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원 Mar 24. 2024

컨설턴트가 실제로 보고서를 쓰는 과정

복직 후 첫 프로젝트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2월 말에 투입돼 딱 한 달 동안 수행하는 프로젝트인데 지난 금요일에 고객사 브리핑을 마치고 이제 다음 주엔 번역 작업과 최종 마무리만 하면 된다. 끝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처음부터 한 달짜리 프로젝트라 생각하고 임하니 일정 관리도 타이트하게 하게 되고, 끝이 보이니 더 열심히 하게 됐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프로젝트 초기에 패딩 입고 시작했는데, 옷이 많이 얇아졌다.


언제?

2월 말부터 3월 말까지 한 달간.


어디에서?

고객사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고객사에서 마련해 준 공간이지만 근무 공간은 완전히 분리돼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함께 일하는 층에는 대부분 우리 회사처럼 협력사들만 모여 있어서 화기애애한 느낌. 우리 팀은 9 to 6로 근무했지만 다른 팀들은 10 to 7으로 하기도 하고, 출퇴근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객사 근무의 가장 큰 단점은 보안 문제로 인해 우리 회사에서 지급된 PC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별도의 PC를 렌털해서 고객사의 보안프로그램을 깔고 업무를 해야 했는데, 늘 사용하던 파일 공유 기능을 쓸 수 없고 번역, 생성형 AI(ChatGTP 등) 등 접속이 제한된 사이트가 많아 일하는 데는 불편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여의도 본사에 가서 업무를 했다.


주 1회 도피처가 되었던 여의도 사무실

무엇을?

글로벌 TV 시장 동향을 파악해 분기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타사 벤치마크에 기반한 인사이트 보고서. 이 프로젝트가 낯설지 않았던 건 2022년에 이미 한 차례 해본 적​이 있었다. 5개월간 프로젝트를 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PM도 그때 그대로, 팀원들도 그대로, 고객사 담당자도 그대로. 다만 내 역할이 바뀌었다는 게 가장 큰 변화였다. 4개 제품군(TV도 그중 하나)에 대한 보고서를 담당자 4명이 각각 작성했는데, 이때 제품군을 포괄하는 데이터 작업을 내가 했었다. 데이터가 방대하고 봐야 할 뷰도 많아서 우선 내가 밑작업을 해서 제품 담당자들한테 전달해 주면 그들이 그 숫자와 차트로 보고서를 찍어내는 일. 데이터 만지는 일을 좋아하니 당시엔 그 일이 재미있기도 했는데, 좀 아쉬웠던 건 메인 선수가 아닌 서포터 느낌이었던 것. 어쨌든 컨설턴트로서는 보고서를 써내는 게 최종 산출물인데 나는 내 것이 없는 느낌이랄까?


여하튼 이번에 다시 이 프로젝트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과 걱정이 공존했는데 첫 번째로 안심은 내가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흐름을 알고 있다는 점. 2개 분기 작업을 해보았기에 어느 시기에 어떤 작업을 해야 하고, 고객사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객사 담당자의 특징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에 걱정은 이게 무엇인지 알기에 무서운 건데.. 당시 제품 담당이었던 팀원 각각이 하는 일이 굉장히 방대해 보였다. 시장 리서치부터 전문가 인터뷰, 보고서 스토리라인 잡기, 장표 그리기 등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온전히 해내야 했다. 우리 PM은 컨설턴트 개개인의 역량을 매우 존중하는 편이라, 큰 틀에서 조언만 해줄 뿐 세세하게 방향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내가 두려웠던 건 뜻밖에도 언어에 대한 장벽이었다. 시장 조사도, 전문가 인터뷰도, 보고서도 모두 영어로 해야 했는데 프로젝트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점이 가장 걱정이 됐다. 프로젝트 들어가기 전 1-2주 동안 벼락치기를 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었기에 그저 문제가 닥치면 부딪혀 봐야겠다 생각했다. 당시의 제품 담당 팀원들은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 살았거나, 대학을 나왔거나, 근무 경험이 있었다. 나는 여행만 해봤을 뿐, 비즈니스로써 영어를 접한 경험이 적었기에 두려웠다.


통근길엔 휴게소를 포함해 광역버스를 2번 갈아타야 했는데, 어느 날은 집에 오다 지쳐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떻게?


1주 차 : 데스크 리서치 및 가설 수립


글로벌 TV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데스크 리서치를 통해 알아본다. 시장조사기관에서 나온 시장 수요, 출하량, 전망, 시장 점유율 자료 등을 보는 거다. 그러면서 어떤 주제가 우리 고객이 가장 궁금해할지를 염두에 두며 아이템을 뽑아본다. 이때는 정말 모든 것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살펴본다. 그동안 우리 팀에서 썼던 보고서들을 참고해서 기존에 썼던 것과 겹치는 것은 빼고, 지금 고객이 관심 있어할 만한 것들을 추려내 본다. 내가 첫 주에 뽑았던 주제 리스트는 다음 5가지 정도였다.


- 프리미엄 패널 수요 증가와 향후 전망

- OTT 서비스 성장에 따른 TV 시장의 미래

- 라틴아메리카 TV 시장의 성장 원동력과 전망

- 웹사이트 UI/UX 개선에 따른 TV 판매량 제고 방안

- 고객의 생애주기 및 특성에 따른 선호 TV 제품 분석


2주 차 : 가설 검증 및 동료/PM 리뷰


이제 위 5개 가설에 대해서 각각의 근거 자료들을 찾기 시작한다. 어떤 주제를 잡아야 고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시장에서 주류가 되는 이야기가 고객의 관심사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결국은 고객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소재라도 지금 고객이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아니라면 사장되고 마니까. 좋은 주제라도 근거가 탄탄하지 않으면 기각될 수 있으니 각각의 가설에 대해 충분히 근거를 마련해서 자료 준비를 했다.


처음에 나올 수 있는 가설이라는 건 뻔하디 뻔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고객 생애 주기와 고객 특성에 따른 선호 TV 제품이라 하면, 20대의 사회 초년생들은 대형 TV를 구매할 금전적 여력이 부족하고 주거 형태 역시 자가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형의 중저가 제품을 선호할 것이다. 또는 TV를 설치할 공간이 부족해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큰 스크린을 즐길 수 있는 빔 프로젝터에 대한 선호도도 다른 연령층 대비 높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내 나름대로 세워보는 거다. 그런 다음 기존 고객사 내부 데이터나 시장 데이터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를 찾아본다.


5개의 주제에 대해 팀원들과 시시때때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리뷰를 받는다. '아 선생님, 그 주제는 저번에도 하겠다고 했는데 고객이 별로랬어요'와 같은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럼 저번과 다르게 방향을 좀 틀어보거나, 주제를 기각하거나 중에 결정해야 한다. 동료들 리뷰를 받은 다음 PM에게도 가설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그리고 PM은 주제를 두 개 정도로 추려주었고, 둘 중 어떤 걸 선택할지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결정은 보고서를 쓸 내가 하는 것. 결국 최종적으로 채택된 주제는 내가 가장 안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혹시 몰라 가져갔던 안이었는데 이게 되는구나.


팀 내부에서 주제가 정해졌다고 끝이 아니다. 고객사에서 OK 해야 보고서를 쓸지 말지 정한다. 워드에 2장 정도 분량으로 압축해서 주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브리핑을 했다. 나는 사실 자신이 없었던 안이었는데 의외로 고객은 아주 좋다고 했다. 지금 회사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라고. 흔쾌히 승낙을 받고 자신 있게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3주 차 : 스토리라인 잡기, 전문가 인터뷰 및 보고서 작성


이제 보고서를 쓸 시간이다. 우선 장표를 그리기 전 전체적으로 어떤 흐름으로 쓸지를 구상한다. 그런 다음 파워포인트를 띄워놓고 제목을 쓰는 란(우리는 여기를 '거버닝 메시지'라고 부른다)에 각 페이지별 주제를 글로 적어본다. 내용 영역은 비어 있는 상태다. 스토리라인이 탄탄하게 짜지면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은 알아서 술술 채워지기 마련. 거버닝 메시지만 적어둔 상태로 PM에게 브리핑을 한다. 그럼 PM은 1번에서 2번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부자연스러운데? 하면서 연결고리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해서 스토리가 만들어지면 그다음부턴 내용을 채운다.


데스크 리서치는 한계가 있으니 현직, 또는 전직에 있는 전문가를 찾아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이는 전문 에이전시에서 구해준다. 우리는 필요한 전문가의 프로필을 적어서 보낸다. 마치 인사팀에서 사람을 뽑을 때 직무 상세(JD, Job Description)를 적듯 컨설팅회사에서도 전문가의 업종, 직종, 경력 연수, 회사명 등 희망하는 내용을 적어서 보낸다. 여기에는 VQ(Vetting Question)이라는 일종의 테스트도 붙는다. 해당 분야에 전문가가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테스트 질문으로, 여기에 성실하게 답한 전문가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모든 질문에 저는 답할 수 있어요'라고 하지만 정작 인터뷰를 해보면 두루뭉술한 얘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VQ에 비교적 성실히 답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렇게 걸러내고 해도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성공률은 20% 미만인 것 같다. 우리가 딱 원하는 답을 해주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데스크 리서치를 바탕에 깔고 전문가 인터뷰로 살을 붙여서 보고서를 완성해 나간다. 우리는 장표를 '그린다'라고 한다. 정말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일에 가깝다. 보고 받는 사람이 단번에 머릿속에 이해가 될 수 있도록 보기 좋게 그림을 그려주는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구조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나는 기자로서 글 쓰는 일을 주로 해왔던 사람이라, 이걸 이미지화하는 게 어려웠다. 마치 만화를 그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색깔을 많이 써서 화려하게 한다거나, 이미지를 많이 써서 예쁘게 보이게 한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번에 쓴 보고서는 10장 남짓의 비교적 짧은 분량이었는데 그 안에서도 단조롭지 않도록 여러 레이아웃을 짰다. 왼쪽 차트에는 막대그래프를 썼다면 오른쪽에는 원형 그래프로, 1번 슬라이드에는 차트가 많았다면 2번 슬라이드에는 구조화된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도형 위주, 3번은 분석을 포함한 표 등 다채롭게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단조로움을 피하는 것과 산만함은 다른 얘기다. 그 안에서도 텍스트 크기와 여백, 중요한 용어의 통일 등 전체적인 보고서의 템플릿의 표준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오히려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한다면, 일관된 표현을 사용하는 정제된 문서의 중요성이 더 크다. 이게 완벽히 된 후에 비로소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변주가 들어가는 거다.


4주 차 : 보고서 초안 브리핑


보고서를 작업하는 동안에는 맨 위에 초안(Draft Report)이라는 빨간 글씨가 늘 달려 있었다. 이 초안은 고객사의 담당자 선에서 리뷰가 될 것이며, 담당자의 컨펌을 받고 나면 비로소 최종본(Final Report)이 되어 고객사의 의사결정권자에게 브리핑이 된다. 내가 한 작업은 고객사 담당자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일이었다. 고객사 의사결정권자에게 하는 브리핑은 나보다 상급자인 PM이 하게 될 것이다.


고객사 담당자에 브리핑하기에 앞서 각각의 슬라이드에 스크립트를 작성했다. 보고서에 쓰는 표현과 실제로 말로 표현하는 것은 달리 했다. 예를 들면 보고서상에는 8%라고 수치를 적었지만 실제로 스크립트에는 '100명 중 10명도 안 되는 고객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서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과 언어로 전달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 방법이 옳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했다.) 그리고 스크립트를 다 작성한 뒤 여러 번 읽어 보면 턱턱 걸리는 부분들이 있다. 문서로 봤을 때는 괜찮지만 말로 읽으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다. 그런 부분들은 과감하게 구어체로 바꿔서 썼다.


30분 정도 고객에게 브리핑을 하는 동안 10개 정도 되는 질문을 받았던 것 같다. 뜻밖의 질문들도 있었고,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있었는데 비교적 잘 대답한 것 같다.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돌발적인 질문을 받으니 생각보다 술술 대답을 잘 한 부분도 있었다. 자신 있는 주제였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주제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건 너무 쉬운 길로 가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나름 컨설턴트라면 조금 더 거시적인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스스로 역량 강화 차원에서도) 이번에 선택한 주제는 꽤나 실무적인, 핸디 한 얘기였다. 그동안 경험이 있던 분야였기에 보고서를 쓰는 데 있어 어려움은 적었지만 조금 더 어려운 주제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찌 됐든 고객 피드백은 긍정적이었다. 내부에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주제인데 잘 정리가 된 것 같다,라고 했다. 날아갈 듯 기뻤다.


5주 차 : 영문 번역, 최종 딜리버리


이제 다음 주에는 한글 리포트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초안 내용에 대해서는 컨펌이 되었으니 번역이야 뭐, 이제 여러 툴들의 도움을 받아서 하면 된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원래는 영문으로만 보고서를 쓰기로 했었는데 한글 보고서도 달라고 해서 우선 한글로 먼저 썼다. 번역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인데 확실히 번역이라는 건 1:1로 대응되는 일이 아니다. 표현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서 손볼 일이 많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벌의 보고서를 한글과 영문으로 작성해 보는 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동안은 늘 팀원들과 함께 보고서를 완성하고, 주제도 정해져 있는 있었기에 내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A부터 Z까지 내 손으로 해보면서 공부도 많이 되었고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 각국 타임존 : UTC, PST, EST, KS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