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부재가 부르는 산업 붕괴
일본은 인수로, 한국은 직접투자로 싸우는 사이,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철강산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다. 이는 한 나라의 산업기반이자 곧 안보이며, 자동차, 조선, 건설, 방산 등 핵심 산업의 뿌리다. 최근 일본과 한국이 미국 철강·자동차 시장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민간 기업의 전략만큼이나 그 배후의 국가 전략과 외교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일본의 닛폰스틸은 미국 4위 철강기업인 US스틸을 인수합병(M&A)하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 생산라인과 고객망을 단숨에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미국 내 보호무역주의와 철강노조의 반발, 외국 자본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라는 본질적인 리스크가 동반된다. 실제로 미국 의회와 노동계는 “일본은 미국 철강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수 없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고 있다.
반면 한국의 현대자동차와 현대제철은 미국 내에서 전기차, 배터리, 철강공장을 직접 짓는 ‘그린필드 투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더 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되는 방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일자리 창출, 공급망 안정, IRA 법안 기준 충족, ESG 요건 반영 등을 모두 만족시키는 전략이다. 단순히 시장 진입을 넘어서 ‘정책에 부합하는 파트너’로 인정받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략의 차이는 기업의 선택을 넘어 국가 산업외교 역량의 차이로 귀결된다. 일본은 정부와 민간이 긴밀히 협조하며, 미국 정치권을 설득하고 인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반면 한국은 민간 기업이 혼자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규제에 대응하고, 통상 압력을 견뎌내고, 정책 혜택을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구조에 내몰려 있다.
이처럼 기업이 홀로 외교까지 감당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의 배경에는 현 정부의 외교 기조가 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중국과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전통적인 전략 동맹국인 미국과의 산업외교 채널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미국 의회 및 연방정부와의 접촉창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IRA, 반덤핑, 보조금 정책 등 한국 기업에 직결되는 주요 정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전략적 대응은 사실상 부재한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은 최근 자국 내 철강재를 세계 시장에 대규모 덤핑하며 글로벌 가격을 붕괴시키고 있다. 그 여파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 철강업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공식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시장경제에 맡기겠다는 방침만 반복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는 방임이 아니다. 선진국은 자유시장 안에서도 자국의 전략산업을 보호하고, 불공정 경쟁에는 즉각적인 대응을 한다. 미국과 EU, 일본은 모두 덤핑에는 관세를, 보조금 갈등에는 통상보복을, 공급망 전쟁에는 외교·안보 협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중국의 덤핑 앞에서도 조용하고, 일본의 미국 철강 장악 시도 앞에서도 무대응이며, 자국 기업의 미국 내 정책 전선 앞에서도 한 발 물러나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그룹과 현대제철의 미국 현지화 전략은 단순한 투자를 넘어, 대한민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으로 올라설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시험대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뒷짐만 지고 있다면, 이 전략 역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정책 지원 없이 민간의 힘만으로는 산업주권을 지킬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결단해야 할 때다. 중국의 철강 덤핑에 대해서는 관세, WTO 제소, 수입 쿼터 등 구체적 대응을 시작해야 하고, 미국과의 산업외교는 외교부, 산업부, 국토부, 주미대사관이 함께 나서서 정상화해야 한다. 현대차·포스코·LG에너지솔루션 등 미국에 투자한 기업들과 정례 협의체를 구성하고, 통상압력 완화 및 혜택 극대화를 위한 외교적 플랫폼을 가동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철강은 안보이며 산업은 외교다. 그리고 외교의 실패는 산업의 붕괴로 이어진다.
정부는 더 이상 자유시장이라는 명분 뒤에 숨지 말고, 산업주권의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은 공격하고, 중국은 파괴하고, 미국은 선택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정부의 선택이 곧 국가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