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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an 27. 2016

대통령 감독, 재벌 주연, 민생은 들러리?

‘민생’ 볼모로 삼은 대기업 입법촉구 서명운동


청년희망펀드에 이어 이번엔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천만 서명운동’이다. 청년희망펀드처럼 돈을 모으는 건 아니지만 대통령이 눈치를 주면 재벌들이 앞다워 동참한다는 점에서 닮은 데가 많다. ‘민생’이나 ‘청년’ 같은 키워드를 앞세워 잇속을 챙기려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지난해 9월 청와대가 주도한 청년희망펀드부터 다시 보자. 이 펀드의 1호 가입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2000만원을 일시금으로 내고 매달 월급의 20%를 기부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200억)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150억), 최태원 SK회장(100억)도 수백억원을 쾌척했다. 재계 순위에 맞게 기부금이 정해진 것을 보면 각 기업에서도 금액 선정에 꽤나 고심을 했을 듯 싶다.


이렇게 모인 돈이 1300억원에 이른다. 어디에 쓸지는 아리송한 상태다. 청년희망펀드 홈페이지의 사업 소개를 보면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한 펀드”라며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일에 쓰일 것”이라는 하나 마나 한 말만 적혀있다. 기부금은 어떤 목적으로 어디에 쓸지를 분명히 정한 뒤에 모집하는 것이 순서다. 그럼에도 ‘청년 일자리’라는 허울 좋은 문구만 걸어 놓고 대통령이 솔선수범하니 재벌들은 마지못해 동참하는 모양새다.


요즘 한창 진행 중인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서명운동도 매한가지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축이 된 행사로 서비스산업발전법, 기업활력제고법(일명 원샷법), 노동개혁법이 조속히 통과될 수 있게 천만 국민이 서명해달라는 내용이다. 이 이벤트에 불을 지핀 것도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8일에 거리에 설치된 서명운동 부스를 찾아 사인을 했다. 대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여기 포함된 법안들은 대기업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들이다. 서비스산업발전법이 통과되면 대기업이 보건·의료분야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기업 M&A를 신속하게 해주는 기업활력제고법, 해고를 쉽게 만드는 노동개혁법도 민생구하기와는 거리가 먼 법들이다.


그럼에도 재계는 서비스산업발전법안이 일자리를 69만개 만들고, 기업활력제고법은 산업 경쟁력을 높여주며, 노동개혁법은 청년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며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일이니 하지 말라고는 안하겠다. 다만 ‘청년’이나 ‘민생’ 같은 구호를 내걸며 사실을 왜곡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 말만 보고 진심으로 나라경제를 걱정하며 서명하는 사람이 나올까 우려스럽다.


중기이코노미에 2016년 1월 6일 자로 보도된 기사입니다.






지난해 비슷한 맥락의 행사가 하나 더 있었다. 통일과나눔재단에서 벌인 통일나눔펀드 모금운동이다. 주변의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했는데 아주 기가 찰 노릇이었다. 회사가 기부금을 강요한 사례가 상세하게 접수됐으나 취재원의 신변 노출 우려 때문에 기사에는 자세히 적을 수 없었다. 아래는 중기이코노미 2015년 9월 1일자 보도 전문.


회사가 특정단체 기부권유 “강요” vs “자발적”

통일나눔펀드…불이익 두려워 기부 약속 “회사 도의적 책임있어”


<자료=비자트>


2000억원. 지난 8월17일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이 통일과나눔재단에 내놓은 기부금액이다. 국내 기업인이 이처럼 대규모 기부금을 특정 단체에 쾌척한 것은 처음이라 재계는 들썩였다. 이 명예회장이 기부한 통일과나눔은 지난 7월7일에 출범한 재단법인이다.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출신인 안병훈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출범한지 두 달이 채 안됐지만 호응은 상당하다. 전병길 통일과나눔재단 사무국장은 지난달 28일 중기이코노미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약 6만3000명이 통일나눔펀드에 참여했다. 기부금 총액은 약 2100억원으로 이준용 명예회장이 이중 2000억원을 냈다”고 했다. 전 사무국장의 말에 따르면 두 달간 약 6만3000명으로부터 100억원을 모금한 셈이다.


그러나 일부 기업에서는 직원들에게 기부금 약정을 강요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A사의 B씨는 중기이코노미에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가입을 했다”고 말했다. C사의 D씨도 “회사가 권하니 심리적 부담이 클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사연이 올라와 있다. 지난 7월23일 한 인터넷커뮤니티에는 “통일나눔펀드 가입 권유를 받았는데 말이 권유지 반 강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글이 올라왔고 지난 8월3일 다른 커뮤니티에도 “회사에서 통일나눔펀드에 기부하라고 강요를 한다. 일단 만원을 한다곤 했는데 불안하다”는 글이 이어졌다.


<자료=인터넷커뮤니티 ‘오늘의유머’, ‘DVD프라임’ 홈페이지 화면 캡처>


◇재단·기업들 “기부 강요 말도 안돼” 일축=최근 두달새 유명 연예인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까지 통일나눔펀드에 동참하는 모양새다. 북한의 물폭탄 공격에 대응한다며 1986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600억원을 모금했던 ‘평화의 댐’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통일나눔펀드의 큰 손은 기업이다. 공공기관, 공기업, 대기업, 중견기업 할 것 없이 앞 다퉈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LH공사(4968명)와 삼성전자(1920명)를 필두로 금호아시아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산업은행, LG디스플레이, LG생활건강, LG전자, LS그룹, GS그룹, IBK기업은행, KT, 에쓰오일, 식품의약품안전처, 신세계그룹, 파라다이스그룹, 한국도로공사, 한국무역보험공사, 한화그룹 등이 기부금 약정에 참여했다. 기업별로 참여인원과 금액은 각기 다르다.


통일과나눔 측은 기업 단위로 약정을 받기는 했으나 개인이 참여했다는 데 의의를 뒀다. 현재까지 몇 개 기업이 모금에 참여했느냐는 질문에 “기업이 아니라 6만3000명이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답변을 내놨다. 일부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기부를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해 전병길 통일과나눔 사무국장은 “우리와 관계 없는 일이다. 기업 문화에 따라 그런 일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재단 입장에서 가타부타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기부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약 5000명이 참여한 LH공사 신홍길 홍보실 차장은 31일 중기이코노미와의 통화에서 “LH가 남북경제협력사업을 선도하는 입장에서 참여하게 됐다. 임직원 6600명 중 4968명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신청했다”고 했다.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 권승한 과장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가장 큰 의미가 통일이라는 생각에 직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게 됐다. 사내 인트라넷에 공고를 올렸고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른 사회공헌활동과 마찬가지였다”는 입장을 냈다.


◇“법적 문제 없지만 도의적 책임”=직원들에게 기부금을 권유하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임직원의 기부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무법인 나무의 김현수 노무사는 “근로기준법 23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등을 행할 수 없다. 근로자가 기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면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B씨의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기부 약정서를 제출했으므로 법적인 책임을 묻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김 노무사의 설명이다.


회사 측에 도의적인 책임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노무법인 사람과사람 박현진 대표노무사는 “회사 측은 강요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근로자들은 심리적인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노무사는 “회사가 근로자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임금에서 기부금을 공제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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