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우리 팀 단체방에 올해 승진 대상자 공지가 떴다. 우리 회사는 매년 10월 정기 승진과 4월에 특별 승진 일정이 있는데, 올해 10월 승진 대상자를 미리 알려주는 거였다. 시니어 3호봉인 나는 매니저 승진 대상자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7월 말 출산 예정이었고, 10월에는 출산 휴가 중일 터였다. 그런 내가 승진을 할 수 있을까? 승진 대상자 공지를 한 파트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아마 승진 발령 시점에 근무 중이 아니라면 승진이 어려울 것 같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럼 내년 10월에는 대상자에 다시 올라갈 수 있나요?" 내년 10월에는 이전 1년간의 근무 이력을 바탕으로 심사를 하게 되는데, 나는 출산휴가에 이어 육아휴직까지 쓰고 나면 내년 7월에나 복직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년에도 승진을 못 한다. 올해도, 내년에도 못하고 내후년이나 돼야 승진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타이밍이 아주 나쁘다. 임신을 준비하며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파트너는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당장 남들보다 1-2년 빨리 가는 게 아니라 건강을 챙기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나라는 인간에게 하는 조언으로는 토달 것 없는, 완전히 맞는 얘기였지만 나의 인사권자에게 듣기에는 씁쓸한 이야기였다.
컨설팅으로 이직할 당시 경력을 절반만 인정받고 왔다. 나의 총경력은 11년이었는데, 이중 5년 정도만 인정받아 대리급인 시니어로 입사하게 되었다. 전전 직장에서도 과장이었는데 대리가 된 거다. 직급이 뭐가 중요하냐, 돈만 많이 받으면 됐지 라는 마인드를 갖기는 했지만 일하면서 때때로 불편한 순간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컨설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동년배들은 최소 매니저이거나 이사급이었다. 여기가 워낙 승진이 빠른 동네이고, 회사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직급이 깡패이니 토를 달아선 안 되겠지만 이런 상황이었기에, 승진을 꼭 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우선은 파트너한테 알겠다고 했지만 찜찜한 마음이 들어 동료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털어놓았더니 조금 더 알아보라고 했다. 승진 발령은 10월이지만 실제로 승진자가 결정되는 시점은 8월이고, 이 평가는 지난 1년간에 대한 것이기에 최근 1년간 만근을 했다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며칠을 고민했다. 괜한 욕심을 부리는 걸까? 회사에서 임산부라고 재택근무도 시켜주고, 일도 비교적 편한 걸로 시켜줬는데 승진까지 시켜달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인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결국은 우선은 해보자,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승진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후보에 올라갈 수 있는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마음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해 파트너에게 메일을 썼다. 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발령 시점에 출산 휴가 상태이기 때문인지? 생각해 보면 육아 '휴직'이 아닌 출산 '휴가'인데 휴가자라고 해서 승진을 할 수 없다는 건 좀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정확하게 승진 발령 시점이 언제이며, 승진 대상자가 되기 위해 정상적인 근무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물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이유라도 명확히 알고 넘어가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아서다.
며칠 뒤 파트너에게 답장이 왔다. 출산휴가자라고 해서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며, 다른 대상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뛸 듯 기뻤다. 실제로 승진을 하든 하지 못하든, 어쨌든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임신 중에 남들만큼 야근도 많이 못하고 팀에 대한 기여도도 낮았기에 승진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도 남들처럼 대상자가 되고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올해부터는 승진에 새로운 절차가 생겼다. 그동안의 업무 성과를 자료로 만들어 발표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료 만들고 발표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정말 신이 났다. 몇 날 며칠 자료를 준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발표 날짜가 공지되었다. 출산으로부터 이틀 전이었다. 몸 상태가 괜찮았기에 출산 전 양수가 터지지만 않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발표 하루 전에 승진 PT 일정이 몇 주가 밀렸다고 했다. 8월 초인데, 계산해 보니 조리원에 있을 시기였다. 출산하고 2주 정도 지난 시점. 출산 이틀 전과 출산 2주 후 어느 때가 더 나을까? 둘 다 좋은 시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일정을 조율해 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대상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산 하루 전, 복잡한 마음이 들어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승진 PT 자료도 70% 정도밖에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저녁 8시 컴퓨터를 켜 자료를 마저 마무리했다. 출산에 대한 기대와 설렘,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3시간 정도 자료를 만들어서 결국 마무리 지었다. 후회는 없다.
그렇게 아기를 낳고 일주일이 흘렀다. 다시 승진 PT 날짜와 장소가 공지되었다. 원래는 대면 발표가 원칙이나, 출산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온라인으로 진행해도 된다고 했다. 몸 상태가 괜찮아서 회사에 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오프라인으로 참석해서 발표를 하겠다고 했다. 온라인 발표와 오프라인 발표는 천지차이다. 아무리 발표를 잘해도 비대면으로 하면 청중의 반응도 볼 수 없고, 전달력도 떨어진다. 대면으로 발표를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조리원에도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고, 잠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고 회사에 갔다 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러자 파트너는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데.." 라며 난처해했다. 그제야 내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자각이 되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아서 기계적인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겠다는 주의였으나 이런 나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회사에 연락해 온라인으로 발표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승진 심사 발표 날이 밝았다. 조리원에 있는 나는 미리 유축도 해두고, 발표 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곤란하니 오후 5시부터는 수유콜을 받을 수 없다고도 얘기해 두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저녁 간식 배급이 발표 시간과 겹쳐 "간식입니다!"라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혀 발표 중에 굉장히 당황했다) 화상회의 카메라를 켜야 하니 샤워를 하고 입원할 때 입고 온 검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발표 스크립트를 썼다. 여러 번 발표 연습을 해봤지만 스크립트가 없으면 말이 꼬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10분간 발표를 했고, 10분간 질의응답을 했다. 평가자로는 우리 팀의 상무, 파트너들이 참석했다. 평소같이 일해 본 적 없는 상무, 파트너들도 관심을 갖고 질문을 했다. 전반적으로는 평가가 좋았다. 발표 준비를 아주 잘했고, 방송 기자가 읽는 것처럼 전달력도 좋았다고 했다. 10년 후에는 파트너가 되겠다는 발칙한 포부(?)도 박제하고 싶을 만큼 감동적이라는 피드백도 있었다.
최고 인사권자인 리드 파트너는 "목표치를 크게 잡는 것은 좋지만 본인 역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기를 바라며 앞으로 더 노력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승진을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이야긴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할 만큼 했으니 후련했다. 승진을 하면 좋겠지만 못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에 승복하면 될 일이다. 이상 출산휴가자의 승진 PT 후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