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햇살이 몸을 굽혀 창에 드리워진 블라인드 아래로 카페의 실내를 훔쳐보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빛이었다. 민석과 나의 그림자가 테이블 옆 바닥에 길게 누워 엉켰다. 민석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김을 불어가며 안경알을 닦았다. 이따금씩 안경알에서 햇살이 반사되어 튕겨났다. 그의 입에서 은경의 이야기가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참, 부장님. 은경이 기억나세요? 왜, 우리 회사에서 중국어 통역하던 애.”
오늘 만나자고 한 진짜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주식시장에서는 맥을 못 추면서도 사사로운 남의 뒷얘기를 콩팔칠팔 따지는 데는 과히 독보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내 더듬이가 꿈틀거렸다. 이틀 전 걸려왔던 민석의 전화목소리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추진 중인 중국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나더러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좀 도와주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었다. 프리랜서의 형태로 계약을 한다면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될 것이라며. 실업급여 신청을 하면서 시달렸던 자책감을 생각하면 찬밥이 아니라 쉬어터진 밥이라도, 주는 것이 아니라 줄 것처럼 제스처만 취해도, 미친개처럼 달려들어야 했지만 웬일인지 그 말에 더듬이는 자꾸 이상반응을 보였었다. 그래 대답을 미룬 채 만남을 수락했던 것인데, 만나고 보니 뱃구레 깊숙이 흉물단지 같은 걸 숨겨놓은 듯한 인상을 더욱 지울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일이 시작될 것처럼 과장되게 세일즈맨다운 너스레를 떤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은경이라니. 더듬이의 각도가 더욱 가파르게 곧추섰다.
“은경이, 음……. 그래, 박은경. 기억하지. 그런데 걔는 왜?”
조그만 키에 검정뿔테안경을 쓴 은경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를 모자이크처리하기 급급했다. 던진 말이 미끼인지 먹이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듬이의 존재를 은폐해 상대의 방심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민석이 제 앞에 놓인 머그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렸다. 컵 표면에 그려진 악동천사 가브리엘이 유난히 그를 닮아있었다. 컵을 내려놓은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른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나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가브리엘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니 새어나왔다.
“혹시 알고 계세요? 은경이가 회사근무하면서 애 낳았다는 거.”
뜻밖의 말에 내 상체가 무조건 반사를 일으키며 뒤로 확 젖혀졌다. 그럴 것이 당시 은경은 분명 결혼 전이었다. 하지만 놀람은 잠깐이었다. 커피로 행복을 전하라는 사명을 망각한 가브리엘이 호기심의 향기를 진하게 피어 올렸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 그건 정상적이지 않은 남녀관계의 이불 속 뒷이야기를 포함하기 마련이어서 누구에게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속물근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동시에 어디에선가 더듬이가 노출될 위험에 처했다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더듬이의 위장막을 강화하기 위해 짧게 되묻는 화술을 동원했다.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민석이 경계심을 발동해 말의 진실성에 물타기를 시도할지도 몰랐다.
“은경이가 한 달 가까이 휴가 냈을 때 말예요. 그때 출산했대요. 왜 한동안 부장님께서 은경이랑 함께 출퇴근하신 적 있잖아요? 그 무렵일 거예요.”
다행히 민석의 레이더에는 아무 것도 포착되지 않은 것 같았다. 태연하게 맞장구를 침으로써 난 또 한 번 상대를 안심시켰다.
“맞아. 우리가 카풀을 한 기간이 일 년도 넘었지.”
카풀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조금은 특별한 은경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그것만큼 적절한 단어는 없으리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은경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 어느 가을 회사사무실에서였다. 동료였던 인사부장이 대뜸 내 자리로 와서는 새로 입사한 직원이라며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인원충원을 요청한 바 없음에도 우리 부서의 일까지 살뜰히 챙기는, 평소와 사뭇 다른 유난스런 그의 친절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뿐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가리켜 중국어에 능통하니 대(對)중국영업을 맡기면 적격이라는 말까지 태연스레 내뱉었다. 그건 내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넘보는 만행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난 황당과 당황 사이를 방황해야했다.
정신을 차리며 국면을 전환시킬 되치기를 고민하자니 잘 부탁한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분히 위로하는 듯한 뉘앙스가 짙었다. 조아렸던 그녀의 고개가 막 제자리를 찾을 무렵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온 인사부장이 이번에는 내 귀에다 대고 중국진출을 위해 사장이 특채했다는 속삭임을 쏟아 부었다. 사장의 특채라니. 그건 도발의 범주를 넘어서는, 낙하산부대를 프락치로 침투시키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난 방어체계를 업그레이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의 왜곡이라는 일부 부작용이 빚어진다한들 그녀를 향한 감시와 사찰은 불가피한 요소였다.
즉각 은경에 초점을 맞춘 정지궤도위성이 발사되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초고화소 카메라와 8K해상도 디스플레이를 통해 낱낱이 분석되었고 내 눈은 거기서 우쭐댐이나 건방짐 따위의 흔적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낙하산부대 요원이라면 사규와 무관하게 부여받은 우월적 지위를 바탕으로 조직 내에서 군림하려들 게 뻔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몇 달 동안 집요한 관찰이 계속되었지만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사기록카드의 현미경 검증에서도 사장이나 인사부장과의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요주의 인물이라는 낙인은 나의 선입견이 일으킨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다. 스파이도 본드걸(Bond Girl)도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내 가슴으로 미안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보상심리에서 발현된 호의를 제공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녀는 나처럼 부산 울산 간을 매일같이 출퇴근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오직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신분차이 뿐이었다. 내가 자가운전으로 출퇴근한데 반해 그녀는 시외버스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빈부격차를 베풂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카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눈치 못 채셨어요?”
모르고 있었다는 걸 오히려 의심의 근거로 삼으려는 의사가 민석의 눈빛에 팽배했다. 과민하게 반응하면 의심이 더 짙어질 수 있었다. 정밀한 더듬이가 그걸 놓칠 리 없었지만 난 본능적으로 펄쩍 뛰었다.
“정말 몰랐어. 아니 믿지도 못하겠는 걸. 출산 무렵까지 출근했다면 표시가 났을 거 아냐? 에이, 말도 안 돼.”
비록 다른 사람을 아내로 오인해 엉덩이를 툭 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을 정도로 눈썰미가 없는 나긴 하지만 아무렴 임산부를 구별하지 못했을까? 더구나 당시 은경은 나에게 오피스와이프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저도 그게 미스터리예요. 어떻게 그리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는지.”
며칠째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깊게 목이 파인 푸른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이 지나갔다. 한줄기 바람이 간절했던지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가슴언저리께 옷깃을 쉴 새 없이 펄럭였다. 그때마다 가슴골의 V자가 소문자와 대문자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아슬아슬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민석에게 들킬세라 이내 고개를 돌렸지만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내 시선은 계속 그녀의 가슴 쪽을 흘끗거렸다. 그걸 막아선 건 푸른색 작업복점퍼 차림의 은경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해의 은경은 출퇴근복장으로 줄곧 남자사원전용인 그 작업복을 고집했다. 여사원들을 위해서는 별도의 유니폼이 마련되어있었음에도 그녀의 집착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유명쇼핑몰의 유니섹스모델을 자처하는 듯했다. 한참 옷맵시에 신경 쓸 젊은 여성이, 공돌이 티 난다며 남자사원들조차 입기 꺼리는 작업복을, 겨울은 고사하고 가을이 채 문턱에 들어서기 바쁘게, 가까이서가 아닌 부산에서 출퇴근하면서까지.
첨단 패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는 통박을 무릅쓰며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올가을겨울 패션 트렌드의 키워드는 ‘실용’이며 캐치프레이즈는 ‘멋 부리다 얼어 죽기 십상’이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무엇보다 옷을 많이 껴입을 수 있어 좋다는 해설까지도 그녀는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캥거루의 모성애를 벤치마킹해 임신을 위장했다는 말인가?
또 은경이 한 달간 휴가를 신청한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휴가사유를 묻는 나에게 그녀는 ‘이혼으로 혼자 된 언니가 큰 병으로 입원하여 병간호가 마뜩잖아서’라고 답했다. 휴가가 끝나고 꽤나 수척한 모습으로 복귀했을 때도 병간호에 지쳐 그러려니 했다.
생각해보니 모든 정황들이 출산 전후의 산모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징후와 일치했다. 이것이 전부 그녀가 쓴 소설이라면 그야말로 치밀한 플롯과 핍진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거듭 부정하고 싶었지만 임신과 출산의 개연성은 그만큼 높고도 남았다.
“더 기가 막힌 건, 애 아버지가 글쎄 천수래요.”
민석은 체중을 잔뜩 실은 훅을 무방비 상태의 내 안면에 정확하게 작렬시켰다.
“천수라고? 설계과에서 근무하던 배 과장 말이야? 배천수?”
설마. 난 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성실했던 천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애인의 조건이라면 완벽에 가까운 그였다. 개성이 뚜렷한 이지적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강단진 성격에 섹스어필하는 큰 코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배우자로서의 조건은 다른 문제였다. 직장과 돈에 관해서야 후하게 평가해 평균수준으로 인정해주더라도 신분을 따지고 들면 그는 평가대상에도 낄 수 없는 결격사유의 소유자였다. 기혼자였을 뿐 아니라 아이를 둘씩이나 거느린 한 집안의 엄연한 가장이었으니 말이다. 은경이라고 공공연한 그런 사실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모두에게 비난 받을 비련의 삼류소설 주인공을 구태여 감수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적 재능과 소설적 삶은 다른 문제였다.
민석의 말은 의심을 증폭시켰지만 그렇다고 그 의심이 나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난 다이달로스의 미로 속에서 의심이라는 입구도 확신이라는 출구도 찾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방황의 배경에는 민석과 천수, 그 두 사람과 내가 그동안 맺어왔던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둘에 비해 나의 입사가 5년 빠르긴 했지만 우린 같은 직장에서 10여 년간을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특히 민석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앉아도 상대의 심박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좁아터진 기술영업과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쭉 나와 부대끼며 지냈었다. 그만큼 서로는 성격이며 자잘한 습관까지 꿰뚫고 있었다. 반면 그와 입사동기인 천수는 내 고등학교 직속후배였다. 다른 부서에 근무하면서도 유달리 나와 끈끈하고 질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자들 세계에서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교동문이라는 학연 속에 아이를 낳을 정도로 발전한 내연관계가 비밀이 되어 숨어들 공간은 없었다.
민석의 말이 거짓이라는 가정은 천수를 바람쟁이로 매도한 그가 저급한 가짜 뉴스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덮어쓴 채 평소의 인간성을 부정당할 때라야 성립되는 것이었고, 민석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은 그 전모를 민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천수와의 관계에 배신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울 때라야 성립되는 것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저랑 천수가 함께 중국 장춘으로 출장 갔던 적 있잖아요? 은경이가 통역으로 따라갔었고. 아마 그때 이 자식이 사고를 친 것 같아요.”
태아의 형성과 발육, 출생 사이클을 고려할 때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민석이 앞서 말한 은경의 출산시점과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손가락을 꼽거나 계산기를 두드리는 수고조차 필요 없었다. 신뢰의 시소는 점점 민석 쪽으로 기울었다. 천수에게서 느꼈던 배신감의 무게만큼 억지로 덜어낸다 한들 결과는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기술영업과와 설계과 직원이 기술협의 목적으로 중국출장을 준비할 때였다. 천수는 설계과의 출장자로 이 대리를 낙점했고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이튿날이었다. 그들의 통역을 맡은 중국사무소의 직원이 통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황사에 섞여 중국에서 날아들었다. 난 열일을 젖혀두고 서둘러 은경을 대체통역인원으로 선정했다.
통역원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사무실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천수가 나를 찾아왔다. 설계과의 출장자를 자신으로 변경해달라는 것이었다. 천수의 진의가 미세먼지 속으로 숨어들며 흐릿해졌다. 난 ‘설마 은경이 때문은 아니지?’라는 말로 미세먼지를 제거하려 들었다. 천수의 표정이 어린 시절 싸움의 정석을 신봉한 내가 시험 삼아 낭심을 냅다 걷어찼던 이웃집 아이처럼 하얗게 굳어졌다. ‘워낙에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기도 하거니와 회사의 이목도 집중되어 있어서’라며 얼버무린 대답에도 의표를 찔린 흔적이 역력했다.
어쩌면 그때 천수는 자신만의 이런 독특한 방법으로 나와 구축되어있던 신뢰관계를 굳게 지키려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애써 외면했다. 천수의 출장자 변경요구가 사심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정작 민감해야 할 곳에서 둔감해지는 내 더듬이의 비뚤어진 특성이 보다 도드라졌는지도 모른다. 며칠 뒤 그들은 출장길에 올랐다. 퍼즐을 맞추려니 민석의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거는 또 있었다.
그로부터 서너 달이 지나 납품이 완료된 그 설비를 생산현장에 투입하기 위해 중국현지에서 여러 직원들이 막바지 고생을 하던 때였다. 은경과 함께 영업활동차 중국의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갔던 내가, 고생하는 직원들을 위로할 겸해서 그곳을 들르게 되었다. 사실 거길 가게 된 배경도 미심쩍은 면이 없지 않다. 원래는 곧장 귀국길에 올라야했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직원들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출장연장을 부추긴 장본인이 바로 은경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에 회식이 벌어졌다. 모처럼의 술자리였던 탓에 그들은 밤늦게까지 나를 볼모로 잡았다. 마지막 코스인 탄금대(彈琴臺)라는 이름의 노래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일행 중에 은경이 포함되어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종업원은 주문도 받기 전에 도우미의 필요여부부터 물어왔다. 우린 뜨악해했다. 그러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 친구가 풍선처럼 부푼 뱃속에 주입된 알코올 기운을 빌미삼아 용감하게 ‘못 먹어도 고’를 외쳤다. 어차피 위로가 목적이었던 만큼 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의아스러웠던 건 은경의 태도였다. 도우미가 들어오고 분위기가 무르익다 보면 남자들 사이에 끼어있기가 난감해 피하지나 않을까 우려했건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노래방 상호의 의미를 설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온몸에서는 도우미를 일본군 삼아 배수진을 친 신립 장군의 기상이 넘쳐흘렀다. 수상쩍기는 천수도 매한가지였다. 마이크만 잡으면 구레나룻에 김 조각을 붙여가며 엘비스 프레슬리로 환생하곤 하던 평소모습은 자취를 감춘 채, 갓 시집온 새색시의 영혼이 그의 몸에 빙의되어있었다. 어리석게도 난 그것마저 디오니소스의 마법으로 여기며 내 더듬이의 하자를 괘념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민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날 그 자리야말로 천수의 외도를 쫓는 은경의 ‘추적 60분’ 촬영현장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은 천수가 한 때 은경이랑 결혼까지도 생각했대요. 와이프하고 워낙 사이가 안 좋아 거의 이혼직전까지 갔었거든요. 위자료와 아이양육권도 서로 합의되었다는 얘기까지 있었으니까요.”
30대 젊은 남녀와 쌍둥이 복장을 한 예닐곱 살 가량의 두 아이가 옆 테이블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드래곤볼의 손오공 피규어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민석의 이야기가 천수의 부부관계로 번져가자 손오공이 여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둔갑술이 부려졌다.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쩌다 하루를 택해 아이와 만나 외로움을 달래는 아빠, 모든 육아의 짐을 홀로 떠안은 엄마,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엄마 아빠의 개념이 혼란스럽기만 한 아이들로 바뀌어버렸다. 위자료, 양육권 같은 유해언어들로부터 이들 가족을 방어한다는 게 손오공이 또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다른 얘기는 몰라도 천수 이혼얘기는 그때 설계과 내에서 자자했었어요. 저도 설계과 직원을 통해서 들었고요. 어쨌든 천수가 은경일 각별히 생각했던 건 틀림없어요. 은경이에게 신차로 마티즈를 한 대 뽑아주기도 했으니까요. 과장월급 몇 푼 된다고.”
“그런 일도 있었어?”
천수를 향해 나아가는 민석의 운전 솜씨는 거침이 없었다. 고장 난 브레이크로 제한속도를 넘나들면서도 운전대를 잡은 손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천수는 한 꺼풀씩 옷을 벗으며 알몸이 되어갔고 그와 내가 유지해왔던 관계는 그저 허울뿐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었다. 신기한 건 민석이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씩 알려줄 때마다 그것의 진실성을 뒷받침할 만한 사건들이 꼬박꼬박 기억난다는 점이었다. 마티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은경이 예의 그 점퍼를 입고 나와 함께 퇴근하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한적한 국도를 달리면서도 민석과 달리 난 운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찍 찾아온 어둠에 나쁜 시력도 문제였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진눈깨비의 심술이 특히 나를 괴롭혔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신호등이 잘 식별되지 않아 가끔 신호를 무시하는 일이 생겼다. 불안했던지 그걸 본 은경이 물었다.
“부장님, 색맹 아니죠?”
“무슨 말이야? 좀 전에 신호위반한 것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나, 색맹 아니야. 날씨가 궂어서 앞이 잘 안 보여 그런 거지.”
“그런데 색맹은 유전이죠?”
밑도 끝도 없이 색맹이야기를 꺼내놓고 은경은 곧 침울해졌다. 색맹의 유전 여부를 확인한 것도 심상치 않았다. 나의 눈에 대한 궁금증이라면 유전여부를 따지고 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가족관계에 색맹이 개입되어있는 듯한 기류가 감지되었지만 오지라퍼라는 누명을 덮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유전이지. 왜 남자친구가 색맹이라 걱정하는 거야?”
한발 물러서고자 했음에도 아무 근거 없는 남자친구를 끌어들여 되물은 건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는 장난기가 발동해서만은 아니었다.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대답한다면 듣기를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다는, 보다 차원 높은 계산이 깔려있었다. 기껏 잔머리를 굴린 보람은 없었다. 은경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질문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답변을 내놓았다.
“아, 부장님. 이제부터는 저 안 태워주셔도 돼요. 적금 하나 들었던 게 만기가 되어서 그걸로 차를 한 대 샀거든요. 그동안 태워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래? 잘 됐네. 하지만 이거 서운해서 어떡하지? 함께 출퇴근하는 동안 심심하지 않아 좋았는데.”
그날 이후 앙증맞은 빨간색 소형차를 몰고 다니는 은경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차가 개구리 눈알을 헤드램프로 장착한 마티즈였다.
“그런데 그 이후로 어떻게 부부사이가 회복되었는지, 언젠가부터 천수가 은경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헤어지게 된 거죠.”
커피는 식어있었다. 난 컵을 들어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기가 사라진 식은 커피에서 강한 쓴맛이 우러났다. 쓴맛은 카페인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부장님,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민석이 한 차례 침을 삼켰다. 상하로 움직이며 요동치는 목젖이 하고자 하는 말의 심각성을 예고했다. 내 더듬이가 경보를 발령했다. 강도를 더해가며 천수를 향하던 민석의 칼끝이 나를 향할 수도 있다는 경계경보였다. 자율신경계가 표면장력을 키우면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절로 입도 다물어졌다.
“은경이가 지금껏 천수의 도움 없이 혼자서 애를 키워왔다는 거예요.”
민석은 영장도 없이 수십 차례나 천수를 압수수색한 것 같았다. 스포츠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팀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듯 영문도 모른 채 탈탈 털린 천수가 안타까웠다. 반대로 민석은 의뭉스럽기만 했다. 입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수가 책임을 회피한단 말이야?”
“그게 아니라 천수는 은경이가 제 애 낳은 걸 모르고 있어요.”
민석에게서 비로소 허점이 보였다. 상대가 모르는 상태라는 걸 어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부존재의 증명과 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였다. 단순한 말실수였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난 잽을 날렸다.
“은경이가 천수에게 알리지도 않고 저 혼자서 애를 낳았다고?”
“우리가 걔 임신한 것도, 출산한 것도 모를 정도였다면 천수의 눈을 가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요?”
유사한 사례를 들어 불확실한 사실조차 확실한 것처럼 만듦으로써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도록 상대를 끌어들이는 화술. 이건 또 모든 걸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약점을 덮으며 상대를 공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절호의 반격타이밍이었다. 난 스텝을 밟으며 좌우 주먹을 차례로 뻗고 휘둘렀다.
“아니 김 과장은 대체 은경이와 어떤 사이기에 모든 걸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어?”
하지만 나의 스트레이트는 민석의 더킹모션에 허공을 갈랐다. 뒤이은 어퍼컷마저 보기 좋게 커버링에 걸렸다.
“무슨 사이는요? 그냥 얼마 전에 은경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만난 것뿐이에요.”
바깥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유리창에 이쪽 실내가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민석과 나 사이로 은경이 들어와 있었다. 은경인 나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며 민석과의 간격을 점차 좁히더니 급기야 바싹 붙어 앉았다. 민석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부담스러워했다. 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파고들만한 빈틈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은경이가 그 말을 하자고 김 과장에게 만나자했다는 거야?”
“아뇨. 그건 취업문제 때문이었어요. 혹시 우리 회사에 중국어 통역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다시 그 일을 하고 싶다면서.”
도로는 밀린 차량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주말마다 재현되는 상습적인 정체현상이었다. 민석의 말이 차량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순간 내 카메라의 뷰파인더가 피사체를 바꾸었다. 민석과 은경, 천수 같은 인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모습은 점차 클로즈업되었다. 조리개가 값을 낮추면서 심도가 얕아졌고 아웃포커스가 일어났다. 취업, 회사 같은 단어들로부터 멀어진 내가 깊고도 넓은 정체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그러고 보니 구원의 손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원망과 탄식으로 보낸 나날이 어느덧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시장에서 절대강자의 위치를 사수하던 우리 회사가 나락으로 빠져든 건 1년 전쯤부터였다. 일감이 줄어서가 아니었다. 중소기업이면서도 우리의 영업력은 단연코 발군이었다. 생산기술력도 제품의 품질도 수준급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우리의 곳간은 늘 텅 비어있었고 사주(社主)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은행출입을 일삼았다.
상대보다 훨씬 많은 안타를 치고서도 경기에서 지는 야구팀이 그렇듯 원인은 실책에 있었다. 무엇보다 비단장수 왕 서방의 케이스스터디를 소홀히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수주 받은 일들이 하나둘씩 마무리되어갔지만 왕 서방의 후예들은 대금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며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읍소작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비장의 카드라 할 수 있는 계약파기와 법적소송이라는 협박도 씨알이 먹히질 않았다. 주먹에 비해 수백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법에 호소했다가는 피를 말려 더 빨리 사망한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터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동방예의지국에서 주먹을 앞세울 수도 없었다.
체력을 키우며 다져왔던 면역력은 서서히 바닥으로 치달았다. 은행으로부터 투여되던 항생제조차 이미 강한 내성이 생긴 슈퍼박테리아를 제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원들의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고 불안해진 거래은행들이 하나둘 대출금회수에 나섰다. 사주의 직인(職印)이 하릴없이 주 채권사의 하나였던 모(某) 대기업으로 넘어갔다. 언론들마저 우리 편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제신문에는 일련의 그 과정이 ‘사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흡수합병’이라는 번지르르한 단문으로 채색되어있었다.
곧바로 총과 장갑차 대신 장부책을 든 점령군들이 밀고 들어와 구조조정이라는 분탕질을 자행했다. 나와 민석은, 최고 권력자의 통치철학을 받들어 선거공약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레임덕이 가속화되면서 졸지에 경질대상 일 순위로 전락해버린 청와대의 측근이자 실세나 마찬가지였다. 천수라고 회오리를 피해갈 재간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노란봉투가 우리에게 전달되어왔다. 봉투 속의 통지문에는 내로라하는 기업의 총수들이 경제위기라는 말로 엄살을 부릴 때마다 흔히 회자되곤 하던 ‘경영상의 어려움에 의한 해고’라는 글귀가 굵게 인쇄되어있었다. 그것이 4개월 전 우리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유였다.
“은경이는 지금 뭘 하는데?”
우리들 대화의 열차가 궤도를 바꾸어 달려갔다. 역지사지라는 기관차가 인지상정이며 측은지심과 같은 객차를 이끌고 있었다. 거기에 편승한 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분수에 맞지 않게 남 걱정하는 사치를 부렸다.
“양산에서 마트점원으로 일한대요. 비정규직이라 힘들다보니 다시 예전 일을 하려는 거고.”
안타까움이 내 양어깨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생각다 못해 그 짐을 일부나마 민석에게 떠넘겨보았다.
“김 과장 회사에 추천을 한 번 해보지 왜?”
“그것도 생각했죠. 하지만 이미 통역이 둘씩이나 있어서 어렵다네요.”
부드럽게 거절하는 그의 손사래에서 영악함이 물씬 풍겨났다.
“그렇겠지, 어렵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깊이 사로잡혔다. 그건 몇 년간 같이 일한 정 때문이라기보다, 그녀의 사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만 같아 느껴진 죄책감 때문이었다.
은경이 사직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난 건 여름이 한참이던 작년 이맘때였다. 사직의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에서 경제학원론을 교양과목으로 이수한 흔적을 여실히 표출했다. 카풀동행 중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강의했던 자본주의경제론이 효과를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단호하면서도 또록또록한 어조로 중국어 능통이라는 희소가치를 연봉에 반영해달라고 말했다. 민석의 은경분석론에 따르면 부족한 양육비를 메워보려는 심사였으리라.
수요와 공급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녀의 주장이 합리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인식의 공유가 협상의 타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협상의 기술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밀당의 권한이 협상의 한 축인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난 그저 은경의 인상액과 사주의 삭감액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심부름꾼일 따름이었다. 융통성을 최대한 부려봤자 늘어난 권한이라고는 은경을 붙잡고 부득부득 설득해대는 게 고작이었다.
스스로 정해둔 양보의 마지노선이 관철되지 않자 마침내 그녀는 사직서처리와 관계없이 무단결근을 감행하는 강수에 돌입했다.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포기하는 전략으로 협상의 결렬을 통보한 셈이다. 결국 난 사주에게는 무능한 간부로 은경에게는 야속한 상사로 각인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그러고는 소식이 끊어졌던 은경이었다.
“어쨌든 그런저런 이야기 끝에 본의 아니게 은경이 줄줄이 늘어놓는 하소연을 듣게 된 거예요. 하도 가여워서 은경이 처지를 알려볼까 하고 천수도 만나보았지만 그 친구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잠시 탈선했던 열차가 다시 정상궤도로 진입했다. 민석의 말줄임표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내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천수가 왜 부장님 고등학교 후배잖아요. 만약 그 사실을 천수에게 알려야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부장님이 적격일 것 같은데 혹 도와주실 생각 없으세요?”
걱정했던 것처럼 나를 겨냥한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여유를 되찾은 까닭이었을까? 도리어 민석에게서 병상에 누운 환자를 일으켜 세우려는 의사의 사명감이 읽혔다. 그는 은경이라는 바늘로 내 피부를 찔러대며 미혼모라는 사회문제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주사하고 있었다. 해결책이란 게 막연했지만, 또 해결된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나서서 해결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면 무관심의 이불을 덮고 누워서 벌이는 환자 코스프레를 그만둬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를 내가 한 번 만나보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마음먹은 김에 바로 전화하는 게 좋겠지?”
“아유,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천수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세 번의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연결되었다. 우린 며칠 뒤로 간단히 만남약속을 정했다.
카페를 나온 민석과 나는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로로 혹은 세로로 점멸을 반복하는 가로변 상가의 네온사인불빛에 어둠의 두께는 한결 얇아져있었다. 쫓긴 어둠들이 발길에 툭툭 채이며 그림자로 변해 나타났다.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빛에 크기며 개수와 방향을 무작위로 마구 바꾸어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하는 그 모습에 잠시 가벼워졌던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황단보도가 나타났다. 민석과는 그곳에서 헤어져야 했다. 작별인사로 악수를 나누려는데 만취한 행인 하나가 비틀거리다 민석과 큰 동작으로 부딪쳤다. 주춤거리는 민석의 얼굴에서 안경이 떨어졌다. 난 안경을 주워들었다. 안경알은 방사선을 그리며 깨져있었다. 취객은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갔다. 몇 걸음 멀어진 그가 갑자기 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알 수 없는 말로 고함을 질러댔다. 횡단보도에 보행자신호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난 취객을 무시하라는 뜻으로 민석의 등을 떠밀며 깨진 안경을 건넸다.
“안경이 깨져 어떡해? 술 취한 사람에게 물어 달랠 수도 없고. 안경 없어도 버스 타는 데는 문제없는 거야?”
안경을 받아 주머니에 넣은 민석이 길을 건너기 위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근시나 원시가 아니니까요. 이 안경, 색맹을 교정하기 위한 거예요. 그럼 부장님, 다음에 봬요.”
뛰어가는 민석의 뒷모습에서 언젠가 색맹이 유전이냐고 묻던 은경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큰 파도에 넘실거리는 배를 탄 듯 심한 멀미증세가 났다. 난 중심을 잃고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길 건너편에서는 때 아닌 뻐꾸기 한 마리가 나타나 하늘을 낮게 비행했다. 뻐꾸기는 날갯짓을 세차게 해댔다. 은경의 상태를 천수에게 알려 인간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겁해지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그 날갯짓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