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요구사항이 아니라 그 이유였다.
신입사원을 막 벗어나던 무렵이었다.
여전히 나는 매일 새롭게 발생하는 선박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같은 팀의 사수와 함께 이란 국적의 고객(선주사)을 담당하고 있었다. 업무가 아니면 이란 사람과 만나볼 일이 있었을까? 문화의 차이만큼 일하는 방식이 달라, 쉽지 않은 고객이었다.
담당했던 선박들의 보증기간이 끝난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란 출장이 결정되었다. 급하게 준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비행시간과 환승하며 기다리는 시간조차 새로운 경험이라 지치는 줄 몰랐다. 의지할 수 있는 사수와 함께였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새벽에 더 가까운 늦은 밤 테헤란에 도착했고, 아침에 바로 고객 사무실로 향했다. 우리가 회의를 통해 해야 할 일은 보증기간 동안 발생했던 문제들을 정리하고, 그에 따른 보상 금액을 협상하는 일이었다. 작은 문제들도 합의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러다 입장의 차이가 너무 큰 문제를 마주했다. 선박의 심장이라 불리는 메인 엔진에서 발생했던 결함이었다. 우리는 다 해결되었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설계를 개선한 부품을 교체했고, 이후로는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리과정에서 발생한 비용만 보상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고객의 생각은 달랐다. 종결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 숫자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수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 수만 달러 수준이었다. 우리는 수차례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지만 고객의 태도는 완고했다. 우리가 제시 금액을 조금 올렸더니, 오히려 왜 처음부터 그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느냐며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자신은 그 금액을 끝까지 고수하겠다고 했다.
'왜 그런 금액을 요구했을까?'
이유라도 들어보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고객은 100만 달러라는 금액을 반복할 뿐이었다.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회의를 이어갔지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른 사안들을 아무리 정리해도, 그 하나가 해결되지 않으니 최종 합의문은 만들 수 없었다. 마지막 날에는 더 이야기해 봐야 서로의 감정만 상할 것 같아 회의를 일찍 마치고 나왔다.
낮 시간에 나와보니 드디어 테헤란이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 밤늦게 다녀서 몰랐는데, 우리 숙소가 있는 곳은 상가가 즐비한 번화가였다. 비로소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이 보였다. 귀국하는 길은 발길이 무거웠다. 합의에 실패한 이유를 보고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주된 책임은 사수가 감당했지만, 나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문제는 그렇게 미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뒤, 그 고객이 직접 우리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다시 이야기해 봐야 100만 달러를 줄 수는 없었기에, 오히려 부담 없이 오라고 했다. 다시 만난다고 합의문에 서명하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부담이 없으니 분위기도 달랐다. 이번에는 금액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문제 자체를 편하게 이야기했다. 서로가 줄 수 없는 것과 기대하지 않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란 사람들은 회의석상에서는 치열하게 대립하다가도 자리만 벗어나면 우리를 친구로 대했다. 업무에서는 각자 회사를 대변해 싸우는 것이고, 일을 벗어나면 우리는 친구라는 논리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큰 금액을 요구했는지, 우리가 그 금액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제야 고객은 속내를 말했다.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종결되었다는 합의문에 서명한 뒤, 한참이 지나 문제가 재발하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상황을 대비하려면, 최소한 100만 달러 정도는 받아 두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다시 보였다. 100만 달러는 면피하기 위한 보험이었다. 그리고 그 요구에는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 합의문에 ‘동일한 문제가 재발할 경우 당사가 책임진다’는 문구를 넣는 것이었다. 금전적 보상은 없지만, 그 문장 하나로 고객 담당자는 미래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합의를 만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서명이었고, 숫자가 아닌 문장으로 완성된 합의였다. 그 이후로 나는 협상의 자리에 앉을 때마다 같은 원칙을 떠올린다.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아니라,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특히 문제가 클수록, 요구가 클수록 그 이유를 먼저 찾으려 한다. 협상이란 요구사항을 맞추는 일이 아니라, 그 요구의 근본 이유를 파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해결책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원칙은 회의실을 벗어나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사람들의 말 뒤에 숨은 이유를 먼저 떠올려 보려는 습관. 바로 반응하기보다, 한 번 더 묻는 태도. 그 질문 하나가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한다는 걸 나는 이란 사람을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