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심장이 뛰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영화 ‘킬링 디어’

by 일곱시의 베이글

심장이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껏 살면서 본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 뜻하지 않게 ‘보고야’ 말았다. 영화 ‘킬링 디어’의 첫 장면에서. 심장이 뛰는 모습이 어떨 것이라 상상해본적은 없지만, 그런 모습일 줄은 몰랐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은유적인 표현으로 심장을 빌려오곤 하는데, 실제 심장의 민낯은 전혀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 않았다. 성인 남성의 주먹만한 붉은 덩어리가 헐떡헐떡 숨을 쉬어댔다. 물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보였다. 그 장기는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고 규칙적으로 움직여댔건만 이상하게도 불쾌감을 자아냈다.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하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킬링 디어’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한가지. 지금껏 본 영화 중 가장 첫장면이 충격적이라는 사실이다. 무방비 상태로 팝콘을 먹다 너무 놀라서, 그리고 구역질이 나서 얼어붙고 말았다. 클로즈업 된 심장이 뛰고 있는 그 장면.(실제 심장 환자의 수술 장면을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심장은 지금도 내 안에서 뛰고 있다.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왼쪽 가슴에 손을 대보면 잔잔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일이지만 심장이 뛰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영상으로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보고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영화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갑작스레 등장한 장면이라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화관의 관객은 무척 수동적인 존재다. 좋든 싫든, 감독이 늘어놓은 이야기에 2시간 동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앙상하게 마른 ‘킬링 디어’의 니콜 키드먼.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살을 뺐을 것 같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첫 장면부터 나를 불편하게 만든 이 감독은,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사람이다. ‘킬링 디어’를 본 뒤 이 감독의 이전 작품인 ‘더 랍스터’도 찾아서 봤다. ‘킬링 디어’만 봤을 땐 아리송했던 부분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란티모스는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줄 아는 감독이다. 어떤 장면을 어떻게 연출해야만 불쾌함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를 너무 잘 안다. 이미지뿐 아니라 소리도 충분히 활용한다. 그가 강조하고 싶은 장면에선 여지없이 큰 소리로 불길한 음향을 크게 넣어 관객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극중에서 가족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스티븐’을 신에 비유하고 있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런 스티븐을 만들어낸 란티모스 감독이 더 신처럼 느껴졌다. 그는 전시전능한 신으로서 게임의 룰을 짠다. ‘킬링 디어’에서는 죄를 지은 한 남성에게 아내, 딸, 아들 중 한 명을 제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괴로워하며 고군분투하는 남성을 지켜보게끔 만든다. ‘더 랍스터’에선 투숙객이 45일 안에 짝을 만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해괴한 호텔을 짓는다. 동물이 되지 않기위해 발악하는 애처로운 인간들의 군상을 보여준다. 감독은 관객들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이것 봐, 이렇게 놀랐지? 이것 봐, 이렇게 끔찍하지? 이것 봐, 인간이라는 종이 이렇게 잔인하고 경멸스럽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들춰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방식이 직접적이고 투박하다. 이것 보다는 조금 더 은근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 신께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욕하면서도 궁금해서 계속 볼 수밖에 없는 막장드라마같다. 이전 작품이 궁금하고, 앞으로 새 작품이 나온다면 또 찾아볼 것만 같다. 후우, 낚인 기분이다.


아름답지 않은 장면. 관객을 메스껍게 만들 줄 아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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