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기업 13년 이상, 하나의 스타트업 3년 이상 일해보고 나서야 알게 된 차이점이 있다.
스타트업도 평균 근속연수가 11개월이라고 어디서 들었었는데 출처는 불명확하다. 내가 다니던 스타트업도 그 기간을 넘기지 못한 것으로 봐서는,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러므로 나도 나름 한 스타트업에 오래 몸 담았던 것이다.
우선 대기업이 일하는 방식을 다 배우려면 10년 이상은 일해봐야 되는 듯하다. 솔직하게는 15년 이상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대기업은 조직과 인프라가 완비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와서 일을 하건, 누가 퇴사를 하건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신입사원들을 굉장히 높은 기준으로 채용한다. 이것은 완비된 인프라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말한 이유는 과장 이후부터 '일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잘못 배우게 되면 소위 말하는 꼰대나 멍청이가 된다. '꼰대'는 일을 시키기만 하는 방식으로 배운 사람이고, '멍청이'는 자기가 직접 하는 방식으로 배운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는 정의한다.
어떤 일을 누군가에게 지시하면서, 그 업무지시가 합리적으로 보이게 하는 적정 수준을 배우는 것이 과장 이후이다. 그리고 그 과장이 되는 시점이 5년 차 전후이고, 그 일을 5년 정도는 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장부터는 일하는 법이 아니라 일을 시키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내가 차장으로 퇴사할 당시에는 솔직하게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조직이 돌아갈 정도였다. 그러면서 골치 아프거나 민감한 문제들이 생기면 해결하는 일을 맡으면 됐었다. 팀장이 되면, 팀장은 '의사 결정'만 해주면 충분한 상태에 도달한다. 돌이켜 보면, 의사 결정을 해주지 않는 팀장이 가장 나쁜 상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부분은 별도로 한 번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과장이 되고 여러 팀장을 거치면서 업무지시나 조직관리의 애매모호한 절충점을 배울 수 있다. 운이 없게도 계속적으로 꼰대나 멍청이인 팀장을 거치게 되면, 망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처럼 통제 불가능한 불운아인 것이겠다. 나는 다행히도 다양한 부류의 팀장을 거쳤다.
대기업에서 5년 차까지(사원, 대리)는 실무 일을 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때가 대기업에서 제일 재밌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이 일들도 판에 박힌 일들 위주이고, 그 일을 숙달하는 것이 중점이다. 약간의 변형과 융통성을 발휘하면서 약간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서 해볼 수 있는 만큼의 놀라운 성과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굉장히 진취적인 사람이 대기업을 들어와서, 꼰대인 팀장 밑에서 판에 박힌 일을 하다 보면, 불합리하다고 느끼거나, 일이 재미없다고 느껴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선배님들이 '너보다 저 팀장님이 먼저 집에 가신다'라는 말로 버티라고 한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조금 더 배우는 점이 있지만, 이에 맞지 않는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와 반대로 스타트업을 보면, IPO로 상장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13년이라고 하는데, 10년 이상 일해보기는 요원한 조직이다. 반대로 1년 이상만 일해도 굉장히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되면, 많은 일을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취적인 젊은 직원들이 열정 페이로 일할만큼 재미를 느끼기도 쉽다. 그런데 나는 '열정 페이'라는 말이 사실 정당한 보수를 받고 잊지 못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도 따로 떼어서 정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더불어, 오랜 회사 경험을 가진 조직 구성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직을 리드해본 경험이 많은 직원이 별로 없다. 여기서부터 대기업과의 큰 차이가 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팀장이 되는데, 이 사람도 본인의 일을 하면서 조직 운영까지 해야 된다. 그런데, 조직 운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좌충우돌 조직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리더'에 대한 책들을 읽어서 그 부족함을 메우려고 한다. 대기업의 과장이 5년 이상의 눈칫밥으로 애매모호한 그 절충선을 배우게 되는데, 그 애매모호한 것을 글로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스타트업은 조직 구성원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팀장도 하면서 실무자도 해야 된다. 조직 관리나 운영에 집중할 시간도 없기 때문에, 리더로서 살아남기가 더 힘들고, 위로 아래로 욕도 많이 먹게 된다.
스타트업에 있으면서, 열정적인 많은 직원들을 보면서, 여기가 첫 직장인 사람들이 약간은 안타까웠다. 대기업처럼 모든 것이 완비된 조직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스타트업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체계가 없다는 말을 상당히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부분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초기 스타트업이 인프라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데, 업무량이 늘어나면서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는 한계점을 금세 넘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바쁘다 보니, 업무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면서 일할 수도 없다. 거기에다가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매뉴얼을 만들더라도 수동으로 일하는 방식을 기록해둬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시스템 구축 비용들을 안 쓰기 때문에, 당장의 비용은 절감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분도 별도로 글을 써볼 수 있겠다. (오늘 별도로 글 써보겠다는 것만 3개가 된다니;;;;)
일하는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다.)
수동으로(자동화되지 않은) 일하는 방법밖에 배울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성장에도 한계점이 있다. 단순 반복 작업들은 시스템이 수행하게 변경하면, 좀 더 창의적이고 자기 발전적인 일들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단순 반복 작업만 하면 하루가 다 가게 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몇 팀장급 직원들과도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기업에서 대리~과장 3년 정도만 일해보고 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기업에서 제대로 배우려면 10년이 걸리기에 3년으로는 부족하겠지만, 대기업을 다녀본 사람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것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우수한 친구들인데, 제대로 배우지 못한 느낌이랄까.
경험과 조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 한계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스타트업의 훌륭한 직원들이 대기업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 번씩은 배워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 좋을 것 같다. 이 부분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에는 어려워 보이기는 한다.
대기업, 스타트업 둘 중에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두 조직의 극명한 차이에서 장단점이 분명히 있지만, 스타트업이 언제까지나 스타트업일 수는 없기 때문에, 대기업에서 배울만한 것들은 시점에 맞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최근에 만난 대학생이 물었다. '왜 스타트업에 가셨나요?'
대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고민인 것이다. 대기업으로 가야 할지, 스타트업으로 가야 할지 말이다. 어느 길로 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를 얘기해주었고, 각자의 성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고 답변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대기업은 초년생 때 외에는 들어가기가 어렵다 보니, 대기업을 먼저 경험해보고 스타트업을 경험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대기업, 스타트업 각 분야에서 일하면서 내 인생 로드맵에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 지금 하는 업무를 토대로 나의 다음은 무엇 일지를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