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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Mar 17. 2022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삶과의 전쟁

제가요, 원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며칠 전에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학부모회 담당 선생님이셨죠. 이번에 모집하는 학부모회 임원에 지원할 의향이 있냐고 물으십니다. 제가 이번에 4년간의 학부모 운영위원 임기가 끝나서 따로 연락을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워낙 그동안 맡아서 하는 일이 많아서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께서 담당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하신 모양이었습니다.




 일단 전교 학부모회 임원은 그동안 학교에서 관례적으로 전교 어린이 회장단 부모께서 해오셨기 때문에 그분들이 하실 상황이 안 되신다고 하면 고민해보겠다고 완곡한 방식으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다시 받았을 때 회장단 어머니들께서 임원으로 활동이 가능하시다고 하여 다행스럽게도 제가 나서야 될 난감한 상황은 없게 되었죠.




 지금은 임기가 난 4년 동안 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을 해왔던 것도 다사다난함의 연속이었는데 학부모회까지 나서서 하기엔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투를 못써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원치 않았죠.

 

 그리고 요즘 브런치를 비롯해 글을 쓸 일이 많이 생긴 데다 학폭위까지 참여해야 하는 바람에 시간 빠듯해졌습니다. 학폭위는 무조건 오프라인 회의가 원칙이더라고요. 그렇기에 임원진이 정상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선생님의 회신고는 다행스럽다 생각되었죠.


 각 학교와 학년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번 학년에는 녹색 학부모회 임원, 학교운영위회 위원 모집이 다 미달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 그랬습니다.


 


 저는 주위에 계신 분들께는 하는 일들이 많아 나서기 엄청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런 이미지가 된 것은 꽤 오랜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우연한 기회에서부터였습니다.


 원래 저는 2014년부터 재작년까지 6년이 넘는 동안 회사에서 교대근무습니다. 맞벌이인 데다 양가 어른들이 온전히 도움을 주시기 어려운 여건이었고 조산이었던 둥이들이 잔병치레를 해서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시작한 교대근무로 인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비번이나 휴무일의 평일 낮시간 아이를 위해 사용하기 수월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부모 참여수업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제게 하셨습니다. 시간을 내서 아이들에게 30~40분 정도 재미난 놀이나 교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상반기 한 번, 하반기 한 번을 잘 끝내얼마 뒤 원장님께서 어린이집 운영위원을 해줄 수 있냐고 요청하시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이런 일을 는 것이 맞는지 난감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장님이 강력하게 추천하시는 데다 아이를 4개월째 되던 때부터 늦게까지 돌봐주던 어린이집의 은혜(저는 은혜라고 감히 표현합니다)를 생각하면 거절하기는 어려워서 승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때의 선택이 지금의 저를 만든 셈이었죠..)


 


 게 아니더라도 저는 이미 어린이집에서도 유명했습니다.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저 쌍둥이 아빠 뭐하는 사람이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약한 수준이었죠.

 좀 도가 지나친 경우에는 "아빠가 백수고 엄마가 돈 버느라 바빠서 아빠가 아이를 돌본다"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등원시키는 것부터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횟수들이 잦았기에 눈에 띌 수밖에 없긴 했죠. 그래서 오히려 운영위원을 하는 것에 대한 결심에 부담이 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엄마들이 계속 물어보셔서 그러는데 괜찮으시면 아버님 무슨 일을 하시는지 간단하게 알려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어보시기까지 했으니까요.  




 어린이집 운영위원 2년의 시기를 거쳐 아이가 초등학교를 간 뒤에도 제 참여는 계속되었습니다. 어린이집의 경험을 통해 초등학교에서도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겼거든요. 운영위원을 하면서 어린이집과 선생님이 겪는 고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초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는 일이 더 늘었습니다. 반에서는 반대표를 하고(이것 역시 제 자유의지가 아닌 학부모 총회 때 도저히 할 사람이 없다며 떠밀리듯 했습니다. 아빠가 저뿐이었기에...) 학부모회, 녹색 학부모회 활동 했습니다.

 기에다 운영위원을 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서 학교 활동에 참여해나갔습니다. 기존 운영위원들을 비롯해 신규 학부모위원이 대부분 엄마들(8명 중 6명, 한 분은 바쁘셔서 자주 못 뵙는 변호사 아버님)진입장벽은 꽤 높았습니다. 물론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금녀와 금남의 영역이 아직까지 존재하는데 이 세계도 그런 셈이었습니다.



 그 편견을 깨는데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었습니다. 거기다 제 활동을 보며 뒤에서 흉보는 분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1학년 아빠가 나댄다, 직업은 뭐냐, 자기 자식이나 잘 챙길 것이지,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길래 아빠가 저러고 있냐' 등등 다양한 내용이었습니다. 일부의 이야기라고는 위로해주시는 분들이 더 많았지만 그것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했던 꽤 큰 상처였죠.


 그렇게 힘든 시기도 있었고 마음고생을 했지만 조금씩 그 생채기에 무뎌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에 잘 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활동에 적응을 하게 되었고 여러 사안에 대해 학부모의 역할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도움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외부 학부모위원을 추천할 때도 먼저 연락 주시 일도 많았습니다(약력에 적지 못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이걸 제가 다 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될 때도 다 그때마다 저를 믿고 부탁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거절하지도 않았고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모두 하겠다고 하게 된 것이 이리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온라인 회의가 많아진 덕분에 다행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정들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약이 되었는지 저는 아빠치고는 학교와 관련된 상당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되니 아이와의 대화도 훨씬 원활해졌죠.

 대신 얼굴도 많이 팔리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5학년이 될 때까지 제가 종횡무진으로 학교 활동을 한 덕분에 재미난 일화도 있습니다.

 친분이 있는 엄마 한 분이 그랬다 합니다. '쌍둥이 아빠를 알고 있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닌데 쌍둥이 엄마를 아는 사이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라고 말이죠. 

 제 아내는 저와 달리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다크템플러나 러커처럼 눈에 안 띄고 잘 다니는 모양입니다. ㅎㅎ





 어떤 분들은 제게 직접 물어보십니다.

 정치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그러면 "제 목표 중 하나가 정년퇴직인데 삼대가 망할 수 있는 정치를 하라니 악담도 잘하십니다"라고 농담조로 화답하긴 합니다. 


 그런데 뒤에서 보는 눈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 않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와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웃을 수 있는 정치인이 될 자질이 조금도 없는데 말이죠.





두서없이 쓰다 보니 옛날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일필휘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몰아서 글을 썼네요. 안타깝게도 양은 많은데 반해서 정리가 제대로 안 된 느낌이 듭니다.


 속상한 대목을 떠올리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겠거니 생각하려고요. 그리고 그런 경험 덕에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을 비롯해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뜬금없는 추억 톺아보기는 여기서 이만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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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직업있어요  #정치절대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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