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배출의 선의가 '선별 인프라'로 번역되는 순간
종이팩은 ‘종이’가 아니다. 겉은 종이처럼 보이지만, 내용물을 담기 위해 여러 층이 결합된 포장재다. 젖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그 구조는, 재활용 단계에서는 따로 모아야만 다시 쓸 수 있는 재료로 작동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종이팩은 분리배출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용 수거로 모인 뒤, 선별장·물류·재생원료 시장까지 연결되지 않으면 모았는데도 남는 것이 된다. 여기서 정책의 언어는 한 단계 더 내려간다.
이 노력을, 시스템이 받아낼 수 있는가.
자료에 따르면 종이팩 재활용률은 19% 수준에 머물러 왔다. 비교하면 금속캔·PET병·유리병은 훨씬 높은 회수·재활용 체계를 갖고 있다. 종이팩은 잘 버려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구간이 길었다. 전용 수거함이 부족했고, 결국 일반 종이와 섞이거나 오염되면서 자원성이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정부가 올해 상반기, 전국 모든 아파트에 종이팩 전용 수거함 설치를 의무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분명한 신호다. 대체재 논쟁이 아니라, 아예 따로 모으는 체계로 방향을 잡겠다는 뜻이다. 집 앞에서 종이팩을 분리배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수거함 설치가 끝은 아니다. 수거함은 ‘입구’이고, 재활용은 ‘통로’다. 통로가 좁으면 입구만 넓어져도 정체가 생긴다. 현재 전국에 종이팩을 안정적으로 선별·처리할 수 있는 광학선별기 인프라가 4대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씻고, 펼치고, 말린 종이팩은 어디로 가는가.
모아진 뒤에도 다시 섞이진 않는가.
선별과 물류의 비용은 누가 감당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디테일이다. 편리함을 늘리는 정책은 언제나 운영 설계가 함께 와야 한다. 종이팩 전용 수거함이 실효성을 갖추려면, 최소한 다음이 동시에 따라가야 한다.
수거 주기와 관리 기준(오염·혼입을 줄이는 운영)
수거–집하–운송의 안정적인 물류(아파트에서 선별장까지의 경로)
선별장 설비 확충(종이팩을 골라낼 수 있는 장비와 라인)
재생원료의 판로(되돌아갈 자리가 있어야 순환이 된다)
종이팩 재활용을 둘러싼 논쟁은 흔히 ‘시민의 의식’으로 축소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용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시장에서 팔릴 때의 가격표에는 선별·물류·처리 비용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 그 비용이 보이지 않으면, 실천은 개인의 성실에만 기대게 된다. 결국 분리배출의 부담이 ‘생활의 노동’으로 남는다.
GREEN LOG DAILY는 이 변화를 '종이팩을 더 열심히 버리자'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구호로 가면, 문제는 다시 개인의 도덕으로 축소된다. 기록해야 하는 것은 정책 신호의 품질이다. 수거함 의무화가 실제로 선별 인프라 확충과 물류 개선으로 이어지는지, 그 문장이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현장에 내려오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먼저 비용을 치르고 누가 가장 늦게 보호받는지까지를 따라간다. 종이팩은 분리배출함에 들어가는 순간, 자원이 아니라 시스템의 시험지가 된다. 편리함을 포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리배출의 선의가 헛되지 않도록, 그 다음을 책임질 구조가 있는지부터 정확히 보자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