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 속 그 식당, ‘카빌라 수오미’
세계지도를 펴 놓고 눈을 감은 뒤 손에 짚인 나라에 가자고 다짐했다. 그게 핀란드였다. ‘미도리’는 그렇게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왔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는 미도리 만큼 무모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미도리를 보고 핀란드에 가겠노라 다짐했다. 스물여덟의 여름이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잡은 첫 직장에서 3년을 일했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사업을 철수한다며 해고 통보를 해 왔다. 그렇게 난생 처음 백수가 됐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 할 일’이 없었다.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엔 아침 7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빨라야 밤 8시 30분.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잠자기 바빴다. 그러나 백수는 얽매인 곳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 훌쩍 강원도로 떠나도 되고, 집 앞 카페에 죽치고 앉아 책을 읽어도 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 영화만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없는 대신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없었다. 헛헛했다.
그런 나를 핀란드로 이끈 것은 영화 ‘카모메 식당’이었다. 그 영화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핀란드 수도 헬싱키로 온 일본인들이 있었다. 카모메 식당의 주인 ‘사치에’는 일확천금이 생겨 헬싱키에 주먹밥 가게를 차렸고, 인생의 쓴맛을 본 ‘미도리’는 세계지도에서 짚인 곳이 헬싱키라 그곳에 왔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카모메 식당에 모여들어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저마다의 행복을 만끽했다. 카모메 식당에는 고슬고슬한 밥으로 지은 주먹밥, 바삭하게 튀긴 돈까스, 코끝을 자극하는 커피와 시나몬롤이 있었다. 헬싱키에 가면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헬싱키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핀란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북유럽 국가 중 하나로, 복지국가(사실 이마저도 확실하진 않았다)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핀란드에 대한 무지함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장소, 아무도 나를 모르는 미지의 장소에 가고 싶었던 게다. 영국의 ‘빅벤’, 프랑스의 ‘에펠탑’처럼 핀란드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북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도 일정 부분 있었다.
헬싱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오후 5시, 한참 태양이 뜨거운 시간이었다. 핀란드 여름은 하루 24시간 중 18시간 이상이 낮이다. 오전 4시에 해가 떠서 밤 10시 30분에 진다. 밤 9시에도 환하게 밝은 태양을 즐길 수 있다. 하얀 밤이라는 뜻에서 백야(白夜)라 부르기도 한다. 오후 5시에 작렬하는 태양을 맞으며 호숫가에서 자전거를 타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집 앞에서 하던 일을 7000km 상공을 날아와 지구 반대편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행복감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카모메 식당’으로 향했다.
영화 카모메 식당 촬영지는 헬싱키에 있는 실제 식당이다. 식당 이름은 ‘카빌라 수오미(Kahvila Suomi)’다. 카빌라는 핀란드어로 ‘카페’, 수오미는 ‘핀란드’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풀어보면 ‘카페 핀란드’다.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판매하는 비스트로 식당이며, 부담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얘길 듣고 찾아갔는데 아뿔싸,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이곳은 일요일에 상점들이 문을 닫는 유럽 대륙이라는 걸 깨닫고 유일하게 문을 연 햄버거 가게에서 허기를 달랬다.
이튿날 다시 카빌라 수오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걸어서 갔다. 헬싱키시의 면적(213.8㎢)은 서울의 3분의 1 수준으로, 시내 웬만한 곳은 걸어서 갈 수 있다. 점심 즈음 식당에 도착하니 오늘은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헬싱키에서 보기 드물었던 동양인(정확히 말하면 일본인)들도 식당 근처에 오니 왕왕 보였다. 식당 출입구에는 ‘카빌라 수오미’라는 상호 아래 카모메 식당(かもめ 食堂)이라는 설명도 달려있었다. 과연 이곳은 일본인들에게 관광명소였다. 거주자와 여행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손에 들린 카메라’. 많은 일본인들이 셀카봉에 카메라를 장착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저렇게 유난 떨지 말아야지’ 했다. 귀국 후 한국에도 셀카봉 열풍이 몰아치자 곧장 구입하긴 했지만.
다시 카빌라 수오미로 돌아와서. 식당 내부로 들어서니 영화에서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영화에선 햇볕이 잘 드는 환한 식당이었는데 카빌라 수오미는 그리 밝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많이 달랐다. 카모메 식당이라는 문구와 벽에 붙어 있는 영화 포스터가 아니라면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메뉴도 일본식 주먹밥 대신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들로 구성돼 있었다. 메뉴판은 영어와 일본어 버전이 있었다. 음식은 스테이크, 햄버거, 미트볼 등이 있었는데 ‘오늘의 요리’ 중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연어샐러드를 골랐다.
오늘의 요리를 선택하면 메인 요리를 만들어 주며, 나머지는 가져다 먹으면 됐다. 음료는 커피와 홍차, 우유가 있었고 식전음식으로 빵과 야채샐러드, 디저트로는 블루베리 요거트가 준비돼 있었다. 연어샐러드를 기다리며 커피로 목을 축이고 빵을 먹었다. 글루텐이 충분히 들지 않은 ‘건강한’ 빵인지, 딱딱한 것이 영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야채샐러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양상추와 잘게 채 썬 당근에 소스를 올려 먹었는데, 신선한 야채들이 입맛을 돋우었다.
드디어 본 요리인 연어샐러드가 나왔다. 처음엔 수북이 쌓인 연어와 야채에 압도됐다. 배고픈 배낭여행객으로서 환호성을 질렀다. 찬찬히 살펴보니 연어와 함께 레몬, 토마토, 오이, 삶은 계란, 양상추, 콘옥수수, 마카로니 등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요리 전체에 레몬을 쥐어짠 다음 하나씩 맛을 봤다. 연어도 푸짐했고 각각의 재료들도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절반 정도 먹고 나니 배가 불러왔다.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접시를 비워냈다. 디저트로 준비돼 있던 블루베리 요거트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카빌라 수오미는 영화를 보고 찾아온 관광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식당이었다. 첫 번째로 만족스러운 것은 가격. 연어샐러드 세트는 9.4€(약 1만3000원)였는데, 한국 물가 기준에서 생각하면 비싸지만 핀란드에서는 저렴한 축에 속한다. 점심식사의 경우 대개 10€ 이상은 써야 하고, 저녁은 더더욱 비싸다. 가격 면에서 보자면 카빌라 수오미는 괜찮은 식당이다. 저렴한 가격에 뷔페식으로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낭만을 찾아 온 이라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카빌라 수오미는 카오메 식당처럼 따뜻한 분위기가 아니며,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사근사근한 말씨로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를 외치던 ‘사치에’나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미도리’는 없다. 웃음기 없는 직원들이 묵묵히 일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를 보니 실망스럽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나 역시 불친절한 직원들을 보며 영화의 환상에 사로잡혀 매출을 올려주러 온 호갱님(호구+고객님)이 된 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든 저렇든 영화 촬영지에 직접 와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영화 속 그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어찌됐든 그 영화 덕분에 이불 속에만 있던 나는 헬싱키로 날아왔고, 내일의 여행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
영화 카모메식당(2006) vs 영화 촬영지 카빌라 수오미(2014)
일부러 각각의 장면과 대조하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헬싱키란 도시가 워낙 작아서 찍고 보니 다 들어가 있더라.
☞ ‘카모메식당’ 속 그 식당
상호 카빌라 수오미(Kahvila Suomi)
위치 구글 지도에서 ‘Pursimiehenkatu 12, Helsinki’ 검색
전화번호 +358 9 657 422
영업시간 오전 9시~밤 9시(토·일 휴무)
가격 스테이크(18.9€), 야채 리조또(9.8€), 햄버거(8.2€), 샌드위치(8.4€), 크레페(4.2€), 커피(2€)
기타 예약·테이크아웃 및 신용카드결제 가능, 주류 판매하지 않음, 야외 좌석 있음, 와이파이 무료.
홈페이지 kahvilasuomi.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