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함께하는 동반자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천천히 살아내는 것

by James Kim






“과거는 서막일 뿐이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당신과 저에게 달려있습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템페스트(Tempest)’에서

2026년 새해가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1월이 후딱 가더니 벌써 오늘이 2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나를 두고 흘러가는 시간과 세월의 야속함이야 진즉 눈치채고 있었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한 처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월이라는 친구는 참으로 얄궂은 데가 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슬그머니 내 어깨에 앉아 있던 청춘이라는 젊고 씩씩한 새 한 마리를 데리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캘린더 한 장을 툭 넘겨버리며 “난 원래 이랬어”라는 표정을 짓는다. 참으로 뻔뻔하고 의뭉스러운 도둑이 아닐 수 없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영수증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훔쳐간다.

더 얄밉고 화가 나는 건, 이 친구가 꼭 공평한 척을 한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스물네 시간을 준다며 생색은 잔뜩 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훔쳐갈지는 전혀 공평하지 않다.

즐겁고 설레는 순간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고, 힘들고 지루한 시간은 마치 끈적한 치즈처럼 길게 늘어진다. 마치 이 친구가 어딘가에 몰래 리모컨을 들고 앉아, “여긴 빨리 감기, 여긴 일시정지”를 마음대로 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괘씸한 세월도 아주 나쁜 친구만은 아닌 듯하다. 훔쳐간 만큼 슬쩍 다른 것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가기 때문이다. 시간 하나를 가져갈 때마다 아름다웠던 추억 하나를 남겨두고, 소중한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채나 갈 때마다 대신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 여유를 놓고 간다.

문제는 내가 그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마치 선물을 포장지째 버리고, 빈 상자만 보고 투덜대는 셈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야속한 세월이라는 친구와는 싸워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면, 차라리 같은 편인 척, 엄청 가까운 척하며 슬쩍 이용해 먹는 수밖에.

세월이라는 친구가 나를 데려가듯, 나도 그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구름 흘러가듯이 부둥켜안고 떠가다가 그 안에서 웃음 몇 줌, 추억 몇 조각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 여행은 편도 티켓 밖에 없어 돌아갈 표도 없으니, 괘씸함과 서운함은 내려놓고 그 친구에게 기대어 함께 걸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나면, 세월이라는 친구의 발걸음이 조금은 덜 거칠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나를 끌고 가는 것만 같았던 시간이, 이제는 나와 보폭을 맞추며 걷는 친숙한 동행처럼 느껴진다. 급하게 재촉하지 않아도 괜찮고, 뒤처졌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비로소 알 듯하다.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세월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두르던 마음 대신 느긋함을, 흔들리던 감정 대신 단단한 마음의 중심을, 그리고 쉽게 지나치던 순간들 대신 오래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을 건네주고 있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서운해하며 붙잡으려 애쓰지 않기로 한다.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그 흐름 위에 조용히 몸을 맡기고 그 온도를 느껴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느끼고, 햇살이 머물면 그 따뜻함을 받아들이면서,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천천히 살아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세월이라는 친구와 가장 다정하게 지내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된다. 세월은 야속한 대상이 아니라, 말없이 곁을 지켜온 오래된 동반자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동반자와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삶은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여행 나온 나그네이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는 삶의 길을 떠도는 인간이다.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나그네와 같은 존재로,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나그네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이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처럼 우리네 인생의 길은 길고도 험난하다. 외줄기 길은 고독한 인생의 여정을, 남도 삼백 리는 그 길의 길고 험난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길 위에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과 같은 아름다운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는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표현은 인생의 무상함을 안고 흘러가는 삶을 보여준다. 구름에 달이 흘러가듯, 인생도 결국은 흘러가며, 나그네는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머무는 삶을 살아 나갈 뿐이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우리에게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고독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무상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며, 삶의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닫게 된다.


2월이 지나감은 아쉽고 허전하다.

그러나 새봄이 시작되는 3월을 들뜬 마음으로 맞이하려 한다.

힘들고 아픈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운 봄날이 다가오기를 바란다.



Saturday, February 28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