서 한 결단은 본인의 결심에 머물 수 있지만, 타인 앞에서 행해질 때는 사건이 되고, 타인에 의해 해석될 때는 역사가 된다.
누군가의 용기, 희생, 창조, 저항이 공동체 안에서 말해지고 기억될 때, 그 행위는 개인의 순간을 넘어 공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형성된 공적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 인정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누구(who)’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우리가 무엇인지는 우리의 직업이나 겉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에게 동조하거나 맞서지 말고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누구’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으며, 타인들의 시선과 기억 속에서 비로소 윤곽을 형성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타인에게만 온전히 드러날 뿐 본인으로서는 결코 정당하게 스스로 판단하고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삶은 스스로가 집필하는 자서전이라기보다, 타인들의 증언과 기억이 덧붙여져 완성되는 공동의 전기(傳記)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이미 타인들의 언어와 해석 속에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많이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은 내면의 확신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반사되고 축적된 빛의 총합으로 형성된다. 결국 자신을 안다는 일조차 혼자서의 성취가 아니라, 타인들과 더불어 형성된 공적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 타인이라는 살아 있는 거울들 속에서만 비로소 ‘누구’의 윤곽을 또렷이 얻게 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이전에, 서로를 비추어 주며 존재를 완성해 가는 관계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정체성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계속 수정되고 깊어지는 살아 있는 초상으로 남는다. 즉, 우리는 한 번 비추어지고 사라지는 그림자가 아니라, 서로의 시선 위에 겹겹이 그려지며 오래 남는 초상이 된다.
칸트는 그의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자신의 모든 표상과 개념의 본원적인 창조자이고, 자신의 모든 행위의 유일한 창시자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행복이 인간의 정당한 목표이자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물질적 본성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하니 중생들에게 ‘스스로 행복해질 가치가 있도록 행동하라’고 일갈했다. 칸트는 그의 유명한 <정언명령>에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인 입법 원리로 통용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칸트가 정말로 반대했던 것은 <독단록 dogmatism> 즉, 이성적 사고가 결여된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에게 계몽이란 더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용기를 회복하는 정신의 독립을 뜻했다.
칸트의 유명한 요청의 말을 들어보라.
‘Sapere aude.’
사페레 아우데(라틴어: Sapere aude)는 "과감히 알려고 하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이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서간집〉(기원전 20년)에 처음 사용된 시구로, 이마누엘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년)에서 인용하면서 계몽주의의 표어가 되었다.
Saturday, February 7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