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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Jan 14. 2022

뒷담화(험담)와의 전쟁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앞담화할 용기는 없어요.

 꽤 오래전 어느 결혼식에서 있었던 이야기고 합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하는 피로연을 하던 중 신부는 친한 친구들과 시어머니에 대한 대화를 나눕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뒷담화를 하게 된 것은 이 결혼을 준비할 때부터  반대를 기 때문입니다. 그런 와중에 시아버지가 도하에 결혼까지 오게 된 것이었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금부터입니다.

 신부가 앉아있던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는 도중에 시아버지가 신부와 그녀의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됩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욕설이 포함된 뒷담화를 말이죠.


 대화를 두 귀로 직접 들었던 시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도 보통분은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피로연장의 사회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마이크를 잡아들고 이렇게 말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결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식사 맛있게들 하고 돌아가십시오."


 결국 뒷담화떤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였습니다.




우리가 남이 없는 자리에서 남에 대해서 흉을 보는 단어로 사용되는 뒷담화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입니다.

 내가 속한 사회 안에는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 등 뒷담화를 할 수 있는 부류 다양합니다. 뒷담화 대상 역시 가족, 친구, 동료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유명인까지 가능하니 한계라는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습니다. 저 역시 뒷담화를 하지 않는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 아니기에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직장 상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나에 대한 배려나 예의 없이 말을 하는 친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뒷담화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람의 면전에서 나의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장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장님 면전에서 자신의 처우에 대한 불만을 말할 수 없듯 말이죠. 결국 어찌 보면 얼굴을 보며 말을 할 용기가 없는 비겁함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산물인 셈이죠.


 하지만 그렇게 합리화를 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합리적인 비판은 완전히 배제한 채 무조건적인 비난만 쏟아내거나 인신공격을 한다든지 하는 것 그렇습니다. 이렇게 선을 넘는 뒷담화는 그 말의 하는 사람의 속상함을 대변해주는 역할보다는 결국 말하는 자신의 수준을 더 밑바닥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과 남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물론 앞으로도 계속할 테지요. 저를 아는 많은 분들도 제 이야기를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칭찬보다는 흉보는 이야기가 더 많을 수도 있겠죠. 예전에는 그런 이야기 하나하나가 들려올 때마다 잠을 못 잘 정도로 속상해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야기를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인터뷰가 아닌 이상 말이죠.

게다가 많은 연구에서는 이런 뒷담화를 통해 자기 계발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유대감이 향상되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만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책도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 남의 이야기가 나에게 돌아올 커다란 부메랑이 되지는 않을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 참고로 뒷담화는 표준어가 아니지만 설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사용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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