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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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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Sep 07. 2016

냄새는 여행의 기억을 소환한다

바디로션, 태닝오일.

23살 가을. 휴학하고 우리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일로 유럽여행을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일인데 이유야 어찌됐든 그날로 티켓을 끊었다. 이듬해 2월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1년남짓 은행에 일하며 그곳 사람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퇴사하던 날엔 은행 언니들이 선물도 하나씩 챙겨줬다. 내가 좋아했던 언니는 바디샵 바디로션을 선물로 줬다. 언니가 준 바디로션은 여행가기 전 써볼 기회도 없었다. 금요일이었던 2월26일까지 근무를 하고, 27일에 짐을 싸서, 28일 오전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니까. (이때도 어김없이 일정을 빡세게 잡았구나) 여행가서 써야겠다 싶어 바디로션을 잘 챙겨 런던으로 날아갔다. 


인터넷에서 최저가라기에 대충 예약한 유스호스텔은 남녀혼숙 12인실이었다(..) 공동샤워실도 허술했다. 물이 튀지 않게 씻어야 하는 것도 어색했고. 다른 사람들과 샤워시간이 겹치는 게 싫어 일부러 새벽 일찍 일어나 샤워를 했다. 그리고 바디로션을 뜯었다. 기분좋은 벚꽃향이 났다. 한겨울이라 건조해 여행내내 바디로션을 열심히 발랐다. 한국에 돌아와 이 바디로션을 바를 때마다 충격과 공포의 12인실과 공동샤워실이 떠올랐다. 기분 좋은 기억의 되새김이었다. 선물 받은 제품을 다 쓰고, 또 사서 썼다. 기능이 좋은 건 잘 모르겠고 바를 때마다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바디샵에서 같은 향의 향수도 사서 썼다. 여행을 추억하는 또다른 방식.


재패니스 체리블라썸 바디버터, 선케어 태닝오일 [사진=바디샵, 에끄랑]


영국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6년 뒤.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휴학생은 6년차 직장이 됐다. 친구와 함께 지내야 해 호스텔을 예약했는데, 12인실이었던 숙소는 2인실로 줄었다.(6배만큼 쾌적해졌지) 첫 여행 땐 빅벤, 런던아이, 타워브릿지, 영국박물관, 내셔널갤러리, 테이트모던, 트라팔가광장 등 명소를 찍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그런데 안가도 된다. 너덜너덜해진 가이드북을 가슴에 품는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기차 타고 브라이튼이라는 휴양도시에도 갔다. 10년지기 친구와 함께. 해변은 좀 특이했다. 모래사장이 밝은 황토색이 아니라 짙은 갈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래가 아니라 자갈해변이었다. 이상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햇빛이 뜨거워도 자갈은 차갑다. 누우면 시원하다. 자갈해변에선 향긋한 올리브오일 냄새도 났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의자 두개를 빌렸다. 하나당 2파운드. 의자에 앉았는데 뭔가 못마땅했다. 그래, 누워야겠어. 2파운드씩 더주고 선베드를 빌렸다. 해변가의 로망을 실현하려 준비해온 만화책을 꺼냈다. 근처 가게에서 기네스도 샀다. 플라스틱잔에 기네스를 담아주더라. 빨대를 달라 했더니 무표정한 얼굴의 점원이 푯말을 가리킨다. 빨대가 얼마나 환경을 파괴시키는지를 설명한 글이다. 아, 네네. 


맥주 파는 곳 옆에선 쪼리슬리퍼와 태닝오일도 팔고 있었다. 기왕 굽는거 조금 더 예쁘게 굽자는 생각에서 오일도 샀다. 이건 10파운드. 바르는 게 아니라 스프레이처럼 뿌리는 식이라 편하다. 뿌려보니 아까 처음 해변에 오자마자 맡았던 그 올리브오일 향이다. 냄새가 너무 좋아 온몸에 열심히 뿌리고 발라줬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태닝할일은 없지만 이 오일을 뿌리고 있다. 기분 좋은 브라이튼의 자갈해변을 떠올리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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