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자녀교육에 진심인 쌍둥이아빠 양원주입니다.
저는 세상 똑똑한 척을 하면서도 가끔씩 아주 시원하게 헛발질을 하고는 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제가 아직 많이 배워야 하는 미욱한 사람임을 느끼고는 하죠. 가끔 적잖은 대가도 치릅니다.
어제도 꽤 아까운 시간을 길에 허비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어제는 서울지하철공사의 파업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명분, 논리에 대해서는 굳이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 이야기까지 언급을 해버리면 이 글은 몇 부작짜리 시리즈가 되어야 하니까요.
저는 죽겠다, 미치겠다부터 지옥, 중독 같은 극단적인 표현 사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저녁 오랜만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죠.
맞습니다. 이번 글은 제 스펙터클한 퇴근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낮에 근무를 할 때는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을 합니다. 양재역에서 강변역으로 전철로만 가는 코스죠. 어제의 퇴근길은 그야말로 잘못된 선택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사무실에서 나올 때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우산을 두고 나오게 된 상황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 타이밍도 놓쳐서 거기에만 5분을 넘게 허비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 정도의 시간은 아주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걸어서 양재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촘촘하게 차곡차곡 테트리스처럼 쌓여있지 않겠어요?
테트리스는 길쭉한 막대기가 있으면 사라지지만 플랫폼에 넘실거리는 사람들은 전철이 들어와야만 사라집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차곡차곡 담아서 실어가야 할 열차가 평소보다 훨씬 늦게 들어오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행히 10분만(?)에 들어온 열차 덕분에 첫 번째 구간인 3호선은 한 번에 탈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늘 저녁은 뭘로 먹을까"라는 건전하고 평화로운 고민을 하고 있었죠. 교대역에 내려서 2호선 플랫폼에 도착한 순간 그 고민은 우선순위에서 빠르게 뒤로 밀려났습니다.
교대역 2호선 플랫폼은 사람들이 양재역 때보다 훨씬 많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열차의 위치를 알려주는 전광판에는 단 한 대의 지하철도 보이지 않았죠.
설마설마하면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줄을 서서 님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15분 정도 뒤에 기다렸던 그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일 앞 쪽에 서서 천천히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니 안에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열차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질 않는군요. 조금씩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 누군가가 "못 타실 것 같은데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 뒤에 계시던 분들은 물러나며 분루를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때 방송이 나옵니다. 버스를 이용하라고 말이죠. 다다음 역인 역삼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에게도 연락을 합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말하죠. "내가 따릉이 빌려서 그쪽으로 갈 테니까 그냥 우리 따릉이를 타고 집에 가자!" 그 말과 함께 역삼역 근처에서도 따릉이를 빌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습니다.
제 기가 막힌 제안에 대한 아내의 반응은 일단 굉장히 미적지근했죠.
"일단 지하철 오는 거 보고"
아마 속으로는 이런 마음이었겠죠.
'내가? 자전거를? 왜? 그걸 타고 집까지 갈 수는 있어?'
제가 타지 못한 열차가 아내에게 가고 있는데 설마 무슨 재주가 있어서 탈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아까 그 열차 그대로 역삼역에 도착할 테니 용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탈 수 없을 거라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 길로 따릉이를 빌려 부지런히 2호선 라인을 따라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뒤 아내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연히 타지 못했다는 연락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제가 놓쳤던 그 열차를 타고 가고 있다는 연락이었습니다(아내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엄청 운이 좋게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씁쓸함을 남기고 저 혼자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교대역 - 강남역 - 역삼역 - 선릉역 - 삼성역을 거쳐 종합운동장까지 딱 1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 6시를 맞아 퇴근길의 강남 한복판은 자동차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전동킥보드를 타고 가는 사람까지 끌고 갈 정도겠어요. 차도는 물론 인도까지 정말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비가 온 뒤라 길도 젖어있어서 더 이동이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언덕 넘고 횡단보도 건너고 다리까지 건너며 딱 1시간 만에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했고 마침내 자전거를 반납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저는 다음 교통수단을 고민하다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로 합니다.
6시 반이었지만 한번 크게 데고 나니 아직까지 지하철은 타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죠. 문제는 어렵게 선택한 버스를 통한 이동도 두 정거장 만에 바로 포기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차량 정체가 심해 더 이상 타기 힘들어서였죠.
마침내 지하철 없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호기로웠던 의지는 과감히 버리고 잠실새내역으로 터덜터덜 내려갑니다. '계속 기다리다 보면 나 하나 정도 태워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놀랍게도 플랫폼까지 내려갔다니 금세 지하철이 도착하더군요.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도 오지 않던 지하철이 말이죠. 사람이 가득 차 있기는 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내리고 나니 제가 탈 수 있는 공간 정도는 나옵니다.
제가 계산한 바로는 타지 못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마 퇴근시간이 되어서는 정상운행이 되어 불편이 좀 해소되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한 시간 동안의 자전거 여행은 꽤 순식간에 허무하게 날아가버린 듯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까 7시 15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딱 3배 더 걸려서 돌아오니 몸도 마음도 넝마가 된 기분입니다. 전철 없이 퇴근할 수 있으리라 당당하게 새로운 경로를 선택했지만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지하철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더군요.
제가 역에서 계속 기다렸다면 전철을 탈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지나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지나간 대로 두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아마 다시 비슷한 상황이 온대도 저는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언제나 기다리기보다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더라고요.
되돌아보니 성급한 선택으로 마냥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던 퇴근길에서 그나마 한 가지 즐거웠던 기억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삼성역을 지나면서 백화점 앞에서 크리스마스 기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미리 크리스마스를 잠시나마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힘들고 재미는 없었지만 나름 오래 기억에 남을 추억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글로까지 남기며 마무리하면 남는 장사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