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는 뚝배기
겨울이 다가오니 순댓국집을 찾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뚝배기에 파글파글 끓는 순댓국이 나올 때, 파편이 튀듯 타닥대며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수많은 기포들의 발악은 왜인지 평화롭다. 숟가락을 넣고 몇 번 휘휘 저어주면 그 수면이 고요해지고 국물은 그 깊이를 드러낸다. 아직 뜨거운 순댓국의 첫 술을 뜰 때 나는 은은한 불확실성을 같이 뜬다.
빨리 달궈지고 빨리 식는 금속 재질의 그릇과는 달리 뚝배기는 느리게 달궈지지만 뚝심 있게 그 열을 보존한다. 양철냄비와 뚝배기 사이 열전도율의 차이는, 비교적 배움이 느렸던 어린 나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원인과 결과가 뒤섞이고 뒤틀리는 세상에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허튼짓이 아니라는 걸 뚝배기의 성질에서 배웠다. 난 뚝배기에 담긴 순댓국을 먹을 때마다, 그 한 끼를 먹고 버티는 하루와 그 하루들의 중첩의 힘을 되뇐다.
순댓국은 각 가게마다 그 맛과 양이 다르다. 순대의 종류와 개수, 부속고기의 두께와 크기, 다진 청양고추의 유무 등 순댓국엔 많은 변수가 있다. 모든 요리가 그러하듯 누가 무슨 재료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은 달라지지만, 춥고 허기질 때 들이키는 순댓국 한 뚝배기의 든든함은 단일의 맛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김훈작가는 그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맛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16p)
”맛“이라는 것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맛있음 “과 ”맛없음 “을 정의하기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라는 예리한 문장이, 내가 순댓국에 깍두기 국물을 부을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는 순댓국에 깍두기와 다대기를 듬뿍 넣어 국물을 크리미 한 붉은색으로 만들어 먹는다. 다대기와 깍두기는 조금 넣을 거면 아예 안 넣는 게 낫다. 그리고 넣을 거면 ‘이렇게 많이 넣어도 되나’ 의문이 들정도로 넣어야 얼큰하고 칼칼한 국물을 맛볼 수 있다. 어릴 적엔 순댓국이나 돼지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넣는 아저씨들을 보고 기겁하곤 했는데 요즘엔 군대 후임들이 나의 뚝배기를 보고 기겁한다.
깍두기 국물과 다대기를 넣는 이유는 그 얼큰한 맛뿐만이 아니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먹지 못한다. 그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나의 입은 그러한 자극을 이길 수 있는 역량이 없고, 벗겨진 입천장은 며칠이 지나도 아린다. 뜨거운 뚝배기에 다대기와 깍두기 국물을 부으면 그 온도는 내가 먹기에 딱 적당해진다.
가끔, 내 옆 테이블에 앉은 아저씨가 그의 뚝배기에 깍두기 국물을 부을 때면 나는 잔잔한 소속감을 느낀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모르는 그 아저씨와 내가 깍두기 국물을 부을 때 그 목적은 같을까? 궁금해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아저씨는 모르지만 나는 순댓국을 식히기 위해 깍두기 국물을 붓는다. 그것을 부으며 마치 어른이 된 것만 같아 우쭐하다가도, 아직 팔팔 끓고 있는 순댓국을 들이키는 다른 어떤 아저씨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순댓국에 깍두기 국물을 붓는 어린 어른이다.
애주가들에게 순댓국집은 성지이다. 술에 취하기 위해 가고 술을 깨기 위해 간다. 술을 깨기 위해 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기도 한다.
나의 집 근처엔 24시간 순댓국집이 있다. 맛이 다른 곳들만 못하지만 가격 대비 훌륭한 순댓국을 파는 곳이다. 그곳은 저녁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사람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아저씨, 알바를 끝내고 늦은 저녁을 해결하는 젊은 대학생들. 그곳에 몇 차로 온 건지 모를 취한 청년들은 연애 얘기를 하며 소주잔을 부딪히고, 눈이 거하게 풀린 아저씨들은 정치 얘기를 하며 순댓국 한술을 힘겹게 뜬다. 연애 얘기와 정치 얘기는 한대 뒤섞여 묘한 누린내를 풍긴다.
티비 속 앳된 트로트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흥겨운 반주 위 서글픈 가사가 곡예를 부린다.
다양한 소리가 섞여 나름의 조화를 이룬다.
오늘도 각자 앞에 놓인 뚝배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