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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Feb 09. 2022

간사함과의 전쟁

오랜만에 맛 본 초등학교 정치의 쓴 맛

 얼마 전 둘째 아이가 학교의 전교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1명의 5학년 남자 부회장을 뽑는 데 8명의 후보자가 도전을 한 쉽지 않은 선거였죠.


 

 이 일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공고가 처음 나오고 아이에게 말을 해주고 출마 권유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단순히 창피하다는 이유에서였죠. 솔직히 부모 입장에서 아이에게 원치 않는 것을 시키는 것만큼 고역은 없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보상을 해주면서까지 아이를 출마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참고로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면 3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했습니다).


 아이는 이미 2학년과 4학년 때 반 회장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건 부모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이었죠.

 제가 그동안 학창 시절 선거를 나가서 실패했던 경험담을 비롯해 이번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장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가면서 아이를 설득시켰고 아이는 수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코로나19가 일단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예전의 방식과는 달리 학교에서는 다른 대면 선거운동을 허용하지 않고 학교 입구에 부착된 포스터와 동영상으로 녹화한 소견발표만으로 선거를 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죠.


 예전처럼 다른 반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알리기 위해 유세를 하거나 교문 앞에 서서 아이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기 위한 인사를 할 필요가 없으니 아이 입장에서는 부담이 훨씬 줄어든 셈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어린이를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와 관계된 여러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교 임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많이 알 수 있게 되었죠.

 의욕이 좀 모자란다 싶은 아이에게 부모님이 함께 읽어주시면 동기부여를 시키는 데 꽤 도움이 듯해요.



 아무튼 둘째 어렵게 출마 결심을 했고 출마 신청도 마쳤습니다. 하지만 난관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공약도 만들어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고 벽보용 포스터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해나가는 일주일 동안의 기간은 고3 수 수험생의 생활을 방불케 했습니다.

 벽보에 붙일 만한 사진도 딱히 없어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겸사겸사 사진도 하나 찍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진을 찍는데 머리도 좀 지저분하네요. 그래서 미용실도 갔습니다.

후보님과 애비, 애미의 피, 땀, 눈물이 담긴 선거용 포스터


 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연예인 시킬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후회를 남기느니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위안 삼았습니다. 게다가 1명을 뽑는 남자 부회장 선거에 8명이나 되는 후보가 나왔다고 하니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가 없기도 했죠.



 공약을 만들고 발표 영상 녹화 연습을 하는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초등학생용 공약은 정말 제한적이었습니다. 아이가 만든 공약이 현실성이 없으면 선거관리를 하는 선생님께서 다시 만들라고 하므로 미리 사전 검토도 받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BTS를 이용해서 공약을 만들고 일부 멘트는 유튜브로 배운 수어로도 말할 수 있게 연습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수어를 배울 수 있게 좋은 방송 해주신 유튜손사탕님께 감사인사 전합니다.)

출처 : 손사탕 유튜브


결국 D-Day는 다가왔습니다. 

이틀에 걸쳐 투표를 했고 둘째 날 오후에 투표 결과를 확인하고 온 이에게 전화가 왔죠. 제가 나간 선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던지요. 아이에게 돌아온 대답은 낙선이었습니다. 8명 중에서 2등을 차지했다고 하더군요. 

 

 750여 명의 학생들이 투표를 했고 15표 정도 차이였다고 합니다. 기특하다고 그리고 잘했다고 톤을 한껏 높여서 칭찬해주었고 혹시 서운하거나 속상하진 않냐고 위로를 해주었죠.


 

 그런데 아이와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굉장히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많이 난 것이죠.


 제가 화가 난 대상은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떨어져도 괜찮다고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해줘 놓고 막상 2위로 떨어졌다고 하니 너무 아쉬워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정작 덤덤하게 차분하게 실패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어른은 아니었던 거죠.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정말 간사하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참고로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 선거를 나갔다가 4명 중 3위로 고배를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렇게 아쉬웠었나 기억을 새삼스레 더듬어보았죠.


 과연 진짜 이 선거를 아이를 위해서 도전하라고 권한 것인지에 대해 반성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기왕이면 당선되면 좋은 거지 면서 은근히 기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부모니까 아이를 더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어야 된다는 마음잡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퍼뜩 차렸습니다.



 그날 저녁에 피자와 케이크로 가족들과 소소한 축하파티를 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선전했고 2위를 차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들 즐겁게 웃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둘째의 세 번째 선거는 당선을 제외하고 많은 것을 얻고 끝이 났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부분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싶어 했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부모님들이 반대해서 못한 경우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학교 임원이 되면 부모가 덩달아서 학교에서 학부모의 참여가 필요한 회의를 비롯한 여러 분야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입니다. 간혹 아이가 어차피 안 될 테니 상처받을까 봐인 경우도 있었고 어차피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뭐하러 시키냐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닌 이상 어떤 이유로도 아이의 도전을 막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아이도 위대한 성공을 위한 실패를 경험했지만 어른마저도 이 위대한 실패로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아이가 이 실패를 새로운 도전을 위한 연료로 쓸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박막례 할머니께서 하신 명언이 생각나는 저녁입니다.

출처 : 박막례할머니 유튜브



 결론

1. 아이가 전교회장에 도전하게 하고 싶다면 <어린이를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강력 추천

2. 아이가 도전하고 싶어 하면 칭찬과 격려는 못할 망정 말리지는 말았으면.

3. 떨어지더라도 의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부모도 알게 모르게 현타가 오니까 아이에게 절대 티를 내지 않아야 해요.

4. 부모 욕심 때문에 아이의 등을 강제로 떠밀지는 않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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