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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Jul 13. 2023

홀로여도.

부드럽되 단단하게. 안온하되 의연하게.

명일동 어느 육교였다.

대차게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와 두벅두벅 걷다 육교 중간 지점 즈음에 멈췄다.

갑작스레 혼미했고 혼란했고 당황하여 등과 얼굴에 진땀이 일었다.

아래로는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지금 이곳, 열살의 나는 지극히 혼자였다.

엄마와 늘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분명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면에 보이는, 양쪽으로 촥 펼쳐진 왼-오 2개의 내림계단. 나는 이 둘 중에 어디로 내려가야 하는가.  

고개를 훽훽 돌려가며 앞뒤를 살펴봐도 전혀 방향을 알 수 없는 그 때의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높은 육교의 한가운데. 혼자인 지금. 갈 길을 알 길 없어 아득하고 막막한.

공포와 설움이 한없이 치달아 괄괄 울어버리는 것 외에 달리 수가 없었다.



청파동 후미진 골목길이었다.

갓 전학을 와, 학교가는 길을 암기해야했다.

집을 나서서 직진, 조금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긴 오르막길, 길의 끝부분에서 왼쪽으로 턴, 그리고 죄금만 더 걸면 학교였다.

5분 남짓의 심플한 골목은 아둔한 길감각을 가진 열둘의 나에게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다.

가장 큰 난관은 길을 걷다가 방향을 틀어야 하는 구간들이었다.

어느만큼 걷다가 어디로 꺾어 들어가야할지 난감했다.


가만 살펴보니 꺾어지는 구간 얼마 못되어 방지턱이 있었다.

방지턱을 지나 몇걸음 종종 걸면 내가 방향을 틀어야 하는 지점이 나오는 식이었다.

노란색/흰색으로 이루어진 방지턱은 나만의 커다란 시크릿 사인이자 안정감이었다.

"아침, 집에서 나와 조금 직진, 방지턱, 몇걸음, 오른쪽으로 턴, 오르막길, 꽤 긴 걸음, 방지턱, 왼쪽으로 턴, 직진. 학교 정문 도착."


방지턱 안내로 여러번의 등하교를 성공했더니 마침내 학교가는 길이 어렵지 않아졌다.

하교길은 늘, 집에 도착하기 직전 눈앞 방지턱을 확인 후 안도하며 들어가는 식이었다.



유럽 어느 도시 변두리 넓은 벌판이었다.

초등생 몇명의 선생이자 안내자 역할로 유럽비전트립 중이었다.

온라인 맵의 개념을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때. 그야말로 지도 한장과 사투를 벌였다.

내 옆과 밑에는 나만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고 스물둘 나는 넓은 녹색 벌판에서 길을 잃었다.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는 당혹감과 동시에, 나의 당혹을 감추어야하는 더 큰 당혹감이 몰려왔다.   

아이들이 혼란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내 두렴을 숨기며 덤덤하게 지도를 노려 보았다.

충분히 실현 가능하고 공포로운 시나리오의 전개는 뇌속에서 계속 진행되었으나 나의 온몸, 특히 입술은 연신 "괜찮아 얘들아"를 반복했다.



나에게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아득한 막막함, 검검한 두려움, 갑자기 보호자가 없어져 혼자가 되어버리는 그 섬득한 당혹감.

서른아홉 지금에도 훅, 그 때의 그 느낌과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이 때로 찾아온다.

길을 잃어버렸던 그 때의 아득함은 독하고도 진하게 남아

기억을 잠시 오픈하면 나는 그 곳으로 생생하게 옮겨진다.

육교 정중앙 한가운데에서,

유럽의 넓은 벌판 중앙에서,

혼자 섬득하며 당혹했고 두려웠다.


나는 이제 보호자 없이도 충분히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아니, 나는 더욱이 내 자녀의 보호자인데.

나는 아직도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걸까.

나는 왜 계속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하는 걸까.



그 두렴의 끝은

.

.

.


"내가 혼자 남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건..

나의 엄마, 나의 아빠, 나의 남편, 나의 아이.. 의 죽음이란 것.

이들이 없이도 내가 의연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난 못해. 못할것만 같다.

죽음을 떠올릴만한 어떠한 것(홍천의 몸에 혹이 발견된다든가)이 내앞에 다가올때는

전혀 반갑지 않은 까마득한 그 두렴이 쿵, 하고 찾아온다.


나의 죽음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욱 두려워하는것은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내게 자리하기 때문.


길을 잃어버렸을때의 경험에 대한 글에서 삶의 근원적 공포까지 발견하였으니 감사하다만은

이 깊은 내면을 내밀히 다루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설 수 있도록 습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 또한 치워지지 않는다.


더 단단해지고 싶다.

누군가를 굵게 의지하지 않고서도 안온에 거하며

홀로인 그 순간에도 감정의 고저가 크게 요동하지 않는 그런 사람.

홀로가 아닌 지금, 아무런 예고가 없는 지금에서부터  홀로서기를 준비하면 조금 더 의연해지려나.


부드럽되 단단하고

안온하되 의연한

꼭 그러한 나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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