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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un 09. 2016

침해 판단자료 제출안하면 특허권자 주장 인정

영업비밀이라도 제출 의무…특허법 개정안 이달 말부터 시행

한국 5900만원 vs 미국 49억원. 특허침해 소송 손해배상액의 중앙값이다. GDP 등 경제규모 차이를 감안해도 천문학적인 액수 차다. 이처럼 한국의 특허침해소송 손해배상액이 턱없이 적은 것은 현실적으로 특허침해 여부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특허소송에서는 침해당한 사람이 상대방의 침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입증할 수 있는 열쇠는 침해한 쪽이 쥐고 있다. 지금까지는 특허침해자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들며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특허청이 칼을 빼들었다. 특허침해자의 증거제출 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특허법 개정안이 3년간의 진통 끝에 국회를 통과해 오는 30일부터 시행된다. 특허청 박성준 산업재산보호협력국장은 지난 3월 특허법 개정안 브리핑에서 “특허권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현행법이 지식재산권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며 열변을 토했다.



박 국장은 “특허를 무단으로 쓴 기업도 기껏해야 5900만원만 물어주면 된다. 돈 주고 쓰는 것보다 일단 쓰고 걸리면 그때 가서 물어주는 게 싸게 먹힌다는 뜻”이라며 “대한민국에서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기술 침해가 쉬우니 기술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 은행에서도 특허만 믿고 대출을 해줄 수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특허 침해 소송 시 영업비밀이라도 증거 제출 의무


현재 특허소송에서 특허권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침해사실 입증이다. 침해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생산매뉴얼이나 설계도를 증거자료로 제출해야 하는데 해당 자료는 침해한 기업이 가지고 있다. 기존 특허법 132조에서는 “침해행위로 인한 손해를 계산하는데 필요한 서류 제출을 명령할 수 있다”면서도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서류 제출을 거절할 수 있게 예외를 뒀다. 이 때문에 증거를 손에 쥔 특허 침해기업은 영업비밀을 정당한 사유로 들며 서류 제출을 거절해 왔다.


개정 특허법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앞으로는 영업비밀이라도 해당 자료가 특허 침해행위를 판단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제출해야 한다. 그래도 특허침해자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경우, 법원은 특허권자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기로 했다. 가령 특허권자인 A사가 B사의 특허침해로 10억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는데, B사가 반박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법원은 A사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특허침해 혐의가 있다 해도 B사의 영업비밀을 A사에 공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특허소송 당사자는 동종업계 경쟁사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에 특허청은 B사가 제출한 영업비밀 자료는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 판사만 해당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제한을 뒀다.


특허침해자의 증거제출 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특허법 개정안이 오는 30일부터 시행된다. <자료=비자트>


특허법 128조의 명칭은 ‘손해액의 추정’에서 ‘손해배상청구권’으로 바꿨다. 고의 또는 과실로 특허권을 침해한 이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전보다 분명히 한 대목이다. 특허권자의 손해액은 특허침해자가 침해행위로 얻은 이익액으로 정했다. 특허침해 사실이 명백한데도 사건의 특성상 손해액을 증명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에 기초해 손해액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료 제출자의 감정사항 설명 의무도 신설했다. 법원이 손해액 산정을 위한 회계 장부를 받아도 비밀기호나 약식 표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서다. 개정 특허법 128조에 따르면 특허소송 관련 장부를 제출한 사람은 감정인에게 장부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


특허소송 중소기업 간 분쟁이 80%…징벌적손해배상 빠져


이번 특허법 개정은 특허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나 아쉬운 대목도 있다. 특허침해자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부과할 수 있는 제도다.


미국에서는 고의로 특허를 침해한 경우 손해액의 3배까지 손해배상 의무를 지우고 있다. 미국의 특허소송 손해배상액이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원혜영 의원이 지난해 4월 고의적인 특허침해자에 징벌적 손해배상 3배를 물리자는 내용의 특허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부결됐다. 아직은 반대의견이 우세해서다. 특허청 박성준 국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3배를 배상해주는 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1배라도 제대로 보상해주는 게 중요하다. 이번 개정안은 그 1배를 철저하게 보상해 줄 수 있는 제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특허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중소기업의 손해배상액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얘기다. 특허청 산업재산보호정책과 박양길 서기관에 따르면 특허소송의 80% 이상은 중소기업 간의 분쟁이다. 특허권자도 중소기업, 특허침해자도 중소기업이라는 의미다. 통념과는 달리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특허침해 소송을 거는 경우보다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거는 경우가 많다. 이번 개정안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딱히 유리하다기보다는 특허권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박 서기관의 설명이다.


사법부에서 바뀐 법을 얼마만큼 적용할지도 관건이다. 박성준 국장은 “법 개정도 의미가 있지만 더 주의해서 봐야할 부분은 법원에서 얼마나 적용하느냐”라면서 “특허침해자에게 적극적으로 증거제출 명령을 내리고, 감정인에게 감정 설명을 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충정 특허법률사무소 강태훈 대표변리사도 의견을 같이했다. 강 변리사는 이번 특허법 개정안에 대해 “특허법과 법원에서는 침해액을 입증할 때 ‘강한’ 인과관계를 요구한다. 증거를 제출 받아도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기준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침해액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을 수 있다. 직접적인 침해액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간접 증거로 유추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인정하는 법관의 심증은 제도를 운용하면서 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정안 취지는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강 변리사는 “자료제출 의무에 따라 침해사실 입증과 침해액 산정이 용이해져 특허권자의 승소가능성과 손해배상액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며 “종전과 비교하면 특허권자를 두텁게 보호하는 방안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입법 취지에 맞게 제도가 잘 운영돼 그간 유명무실했던 특허권자 보호가 현실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기술유출로 인한 지식재산권 피해 20억원 넘는 中企도


특허 침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이 자사 기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은 취약한 수준이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중소기업의 기술보호 역량 점수는 100점 만점에 45.6점이었다. 기업의 보안정책, 보안관리 현황, 보안인력 관리, 보안사고 관리 등을 평가한 수치다. 전년도에 비하면 2.3점 상승했으나 대기업(65.6점)과 견주면 여전히 낮다.


기술유출로 인한 지식재산권 피해는 중소기업에 더 치명적이다. 특허청이 국내 2만5000여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식재산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4년에 1건 이상 지식재산권 침해를 받은 경험이 있는 대기업은3.4%, 중소기업은 6.6%였다. 피해금액도 중소기업이 컸다. 대기업의 지식재산권 침해 피해금액은 5억원을 넘은 사례가 없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5~15억원이라는 응답이 44.2%, 20억원 이상이라는 응답도 9%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도 중소기업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법무부, 산업부, 공정위, 중기청, 특허청, 경찰청 등 7개 정부기관은 지난 4월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열고 범정부 중소기업 기술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부당한 기술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중소기업의 기술 탈취를 예방하는 한편, 사후구제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 구상안에 따르면, 악의적인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 손해액의 최대3배까지 배상책임을 물린다.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벌금액은 기존보다 10배 높인다. 국내 유출은 기존 5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해외 유출은 기존 1억원에서 10억원으로 상향한다.


시간과 비용 문제로 소송을 진행하지 못하는 중소기업의 현실을 감안한 조정 제도도 신설한다. 중기청 기술협력보호과 정승국 사무관은 “중소기업의 기술유출 분쟁에서 침해자가 공공기관이거나 대기업이고, 침해 사실이 명백할 경우 중소기업청장 명의로 시정 권고를 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며 “법적 검토가 필요해 연구용역을 실시한 뒤, 올해 말에는 법을 상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중기이코노미 2016년 6월 8일자 , 월간 <비자트> 6월호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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