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예술은 실제 인식을 변화시키는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증명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는가?
인식은 교육될 수 있는가?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 문항 중 일부다.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이 질문들은 알음알음 인터넷을 떠돌며 한국인들에게 회자됐다. 오지선다의 우리네 수능 문제와 너무 달라서다.
한국에도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대학이 있다. 인간은 지금까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왔는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학기술은 근현대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경희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 내용이다. 이 학교가 2011년에 시작한 교양교육 과정인 후마니타스 칼리지다.
후마니타스 칼리지 유정완 학장은 사회에 나갔을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탁월한 개인, 책임 있는 시민, 성숙한 공동체 성원’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다. 대학교육이 학문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는데도 중점을 둔다.
실천을 강조한 취지에 맞게 재기발랄한 프로젝트들도 등장하고 있다. 2014년 과자로 뗏목을 만들어 한강을 건넌 퍼포먼스가 대표적이다.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수강 중인 학생이 제과업계의 과대포장을 꼬집기 위해 진행한 과제였다. 이밖에도 생맥주 도량형, 노인 자서전 써주기, 국어사전 단어 뜻 바꾸기 등의 다양한 실험이 진행됐다. 당장 취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을 취업사관학교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대학에 몸담고 있는 4년 동안은 사회에 기여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죠.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들끼리는 ‘영혼의 맷집’을 키워준다고 표현합니다”
유 학장은 후마니타스 칼리지 이후 학생들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확실히 달라졌어요. 취업에만 목매는 것이 아니라 창업을 하겠다는 학생도 많이 나오고 사회적기업, 비정부기구(NGO), 비영리단체(NPO)에도 관심을 보입니다. 이전보다 자기 주장을 내는 학생들도 많아졌고요”
올해부터는 학생이 연구과제를 정하고 담당교수를 신청하면 학점을 인정해주는 ‘독립연구’ 교과도 만들었다. 주제는 자유다. ‘동반성장을 위한 대기업 신뢰지수 개발’, ‘국제 스포츠 행사의 대형화 제재’, ‘한류관광 신드롬 실태와 공정여행 가능성 모색’, ‘무엇이 인간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드는가’, ‘중국 내 한류 짚어보기’와 같은 과제가 도출됐다. 자발적으로 과제를 정한 학생들은 한 학기동안 자유롭게 연구한 뒤 결과물을 내보일 터다.
이상적인 교육이나 물음표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청년실업률은 매월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공무원시험 준비생은 40만명에 이른다. 정부는 취업률을 기준으로 대학 등수를 매겨 재정을 지원한다. 후마니타스(인간다움)를 가르친다는 경희대의 실험이 현실과 괴리된 듯 보이기도 한다. 유정완 학장의 생각은 다르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인공지능 ‘알파고’에서 봤듯 앞으로 더욱 장기적인 실업이 일어날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겠죠. 문명전환기, 4차 산업혁명이라고들 합니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자신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돌이켜봐야 합니다.
길을 가던 공무원이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공무원 준비생과 부딪혀 두 사람 모두 사망한 사건은 우리사회의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부터 메르스 사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노인빈곤율 1위 등 우리사회에 산적한 문제도 거론했다. 산업화를 거치며 물리적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정신적 허기는 더 커졌다. 국가의 부가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한국 기업문화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학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한국 특유의 하도급 문화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어려워한다. 리베이트 문제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리베이트 같은 (편법적인)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중소기업에 도움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론 아니다. 올바른 기업문화와 공정거래에 기여하는 미래 세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586 기성세대라는 그는 미래세대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 감히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그는 패러다임 전환기에 성장한 현 세대가 해법을 찾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법을 미래세대가 찾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 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중기이코노미에 2016년 6월 18일자로 보도된 기사입니다.
취재후기.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부쳐’, ‘남북통일은 참사랑으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있는 청운관 1층 로비에 붙어있던 대자보 제목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대자보였다. 전지를 손글씨로 채운 대자보에는 화자(話者)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있었다. 의외였다.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이나 공무원시험 준비에 매몰돼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탓이다.
우리사회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는 대학생들을 보니 안심이 됐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건 무관심과 냉소다. 무언가를 해봤자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다. ‘헬조선’이라고들 한다.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살게 되고 있다. 청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그럼에도, 대자보들을 보며 아직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변화를 갈구하는 생생한 목소리가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모든 대학이 경희대 같은 것은 아니다. 취업사관학교라 불리는 대학도 많다. 정부는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해 예산을 지원하고, 대학은 정부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경희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자 한다고 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유정완 학장의 말이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2011년 이 학교가 교양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유 학장은 사회에 나갔을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직업인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후마니타스의 뜻이 인간다움이다. 배움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천까지 하자는 게 지향점이다. 학교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의 결과물을 학교 밖에서 실천하라며 등을 떠민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만 고민하지 말고 좀 더 시야를 키워 책임 있는 시민이 되라는 얘기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보는 거다.
유 학장과 한시간 반 가량 인터뷰를 하며 여러 질문들이 맴돌았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가? 대학교육이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한들 이들이 직업전선에 뛰어 들어도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정답은 없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경희대의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속에서 이뤄진 건전한 고민들이 우리사회를 바꿔가는 발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