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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Aug 31. 2023

졸업 소회.

'2019-2023 숙명여자대학교 음악치료대학원 생활을 마치며.

2019년 어느날 밤이었다. 5년전.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첫아이 다섯살, 작은아이 세살이었다. 고작 고 나이였다.


20대 때 NGO단체에서 일하면서 내 마음엔 전문성에 대한 니즈가 늘 가득했고, 결혼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면서도(다시 말해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분야로 전문성을 가져가얄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누군가를 도우려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 나만의 전문분야 없이는 도움의 깊이가 얕을수밖에 없다는 것이 20대 중후반 내내 일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2019년 밤. 그토록 오랜시간을 헤맨 생각 조각들이 하나둘 꿰어지더니 한 단어로 모아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단어는 [음악치료]였다.


"음악" (내가 잘 할수 있고, 좋아하는 것)

그리고

"치료" (내가 살아내고 싶은 삶의 방향)


다음날부터 서치에 들어갔다. 여정이 시작된 것. 이러저러하야 정신차리고보니 숙명여자대학교 음악치료대학원에 입학해 있었다. 첫날, "음악대학"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물이 흐른것은 내가 종종 음악대학 친구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야심차게, 벅차게, 감격적으로 시작한 학업이나 당연한 난관들이 많았고, 결국 2년반 코스를 5년으로 마쳤다.


나의 어려움을 세 꼭지로 나누어본다면 "육아와 병행하는 학업", "인턴생활", "논문작성".

아이고 할말 많다. 아이고 많아. 이 지난한 스토리들을 다 어떻게 풀어낸담.

졸업 하루 전날, 5년간의 과정들을 주욱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힘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분출하려했는데, 왠걸 고마운 사람들만 생각이 났다. 그랬다. 정말 고마웠다.


_나의 대학원 생활을 적극 지지해준 홍천, 내 남편. 남편이 열심히 성실히 벌어온 돈을 아내는 차곡이 모아다 학업에 부었다. 어디 돈 뿐인가, 엄마가 바쁠땐 애들 봐줘야지, 아내가 힘들땐 토닥여줘야지, 때론 실습 클라이언트도 되었다가 때론 논문 통계 선생님도 되었다가.... 이모든 영광 넓을홍 하늘천 우리 홍천에게.  


_인턴생활 중엔 김포에서 용산까지, 막히는 출근시간대를 뚫고 막히는 퇴근시간대를 또 뚫어야 했다. 아침 7시반에 집을 나섰고, 저녁 8시쯤 집에 들어왔다. 나는 아이들을 봐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하필 엄마는 우리집에서 차로 5분거리였으니 픽업과 케어는 할머니 몫이 될밖에. 아빠엄마 없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_논문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에 시원해하고 있을 때였다. 아인이가 말했다. "엄마, 내가 논문 다 쓸때까지 기다려줬으니깐 이제 나랑 놀아줘야돼." 예쁜 말투로 말했으나 서운함도 못내 들어있었다.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건, 딸의 입장에서 단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내가 힘든것만 생각했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5년이 걸렸으니 너는 5년이나 기다려주었구나..


_인턴생활 1년은 총체적 어려움 판이었으나 학기를 마무리하면서는 말그대로 난관 뒤에 난관 뒤에 또 난관으로 죽 이어져 앞뒤양옆으로 헤매이던 중이었다. 코로나 기간이라 음악회는 하지 못하고 아이들 각자의 노래장면을 촬영하여 감동감동하고 아름아름다운 영상을 제작해야했는데,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을 그때 후배 헬퍼 한분이 말씀하셨다. "선생님, 제가 한번 만들어볼까요?" 그순간 그녀는 하늘에서 막 도착한 천사였다. 그리고 꼭 그렇게 감동적인 영상이 툭 하고 나왔다.


_'논문'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존재는 논문의 주제이자 클라이언트였던 난민분들이었다. (물론 설문지를 받아야하는, 즉 얼굴을 모르는 분들은 아닐때도 있었고.^^) 나와 음악치료세션을 함께 한 난민들은 진심으로 세션시간과 치료사를 귀하게 여기며 존중했다. 그들이 내게 표현한 사랑과 위로는 논문을 진행할 수 있는 힘이었고, 난 그들과 때마다 종종 연락하는"진짜 친구"가 되었다.


_어느날 밤 음악치료가 pop up 된 자라면, 그 한 분야를 찾기 위해 오랜기간 절실히 헤맸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학업을 대하는 자세가 제법 진지했을 터.  어떤 과제도 수업도 임상도 허투루 임할 수  없었다. 난 진심이었고 열심을 다했다. 학생의 자세는 교수 눈에 훤할 수밖에.  "원지씨, 내가 지켜보고 있는 학생이에요." "에이, 잘하면서." 등의 툭툭 내뱉은 말들과 그들의 미소, 표정들에 나는 외면적인 힘을 낼 수 있는 내면적인 힘이 솟는걸 느꼈다.  


_이게 끝나면 숨을 돌릴 커다란 여유없이 저게 주어지고 저게 끝날때까진 또 푸석푸석한. 그런 5년 중에 4년을 김포에서 보냈고, 옆아파트 902호 **언니는 숨쉴만한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어떤 오늘의집보다 훌륭한 그녀의집 주인님은 내게 늘 따뜻한 커피를 내려주고 복작다양시끌한 어려움의 주제들을 지혜론 언어로 상의해주었다. 음악과 식물, 사랑스런 향기가 가득한 902호는 일박도 누워본적 없으나 고향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_참 많이도 앵앵거렸다. 안팎으로 떠들어댔다. 아니, 어쩜 이 사람은 이럴수가 있는거야?/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건가?/ 나 너무 힘들어./ 오늘은 정말로 생을 포기하고픈 충동을 느꼈다니깐./ 부정적 앵앵거림을 다 들어내주는것이 피로한 일임을 매우 잘 아는 자로서, 이러한 나의 소리침을 위로로 담아낸 써니태는 대단하고 훌륭하며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턱 쏴야지.


_오랜만에 공부 컨텐츠를 뇌에 넣는 일은 쉽지 않았다. 1학기 첫 시험, 나는 잠을 줄여가면서 뭔가를 내 뇌로 구겨넣었다. 시험 날 새벽, 한두시간 자고 일어나 역시 무언가를 억지 삽입후, 멍하고 몽한 기분으로 샤워하며 머리를 헹궈내는데 무서울 정도로 후두두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마주했다. 한달 후, 성적우수장학금을 준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 장소와 감정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하늘의 위로로 여겨졌기 때문. 가족(특히 시댁)에게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었고, 훅훅 빠져나간 머리카락에게도 덜 미안해졌다.  



곤경에 처할때마다, 스러지려 할때마다 누군가가 손을 내주었고 길을 터주어 다시 끌어올려주었다. 내 5년은 정말이지 이 패턴의 반복이었다. 늘 가지고 살아가는 생각이지만, 난 나란 사람의 어떠함보다 더 크고 분에 넘치는 사랑과 도움을 받는다. 나는 요만큼인데 이만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 다른 말로 표현키 어려운 신의 영역이겠지.


 도움을 주러 갔다가 받고 돌아온적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방향을 정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더 큰 무언가를 받을것을 이미 알고 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세계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아직도 세상이 끝나지 않은듯 싶다.


졸업.

꺄. 그래. 나 졸업했드아아아.! 맘껏 기뻐한다.

누구든 어디든 무어든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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