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소희: 36세. 문예진흥원(도예 부분 실장)
민혁: 34세. 베스트셀러 웹툰 작가
수: 만 2세 쌍둥이 여자아이
연: 만 2세 쌍둥이 남자아이
소희 어머니
비행기 안에서 깜박 졸았다.
중국 난징 양쯔강 남안 지역에서 발견된 철화 청자는 12세기 고려의 것이 분명하다. 아직 많은 절차가 남아 있지만 한국으로 들여오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독주를 좋아하는 중국 문화부 소속 직원들과 밤새 마신 술이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잠깐 회사에 들러 자료를 정리하고 퇴근길에 나섰다. 어두워지고 있지만 벌써 여름인 듯 덥다.
현관에 들어 서자 수와 연이 쪼르르 달려온다.
“엄마 선물!”
“엄마 선물!”
공항에서 급하게 산 판다 곰 인형 하나 씩을 양 손에 들러 주고, 품에 안아본다. 아가 냄새! 흠~~! 저절로 긴 숨이 쉬어졌다.
밥을 푸던 민혁이 뒤를 돌아보며 , “왔어?” 한다.
“응, 씻고 나올게.”
식탁은 이미 전쟁 중이다.
수와 연은 판다를 가슴에 안고 서툰 젓가락 질에 바닥에는 반찬들이 헝클어져 있고 핑크색 판다를 서로 갖겠다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밥 먹을 때 인형은 안돼!”
젖은 머리를 털며 소희가 소리쳤다.
민혁이 판다를 다른 의자에 앉히고 수와 연은 입을 삐죽이며 밥 알을 세고 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든 소희가
“자기도 하나 줄까?”한다. 얼음장같이 찬 맥주를 단 숨에 들이킨다.
“어제 술 많이 마셨다며? 괜찮아?”
“이제야 깨는 거 같아. 너무 목말라. 이거 마시고 일찍 자야 해. 아침에 회의가 있거든.”
“아! 그렇게 해. 그런데 다음 주 아버님 제사인데 어떻게 할까?”
“벌써 그렇게 됐나? 다음 주면 일도 잘 마무리될 거야. 같이 준비하자.”
제사음식 생각에 민혁은 머리가 어지럽다.
설거지하는 손길이 산만하다. 순간 접시 하나가 손에서 미끄러지며 쨍그랑 소리를 낸다. 소희가 깨어났을까. 방 쪽을 쳐다보며 조심스레 치운다. 아차! 하는 순간, 엄지 손가락에서 피가 흐른다.
순조롭게 진행될 거 같은 철화 청자 반입은 중국 쪽에서 비색과 상감청자로 상징되는 고려청자가 아닌 철화로 표현된 문양과 검붉은 안료의 색채가 중국의 것과 흡사하여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한다며 몇 개월의 시간을 요구했다.
그것은 분명 고려의 <청자 철화 모란문매병>이다.
소희는 집에 들를 시간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에어컨을 틀어도 부엌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일찍 오겠다던 동서는 연락이 없고, 장모님만 일찍 오셔서 아버님 사진을 찾고 제기 대신 사용하기로 한 도자기를 닦으신다. 수와 연은 무엇을 하는지 방에서 조용하다. 처음보다 많이 간소해졌지만 제사음식은 여전히 어렵다.
“민혁아, 병풍 어디 있지?”
작년, 아이들 방을 넓히며 지하창고에 넣어둔 생각이 났다. 미리 꺼내 놓을 걸!
제사 상이 거의 차려질 무렵, 동서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형님, 죄송해요! 갑자기 야근을 하는 바람에! 설거지는 제가 다 할게요!”
소희는 중국에서의 일정이 길어져 내일이나 한국에 온다. 미국에 있는 처제는 내년에나 박사과정이 끝나고 한국에 들어 올 예정이다. 결혼을 하고 마지막 남은 1년만 미국에 있기로 했지만 논문 통과가 늦어져 3년째 동서는 홀로 지낸다.
그렇게 주인 없는 제사는 장모님과 두 사위, 수와 연이 참석하여 마쳤다. 동서는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혼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왠지 덩치만 커다란 늘어진 어깨가 안쓰러워 제사 음식을 챙겨 돌려보냈다. 여름이니 상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을 맞게 되었다.
밀린 청소도 같이 했다. 소희는 빨래를 돌리고 민혁은 화장실 청소를 했다. 토요일에 방문한 장모님 댁에 수와 연이 할머니와 자고 싶다고 하여 갑자기 집 안은 한가해지고 저녁에는 외식을 하기로 했다.
와인을 마셔서 인지 붉게 물든 소희의 얼굴이 연애시절의 모습 같다. 결혼하고 지난 3년간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전시는 잘 돼가?”
흡족한 얼굴의 소희가 말한다.
“아! 이제 한 고비 넘겼어! 지난번 진짜 아슬아슬했다니까?”
“자기는? 세 번째라 부담이 크지? 너무 댓글에 연연하지 마. 얼른 끝내고 잠깐 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글 끝나면 여행을 다녀올 까 해.”
“얼마나? 혼자?”
“응. 두 달쯤.”
“뭐? 두 달?”
“응.”
충격받은 얼굴로 소희는 말을 이어간다.
“아니, 내가 쉬라는 의미는 이제 수와 연도 내년이면 유치원에 가야 하고, 영어 유치원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 집에서 붙들고 공부도 시켜야 하고..”
“그래서?”
순간, 민혁의 눈에 물기인지 불 빛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번뜩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우리 잘해 오지 않았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왜 항상 당신 아버지 제사에 내가 상을 차려야 하지? 그리고 명절 때마다 우리 집 보다 당신 집에 먼저 가야 하고 음식마저 나와 동서가 해야 하냐고!”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주는데!”
“도와준다고? 거의 집안 일도 나 혼자 도맡고 아이들도 내가 키우고.. 가끔 청소기를 든다고 집안일을 하는 건 아니지! 이젠 유치원 공부까지 나더러 시키라고?”
“난 직장에 메여 있잖아! 더구나 출장도 많아. 당신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소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이제 시작된 초겨울의 바람을 닮아 있었다.
민혁이 떠난 지 두 달, 처음엔 아빠를 찾으며 울던 아이들도 차츰 적응이 되어 간다. 아빠 이야기를 하면 엄마가 슬퍼한다는 것을 눈치챈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소희는 휴직계를 신청했지만 재택근무 쪽으로 합의를 했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 사이 잠깐 회사에 나온다.
창 밖의 나무는 앙상히 뼈만 남아있고, 민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두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민혁의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까.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여자들만 계속하여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여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여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