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전무에게 배운 경청

말이 막히지 않던 자리

by 이진호

B전무에게 결재받으러 가는 길은 늘 달랐다. 혹시나 지적을 받을까 긴장되는 시간이라기보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를 한 번 제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B전무실에는 상사라는 말이 주는 무게와는 다른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 그래?”

“그런 게 있었구나!”
“아이고, 힘들었겠네.”

보고를 받는 중에도 짧은 감탄과 질문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 말들이 나를 재촉하지도, 시험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말이 막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들이 끝까지 이어졌다. 마치고 나올 때면 내가 보고를 잘한 것 같아 작은 우쭐함을 느꼈다.


그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같이 가는 출장길에 내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직급의 선은 금세 흐려졌다. 나의 짧은 의견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고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책을 가까이 두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연스러움의 이면을 보게 되었다. 큰 회식 자리에서였다. 그날 나는 B전무와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분 앞에 앉은 누군가가 “전무님, 그거 아십니까?”라며 신이 나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다. 그때였다. B전무의 잠깐 스쳐간 표정에서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사라졌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고개를 끄덕였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며 장단을 맞췄다. 말하던 사람은 점점 더 흥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분의 경청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된 태도라는 것을.


그 깨달음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의 보고 자리에서 느꼈던 그 따뜻한 반응들 속에도 분명 의도적인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한참 직급 차이가 있는 사람이 긴장하지 않고 자기 몫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필요 이상으로 권위를 앞세워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상사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B전무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경청이 단순히 말을 열심히 듣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도 알게 하는 것까지 해내야 경청은 비로소 완성된다. 감탄사 하나, 되묻는 질문 하나는 정보 수집의 도구가 아니라, 맘 편히 계속 말해도 괜찮다는 신호였다.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상대의 이야기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크게 흥미롭지 않더라도 관계를 생각한다면 잠깐은 모르는 척, 재미있는 척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은 상대를 속이는 일이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태도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그분은 몸소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B전무가 가끔 떠오른다. 그분이 그랬듯이, 내가 과연 잘 듣고 있는가뿐 아니라,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충분히 느끼게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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