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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진 WonjeanLee Sep 09. 2016

인생의 오답노트

"틀리는 건 고마운 거야"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

오답노트를 쓰면서 인생을 돌아보고프단 생각이 들었다. 

오답은 살다 보면 부딪히는 불편한 상황이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문제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애써 자위했던 문제

결국 틀리고 말았다는 걸 깨달을 때다. 


아이들 보고 문제집 풀라고 독려할 때 나는 

"틀리는 건 고마운 거야. 

문제집을 푸는 건 틀리는 걸 알기 위해서 

그래서 틀리는 게 나올 때까지 풀어보는 거야.

엄마도 그래. 문제집을 풀기 전까진 다 아는 것 같았는데

틀리고 나서야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게 되거든"

한다.

말은 쉽다.


누구나 틀리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한국문화에선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오답에 대한 혐오는 점점 강화된다. 

나는 오답을 혐오하도록 교육받았고

오답에 대한 체벌까지 용인하는 학원에 다녔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가 틀린 표시로 찍 긋는 금이 그렇게 싫어서

맞는 것만 동그라미 해달라고 부탁한 후

틀린 건 비워놓고 다시 풀어서 그 자리에 동그라미를 쳤었다.

내 문제집과 공책은 늘 다 맞는 흔적밖에 없었다. 

흠결 없는 완벽함이 

그게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부끄럽기에

틀리는 게 싫다고 공부를 거부하는 내 아이들에게 

틀리는 게 고맙다는 말을 자꾸 하게 된다. 

"틀리지 않았더라면 네가 진짜 뭘 아는지 알 수 없어"라면서.

며칠 전 문제집을 풀고 난 아이들에게 직접 채점까지 시켜보라는 

팁을 발견하고선 이런 생각에 더 확신이 들게 됐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문제집의 오답, 별로 심각하진 않다. 

문제는 스케일이 내 인생 단위로 몰려올 때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지만 어디 나가서

아이들을 잘 키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첫 유치원 상담 때나, 첫 학교 상담 때나 

상담이 끝나고 돌아오면 늘 허탈하다. 

아이들이 예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기보단 

부정적인 얘기들이 대세를 이뤄서다. 

미국에서 지낸 1년간 아이들 별로 상담을 2번씩(아니 수시로 했는데)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늘 선생님들은 미국 특유의 오버액션으로

"Thomas , Jake, Rachael is a super brilliant(charismatic) boy(girl)."

로 시작했다. 

진심일지 모르지만, 뜨내기로 있다 가는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어쨌든 처음부터 안심을 시켜주는 말투였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믿고 싶다.

내 아이여서가 아니라, 누구든 아이들은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고 똑똑하며 매력 넘치니깐. 


그런데 한국의 상담은 그렇지 않다.

어렵게 상담시간을 정해하는 마당에

칭찬일색으로만 끝낼 수 없어 실질적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의도가 많겠지만

보통 부정적 평가가 많다. 


그래서 상담을 다녀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어제 오답노트를 받아 들고 당황하고 있었다. 

어제 상담의 핵심은 아이가 외로워 보인다는 거였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엄마는 다 큰 애 취급하고 책임감을 발휘하라 하는데

동생들에게는 치이고, 

마음 둘 곳이 없다.

돌봄 교실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하교 후 같이 노는 재미를 즐기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는 돌봄 교실에서 돌아와서 동생들 데려오고 밥 챙겨주면

밥 빨리 먹어라. 숙제했니, 수영 가라는 말만 반복한다. 

동생들은 맨날 내가 만들어놓은 케이봇과 건담 로봇을 다 부숴놓는다. 

요괴메달도 좀 더 많이 친구들과 바꿨으면 좋겠건만

아빠는 쓸데없는 일본 만화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난 기껏해야 초등학교 2학년이다.


며칠 전 '병든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내면을 어떻게 파괴했는가.'의 

저자 김태형 소장의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이중의 유기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고, 

커서는 사회에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는 거다. 

이 공포가 젊은 세대 상처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더 사랑하고 따뜻한 말을 나눠야 할 때에

부모가 바쁘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물질적으로만 편하게 해준다. 


아이에게 오답노트를 쓰라고 했지만

막상 써야 할 것은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이에게 매일 던지는 말들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스킨십을 나누는 게

아이에게 큰 안정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엄마를 겪어내야 하는 것도 네 숙명이야

그래도 넌 잘하고 있잖아. 넌 잘 해낼 거야. 믿는다. 우리 아들.

이기적으로만 외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메타인지'라는 개념이 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자유로운 방관자로 놓고 성찰하는 것이다. 

think about what you think

이것을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알고 모르는 것을 안다. "


논어 위정편 2-17

子曰 由아 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니라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지위지   시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우등생은 오답노트를 쓰면서 자기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결정한다. 

오답노트를 적극적으로 써나가는 과정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통로다.

오답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 상황을 껴안고 알아보겠다는 기꺼움.

그게 그를 우등생으로 만든다. 

누구나 인생에서 우등생으로 살고 싶지 않을까.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 좋아 우등생이지, 누구와 우열을 가릴까.

우등이란 결국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나의 브런치는 인생의 오답노트로 채워졌음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윤동주처럼 손으로 발로 매일 거울을 닦으면서

오늘따라 윤동주의 참회록이 참 그립다.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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