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독립해서 따로 살겠지 뭐...
기본적으로 나는 뭐가 많으면 불편한 사람이다.
맥시멀리스트인 친정엄마는 내가 자취할 때부터 항상 뭘 바리바리 갖고 와서 내 방과 냉장고를 꽉꽉 채워주셨다.
심지어 자취방에 공간이 비어있으면 기필코 가구를 사다가 채워주고 가셔야 속이 풀리시는 분이었다.
나는 그 꽉 찬 공간과 냉장고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지금도 냉장고가 꽉 차있으면 음식을 상하기 전에 빨리 먹어야 할 것 같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저기 있을 거라고 생각되어 괜히 찝찝하다.
"가져가면 다 먹게 돼있어."
친정엄마는 내가 결혼해서 내 가정을 꾸린 지금도 매번 친정방문 때마다 아이스박스를 3개씩 꽉꽉 채워서 보내주신다.
감사하긴 하지만, 난 그 냉장고를 비울 때까지 내가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은 못 먹고 냉장고 파먹기만 하게 된다.
난 어릴 때부터 미니멀리즘을 꿈꾸는 취향이었지만, 친정 엄마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셨고, 나의 취향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미니멀리즘은 좋은 것, 맥시멀리스트는 안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으로 하게 되었다.
요즘 내가 시간 날 때 즐겨보는 콘텐츠는 미니멀리즘과 살림에 관한 것들이다.
처음에는 둘 다 비슷한 건 줄 알고 구분 없이 시청했는데, (대부분 살림하는 이야기)
보면 볼수록 미니멀리즘과 살림을 잘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얘기라는 걸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살림을 잘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물건이 많은 맥시멀리스트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집에 들어갔을 때, 참 예쁘고 따뜻하게 살림 잘한다고 느꼈던 지인집들도 정말 물건이 많았었다.
다양한 조리도구, 때에 맞춘 식기류, 각종 패브릭, 아이의 원목장난감들..
그렇게 물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의 삶이 미니멀해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릇이 많아도, 한 가지 취향으로 통일감이 있다.
패브릭이 많아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인테리어 센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패브릭을 관리할 수 있는 성실함도...)
최근에 옷장정리를 하다 보니 내 옷의 80프로, 아이 옷의 90프로는 친정 엄마가 사준 것임을 알게 됐다.
난 참 취향도 없던 사람이었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 배경에는 쇼핑 자체를 좋아하고,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딸의 옷을 사들고 오시던 친정 엄마가 있었다.
(뭐 딱히 취향이 없었으니, 사주신 옷을 군말 없이 입곤 했다.
그런데 남동생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니, 결국 자기 옷은 자기가 직접 사 입는 사람이 되더라..)
그나마 기부할만한 옷을 옷캔에 3박스 보내고 나니, 내 취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은 옷을 구매할 계획이 없지만,
이 옷들을 열심히 입고 나서 또 옷을 구매할 때는 옷 한 벌 한벌을 신중하게 내 취향에 맞춰 구매할 것 같다.
써니는 나처럼 취향 없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진 않았다.
이것이 아이에게 미니멀리즘을 강요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물건을 원하고, 소유하고, 실컷 느껴본 자만이 결국에는 자기 취향과 미적센스를 가지게 된다.
일도 인간관계도 집안일도 미어터지고 부딪치고 얻어맞아봐야,
지금 내가 가지는 단순함의 여백이 감사하고, 진짜 내 것들만 골라서 즐길 수 있게 된다.
아이에게는 다양한 것들을 접할 권리가 있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양을 접하고, 다양한 물건들을 실컷 만지고 감상하고 감탄하고 놀아야 한다.
그 과정이 아이에게는 뇌계발이고 정서발달이다.
내 아이는 짧은 순간도 자라고 있다.
너무나 귀한 이 아이의 순간순간을 엄마가 미니멀리스트를 한다고,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인 박혜란 님은, 좀 정리 안된 지저분한 집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주장까지 하셨다. (그의 자녀들이 모두 창의적인 인재로 자란 거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도?)
초등학교 3학년,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비비인형을 한꺼번에 다 버린다고 했을 때,
엄마가 진짜 다 버릴 거냐고 하나만 남겨놓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실컷 욕심냈었고, 소유했었고 실컷 즐겼기에 버리는 게 미련이 없었다.
내가 그랬듯이 아직 어린 내 아기는 아직 한동안 물건을 소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인형집이 없어졌다고 서글프게 우는 아이를 안고(안 가지고 놀길래 내가 버렸다),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엄마가 다음에 버릴 때는 꼭 써니한테 물어보고 버릴게."
아이책과 물건은 당분간 늘어나겠지?
그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볼 땐 온갖 쓰레기 같은 것 같은 작품들도 자꾸 늘어나서 머리가 아프지만, 아이는 본인의 작품에 너무 흡족해한다.
그래서 그냥 거실복도에 써니 전용 갤러리를 만들어줬다.
아이는 아주 만족해하며, 손님들이 올 때마다 방구석 도슨트를 자처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도 시들해지지만, 그렇다고 떼버렸다가는 바로 눈치채고 난리가 난다.)
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채색이 되고 자기 방에서 안 나온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이 너저분을 참으면 되겠지?
그리고 나중에 정말 나중에 아이가 독립해서 나가면, 남편이랑 정말 작은 집을 가서 살아보고 싶다.
각자 패드 하나와 기내용 여행가방 하나씩만 들고 여행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것이다.
남편 방의 빈 박스들도 그때까진 치워져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런데 솔직히 힘들 것 같다..
그냥 남편은 수많은 컴퓨터, 게임기, 박스와 같이 집에서 놀고 나만 떠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