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리 선생님

by 원광우

유도리의 부고가 전해진 건 어제였다. 난 그걸 애써 무시했다. 인연이 끊어진 게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굳이 그를 들춰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달라진 건 황금박쥐의 전화를 받고부터였다. 그의 입에서 불쑥 남초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불현듯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그때부터 한사코 말줄임표만 남발하며 은근히 문상을 압박해왔다. 오늘 내가 서울에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것도, 열차가 이따금씩 탈선해 그들과 함께 했던 시공간으로 경유지를 바꾼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다음 달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선거로 술렁이던 1971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난 부산에 위치한 한 국민학교에서 6학년이 되었다. 우리 교실의 정면 칠판 위로는 정중앙에 반듯하니 3대7 가르마로 기름을 발라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사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은 내가 입학하던 해부터 단 한 차례도 바뀐 적이 없었다. 교과서에서는 5.16 혁명이라는 말로 그를 설명했고 우리는 뜻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 연도와 날짜를 외워댔다.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사회시험에 나온 문제를 맞히려면 도리가 없었다.

그 무렵부터 동네어른들의 입에서는 신민당이라는 무슨 빵집 같은 상호가 자주 등장했다. 그 빵집의 주방장은 전라도 신안에 있는 외진 어촌마을 출신이었다. 빵집도 출신지도 다 생소했지만 나는 그 주방장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그건 다름 아닌 빨갱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 집에서 구워낸 빵의 색깔이 그런지, 아니면 그 집의 간판색이 그런지, 그것도 아니라면 주방장이 빨간 옷을 주로 입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빨갱이라는 낱말은 그 집과 주방장을 지칭하는 말에 꾸미는 말로 항상 붙어 다녔다. 어른들은 주로 그런 말을 귓속말로 주고받았다. 색깔을 뜻하는 그 말이 왜 떳떳하게 오가지 못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궁금했던 내가 언젠가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 김 여사는 빨갱이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연탄집게부터 쳐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해소되기는커녕 증폭되어만 갔다. 더불어 어른들은 이번에 선거를 잘못하면 큰일 난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일삼았다. 잘못 되는 순간 저쪽 깽깽이들이 온 나라를 빨갛게 물들일 거라 수군거렸다. 그러면 우리 보리문디들은 죄다 찬밥 신세가 될 것이며 우리 밥그릇은 몽땅 저쪽 차지가 될 거라는 말도 했다. 알 수 없는 일은 또 있었다. 저쪽 동네사람들은 빵집 주방장을 선생님이라 부른다고 했다. 같은 나라라면 같은 말을 쓸 텐데 선생님이란 말의 뜻을 이처럼 달리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난 저쪽 동네를 동네어른들의 말처럼 다른 나라로 취급해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북한도 무찔러야하는 마당에 똑같은 낱말을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곳이라면, 금을 그어서라도 대한민국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말에 찬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빵집주방장과 선생님은 그만큼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극히 속 좁은 판단의 결과물임을 난 금방 알아차렸다. 유도리 때문이었다. 유도리는 우리 반 담임을 맡은 이태호의 별명이었다. ‘유도선수 출신 이 선생님’을 줄여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리던 것을 누군가가 듣고는 전파시킨 것이다. 유도리가 엄연히 우리 담임이 된 이상 빵집주방장을 선생님으로 부른다는 소위 깽깽이라는 저쪽 동네사람들의 말을 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도선수가 선생님이 되는 마당에 빵집주방장이 선생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 말이다.

6학년이 된 첫날 교실에서의 내 자리는 앞에서부터 세 번째 줄 가운데로 정해졌다. 내 짝은 커다란 두상에 이마가 얼굴의 2분의 1쯤 차지하는 것이 당시 유행하던 만화영화의 주인공 황금박쥐를 닮은 놈이었다. 난 띨띨해 보이는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도무지 성적으로 나를 위협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사 그놈의 성적만을 강조하는 김 여사의 잔소리에서 해방되려면 어쨌든 그런 덜떨어진 놈들이 반에 많을수록 좋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확신하기에는 일렀다. 뼈대 있는 가문론의 창시자인 김 여사가 가장 강조하는 덕목 중의 하나가 섣부른 판단으로 촐싹거리는 행동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으니 당분간은 탐색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앉은 계집애는 좀 달랐다. 우선은 누나의 속옷에서나 볼 수 있던 하얀 레이스가 남색 원피스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공책 모서리에 적혀있는 이름조차도 특별했다. 소남초. 말자 춘자처럼 자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고, 복희 숙희하는 희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었으며 영순 금순처럼 순으로 끝나는 이름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나는 이름이었다. 머리 스타일도 남달랐다. 사발을 덮어씌워놓고 눈썹 위를 일자로 가위질한 촌스런 머리가 아니라 앞머리가 한쪽으로 돌아가 꽃모양의 핀에 의해 고정된 게 아주 단정했다. 어쩐지 성적이 만만찮을 것 같은 선입감이 들면서 강한 경계심이 일었다. 황금박쥐로 인해 가졌던 자신감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계집애보다도 못하냐며 윽박지르는 김 여사의 환영만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왔다.

“조용, 조용.”

유도리의 굵은 음성이 교실의 공기를 갈랐다. 탁, 탁. 그의 오른손에 들린 작대기가 왼손바닥에 부딪치며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는 언젠가 그 소리가 우리들의 손바닥에서 보다 크게 메아리를 일으키며 퍼져날 것만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임시반장을 뽑도록 하겠다. 다음에 정식으로 반장선거를 할 때까지만 임시로 하는 것이니 내가 지명한 사람이 그때까지 반장역할을 한다. 소남초, 어디 있나?”

나는 깜짝 놀랐다. 유도리가 어떻게 남초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어디 있는지 물은 걸로 보아서 얼굴은 모르는 것 같은데. 더구나 첫 대면일이 아닌가. 문득 매 학년 학기 초만 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시반장을 뽑을 때마다 선생님들은 이상하리만치 오늘의 유도리처럼 미리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명하곤 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명된 아이들은 정식반장선거에서 아주 압도적으로 당선되곤 했다. 그건 판서를 하느라 등을 돌리고 있어도 뒤에서 누가 장난을 치는지 다 안다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신통력을 미리 배우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초는 심상찮은 아이가 틀림없었다. 남초로 인해 김 여사의 설교가 늘어날 것 같아 불길했다.

“가시나 저거, 4학년 땐가 서울에서 전학 왔다카든데 엄청시리 부자다. 우리 동네 사는데 집이 4층이고 자가용도 있거등. 5학년 때도 반장했다카데. 아부지가 장학사라든가 뭐시라든데 선생님들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카드만.”

황금박쥐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나에게만 알려준다는 듯이 소곤거렸다. 오지랖만 넓은 팔푼이 같은 놈이지만 다방면으로 이용가치가 있어 보여 난 관심을 가지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사이 남초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쳤다. 내 성장의 배경이 되어온 김 여사의 뼈대 있는 가문론을 내팽개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책에는 남자는 여자보다 뒤떨어지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힘으로 제압해서도 안 되며 배려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남초가 제자리에 앉고 나자 유도리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우리 친구 중에 국민교육헌장을 욀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봐라.”

국민교육헌장은 3대7 가르마가 3년 전에 선포했다는 제법 장문의 글이었다. 우리들의 교과서 제일 앞 두 페이지는 무슨 과목이든 어김없이 그 글로 채워져 있었다. 종이 질도 다른 페이지들처럼 누런 똥종이가 아니라 두툼하니 아주 매끄러웠고, 글의 둘레에는 사각형 테두리와 함께 보랏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무궁화 그림이 장식하고 있었다. 제일 아래에는 가르마의 이름이 활자체가 아닌 필기체로 굵게 적혀있었다. 동네어른들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뒤에 꼬박꼬박 각하라는 호칭을 붙였다. 예수님, 부처님과 같이 님도 아니고, 선생님께 편지를 쓸 때 흔히 붙이는 귀하도 아닌 각하라니. 난 그저 아주 위대한 사람이겠거니 미루어 짐작만 했다. 하기야 그토록 위대하니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해 헌장까지 만들지 않았겠는가.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그걸 외우게 했지만 아무 반발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만 국민학생들은 그 의무를 면제받고 있었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누나와 형은 몇 년 동안이나 그걸 중얼거리며 다녔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누나와 형의 반복학습 덕에 저절로 암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거기에는 중학생이 되면 어차피 외게 될 거라며 은근히 선행학습을 부추긴 김 여사가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런 걸 왜 유도리가 입에 올렸을까? 6학년이니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나의 존재가치는 곧바로 확인되었다. 난 웅변대회에서 ‘이 연사 외칩니다!’ 하며 격정적인 발언을 할 때의 동작처럼 주먹 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남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란 황금박쥐는 팔꿈치로 내 허리께를 툭 건드렸다.

“니 정말 다 외울 수 있나? 그거 억수로 길든데.”

유도리도 의외라는 듯이 눈길을 나에게로 모았다.

“응, 너. 이름이 뭐야?”

“이, 재, 동, 입니다.”

난 꼿꼿하게 서서 자신감이 충만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 이름을 말했다. 그건 우리 반에 관심을 보여야 할 아이가 남초 하나뿐이 아님을 알리려는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 막 반장에 임명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남초에게 나 역시 뒤떨어지지 않는 상대임을 인식시키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적어도 성적이 상위권을 다투는 아이라면 그런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분명 그녀의 시선은 내 몸 어딘가에 꽂힌 채 떠나지 않고 있으리라.

“그래, 이재동. 어디 외워봐라.”

외우는 것쯤이야. 난 중이 반야심경을 웅얼거리듯, 신부가 사도신경을 읊듯, 400자에 가까운 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잠깐 동안의 막힘도 없이 한 달음에 술술술 풀어냈다. 워낙 반복을 거듭한 탓에 머리가 아닌 입만으로도 외우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유도리는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잘 했다. 이재동.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정도라면 부반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널 임시부반장에 임명한다. 자 모두들 박수.”

부반장이라는 말에 잠시 얼떨떨했지만 난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마 반장이 남초라는 사실에 자극받은 영향일 것이다. 아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으니 황금박쥐가 넉살좋게 손을 내밀었다.

“와, 고마 놀래삐따. 우짜몬 그걸 다 외울 수 있노? 나는 호근이라 칸다. 우리 짝지, 부반장 된 거 진짜로 축하한데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대의 호의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난 황금박쥐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당혹해할 남초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도리나 남초로부터 관심을 끌겠다던 나의 기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추측컨대 유도리는 국민교육헌장을 계기로 내가 좀 똑똑한 아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 같다. 거기다 글씨 또한 보기 좋게 쓰는 아이란 걸 알면서부터는 부려먹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난 가끔 교무실로 불려가 원고지에 무언가를 베껴 쓰라는 그의 지시를 이행하곤 했다. 원고지 제일 앞장에는 ‘학위 논문’이라 씌어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가 다니는 대학원의 숙제라고 설명했다. 숙제를 대신 시키다니, 그건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척척척 해야 한다던 그의 말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다. 스스로도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던지 즉각 변명도 늘어놓았는데 그조차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의 필체가 워낙에 악필이라 무슨 아라비아 문자 같아서 남들이 도저히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국민학생이라고 무시해도 그렇지 그렇게 둘러대면 믿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 말에 나는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입속으로 되씹곤 했다. 그렇다면 아라비아라는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조차 모르는 내가 별 어려움 없이 당신의 글씨를 해독할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이냐고. 말이야 바른 말로 논문이란 게 대부분 책 내용을 그대로 옮겨 붙인 것이지만, 극히 일부나마 자신이 직접 손으로 써준 것을 베끼는 경우도 간혹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판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도리가 칠판에 쓰는 한글을 한자의 초서체처럼 여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악필이란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려는 얄팍한 수작이고, 게으름을 숨기기 위한 핑계이며, 갑질을 정당화하려는 도구였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일들이 천금 같은 일요일에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파릇파릇한 새싹이 아닌가. 그건 하루 대여섯 시간의 수업에다, 한 번씩 치러야하는 일제고사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정해진 학사일정만으로도 공부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위기의 남자라는 뜻이다. 그나마 생명을 부지하고 사는 건 일요일 하루 때문인데 그런 일요일을 고스란히 뺏겨야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그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 반 아이들의 성적을 계산하고 기록하는 일까지 나에게 떠넘기기에 이르렀다. 이거야말로 착취를 넘어 숫제 선생님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비윤리적 행위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성적정리 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혼자서 일요일의 교무실을 지키고 있던 유도리는 내가 도착해 인사하자 지나치게 반가운 기색을 내보였다.

“어서 와라 재동아. 휴일인데 나오라고 해서 미안해. 대신 다음에 선생님이 맛있는 것 많이 사 줄게.”

미안하다는 말에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맛있는 것이면 모든 불만이 잠재워지리라는 그의 단순한 사고에서 유치함만 느꼈을 뿐이다. 난 솟구치는 불만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도리는 내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얼마 전에 치렀던 일제고사 성적일람표를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반 아이들 하나하나의 과목별 성적이 기록되어있었다. 내가 할 일은 총점과 평균, 석차를 구해 기입하는 것이었다. 총점과 평균이야 덧셈과 나눗셈만 할 줄 알면 되는 일, 그깟 것쯤 일도 아니었다. 나름 전문기술이 필요하다는 석차마저도 아이들 수만큼 쪽지를 만들고 거기에 각자의 총점을 적은 후 그걸 순서대로 배열하면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간단히 작업을 끝낸 나는 즉시 결과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내 성적이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성적이라는 개인의 아주 은밀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유자재로 접근할 수 있다는 그 점이야말로 성적정리를 맡은 나만의 특혜였다. 그 맛마저 없다면 유도리의 무임금노동을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난 5등이었다. 5학년 때까지 줄곧 3등 이내를 유지해왔건만 김 여사가 자나 깨나 기대하고 고대하던 1등을 놓친 것도 모자라 5등이라니 다분히 충격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김 여사의 닦달을 감당해낼 일이 아득했다. 1등은 남초의 몫이었다. 놀라운 건 멍청할 거라 생각했던 황금박쥐가 근소한 차로 2등이라는 점이었다. 난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그걸 유도리에게 넘겼다.

“재동이는 몇 등이야? 5등이구나. 시험 좀 잘 보지 그랬어? 그나저나 오늘 고생 많이 했어.”

자신이 짐 지운 노동을 슬쩍 눙치려는 유도리다운 엉큼한 의도가 엿보였다. 난 모른 척 머리만 긁적였다. 우린 함께 귀갓길에 올랐다. 버스정류장이 빤히 보일 즈음 나는 서둘러 유도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성적표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질 김 여사의 빨래방망이 공세를 막아낼 방패의 준비가 시급했던 것이다.

“선생님, 안녕히 가시이소.”

유도리는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웬일인지 허둥대는 기색이 뚜렷했다.

“응, 그래. 내일 학교에서 보자. 잘 가.”

그의 말투에서는 나를 빨리 떼어내고 싶어 하는 느낌이 강하게 배어있었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불편하듯 그 또한 학교 밖에서는 곁에 있는 내가 불편한 것일까? 그러자 한시라도 빨리 그의 곁에서 멀어지려던 욕망이 사라지고 배신감이 그 자리를 메워왔다. 금쪽같은 일요일을 하루 종일 봉사했건만 그 대가가 고작 이런 푸대접이라니. 삼십여 미터를 지나친 나는 분풀이삼아 주먹감자라도 먹일 요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도리는 정류소에 그대로 서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웬 여자가 한 명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핏 보아 유도리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으며 얼굴과 차림새에서 지적인 이미지가 넘쳐나는 게 부인이거나 동료선생님이 아닐까 여겨졌다. 두 사람의 입가에서 연신 웃음이 번지는 걸로 보아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선거는 예상대로 3대7 가르마의 승리로 끝났다. 자신의 얼굴 옆에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다소 소름끼치는 글을 써놓으며 기염을 토했던 빵집선생님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동네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낮 막걸리 주전자를 옆에 끼고 사는 옆집아저씨는 고무신과 막걸리가 생기는 국회의원선거가 좀 있으면 또 치러지니 얼마나 좋으냐며 웃음을 실실 흘리면서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그런 가운데 동네사람들에게 관공서에 내야 할 서류들의 작성을 도와주곤 하던 순이네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가끔 탄식이 흘러나왔다. 삼선개헌이라는 반칙이 선거에 동원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말이면서도 외래어 같기만 한 그 단어는 한동안 또 동네를 떠돌며 이런저런 말들을 낳았다.

생각해보니 우리 반 반장선거도 비슷했다. 정식선거에서 나는 의도와 무관하게 반장에 입후보하게 되었다. 황금박쥐가 나를 후보자로 추천했던 것이다. 남초와 나의 2파전으로 선거는 치러졌고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거수투표에서 난 압도적으로 반장에 당선되었다. 자연스레 부반장은 남초에게 돌아갔다. 선거가 이뤄진 날 유도리가 따로 나를 불렀다. 그는 나에게 반장 대신 부반장을 맡는 게 어떠냐면서 분단장까지 겸하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반장 = 부반장 + 분단장’이라는 새로운 셈법을 과외를 통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개똥이 숙성되면 된장으로 둔갑한다 해도 선생님의 말이라면 믿어야한다는 김 여사의 개똥철학을 철저하게 받들고 따라야했던 나로서 그걸 거절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삼선개헌이란 의미는 유도리의 그 새로운 계산법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코앞이었지만 나는 깊은 시름에 빠져있었다. 이미 여러 가지 사건으로 십대로서는 가혹할 정도로 인생무상을 체험한데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가 삶의 회의로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그렇게 심한 시련을 겪고 있는 와중에 밥맛마저 잃게 만드는 일이 생겨났다. 유도리가 나를 불러 예의 논문사역을 시킨 것이다.

“이재동. 이번 일요일 논문 작성할 게 있는데 학교에 나와 좀 도와주지 않을래?”

유도리의 말은 부탁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부정한 일을 행하는데 대한 선생님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그렇게 위장한 것일 뿐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시험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논문을 대신 옮겨 써달라는 유도리가 난 야속하기만 했다. 차라리 이럴 때 비상계엄령이라도 확 선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동네에는 3대7 가르마가 대통령선거에는 이겼지만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진 거나 다름없어 그것을 곧 선포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되면 학교도 문을 닫게 될 거라고 했다. 기말고사와 유도리의 강제노동 두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수로 그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날부터 난 기도하는 심정으로 라디오에서 정각을 알리는 땡 소리가 날 때마다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예수각하 부처각하라고 부르지 않아서일까? 일요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던 비상계엄령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별수 없이 수당도 없는 휴일근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일요일 아침 우울한 기분으로 학교를 찾았다. 교무실에 도착하자 그날따라 다소 의아한 일이 벌어져있었다. 남초가 유도리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 재동이 왔니? 남초는 내가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불렀어. 오늘은 친구도 있으니 덜 심심하겠지?”

유도리의 약간 상기한 얼굴색과 불필요한 설명은, 학용품이 필요하다며 김 여사를 속여 돈을 타낸 후 딱지를 샀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 김 여사 앞에서 쓸데없이 친구로부터 얻은 딱지 운운 하며 횡설수설하다 오히려 모든 게 들통나버리고 말았으니까. 그의 태도는 남초의 신분과 맞물려 나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초는 일요일 등교를 강요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건 한 학기 동안 유도리가 남초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초를 옥이야 금이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서 황금박쥐는, 귀신 잡는 해병대처럼 선생님 잡는 장학사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며 삐죽거리곤 했다. 더 이상한 건 그날 남초에게 시킨 일이 등사작업이라는 점이었다. 급사들에게나 시키던 그 단순한 일을 반에서 1등 하는 부잣집 아이에게, 그것도 시험을 며칠 남기지 않은 일요일에 불러내어 시키다니. 그런들 나로서는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깔 뿐 이러쿵저러쿵 떠들 입장이 못 되었다. 하기야 내가 맡은 일도 책을 베끼는 작업이니 등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남초의 일이나 내 일이나 별달리 차이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유도리는 남초에게 교무실 출입구 바로 오른편에 위치해 있는 등사실로 가서 등사판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남초가 등사판을 가져오자 그는 시범을 보이며 등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남초와 나는 서로 다른 베끼기를 하며 기고 까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이나 지났을까? 뱃속 귀신이 마구 휘파람을 불 때쯤 한 아줌마가 교무실로 들어섰다. 보랏빛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게 왠지 아줌마라 칭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햇볕에 잔뜩 그을린 얼굴에 마구 지져놓은 파마머리에다 몸빼 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 아줌마가 아닌가. 여사라는 단어도 내가 김 여사에게 늘 붙이던 호칭이었던 만큼 천박해보였다. 나의 부족한 낱말실력으로 기껏 찾아낸 단어는 여인이었다. 여인의 얼굴은 쳐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그대로 반사될 것처럼 윤기가 가득했다. 양쪽 귀에는 십자무늬 귀걸이가 대롱거렸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참 머리가 눈썹근처까지 가지런히 흘러내려와 있었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수냄새도 맡아졌다. 누굴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유도리가 스프링 달린 의자에 앉았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튀어나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놀람에서라기보다는 격한 반가움에서 무의식중에 나타난 동작이었다.

“아니, 여길 어떻게…….”

눈이 왕방울만큼 커진 남초는 아예 여인을 얼싸안으며 좋아라했다.

“엄마…….”

“남초에게 들으니 일요일인데도 고생하신다기에 점심을 좀 사왔어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남초 어머니는 얼굴가득 웃음을 띠며 준비해온 도시락을 풀어놓았다. 4단 찬합은 잔칫상을 방불케 했다. 갈비와 동그랑땡에 잡채며 장조림, 각종 전에 과일까지. 남초네는 집이 4층 건물이라더니 먹는 것도 4층이라야 직성이 풀리는 집안이었나 보다. 밥상을 차리는 그녀의 손등 위에서 화상자국 같은 동전만한 크기의 흉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버지와 부부싸움을 하다 날아오는 주전자 뚜껑에 맞아 찢어진 김 여사의 팔뚝상처와는 모양과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김 여사의 것이 지렁이를 연상케 한다면 그것은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낙원의 섬처럼 보였다. 어쩜 같은 흉터라도 느낌이 이렇게 다른지. 흉터도 아줌마냐 여인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학부형이 일요일에 선생님의 점심까지 싸서 대령한다는 사실이 보통 일은 아니지만 난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식도락에만 집중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릇은 나의 먹성에 힘입어 금세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비워졌다. 포만감에 젖어 행복해하며 창밖을 바라볼 때였다. 운동장에서는 유도리와 남초 어머니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낯설지가 않았다.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비집고 솟아올랐다. 처음으로 유도리의 성적정리 노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정류소에서 보았던 여인, 유도리와 함께 수줍은 미소를 짓고 서 있던 그 여인. 그녀가 바로 남초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 몸속에서 유도리와 남초 어머니 사이의 비밀을 한 가지 알게 된 듯한 묘한 쾌감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다시 기고 까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작업을 마친 건 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통신문을 등사하던 남초의 작업도 끝났다. 우리는 작업이 끝났음을 유도리에게 보고했고, 그는 결과물들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였다.

“자, 오늘 둘 다 수고 많았어. 남초는 등사판 다시 등사실로 갖다놓고 와.”

남초가 등사실의 전등을 켰는지 유리창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넘치기 일보직전의 오줌보를 비워내기 위해 난 화장실로 향했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교무실로 돌아오는데 등사실의 불이 그때까지 켜져 있었다. 사치와 낭비의 동물이 여자라더니. 난 에너지절약을 몸소 실천해보이려 등사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남초는 아직 거기 남아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마술사 흉내를 냈다. 손이 한 차례 치마 속을 오가는가 싶더니 쥐고 있던 무언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야, 뭐 하노? 나는 니가 불 켜놓고 간 줄 알았다아이가.”

“응, 그래……. 이제 갈려고. 가자, 가…….”

마술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남초는 심하게 말까지 더듬었다. 친구들과 구슬을 건 섰다판에서 화투 한 장을 숨겨두었다가 들켰을 때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만회를 하고 싶었을까? 이번에는 그녀가 자정이 다가왔을 때의 신데렐라를 연기하는 듯 총알같이 등사실 문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관객의 아량을 베푸는 차원에서 난 유리 구두를 찾는 시늉을 했다. 구두 대신 발자국이 곳곳에 어른거렸다. 무엇보다도 주변에 놓여있던 칼같이 정돈된 인쇄물들의 가장 윗부분이 조금씩 흐트러져있는 것이 수상했다. 수사반장의 열혈시청자인 내가 그것을 놓칠 까닭이 없었다. 최불암의 눈으로 인쇄물의 정체를 살폈다. 놀랍게도 그건 우리가 며칠 후면 치를 기말고사시험지였다. 국어 산수 사회 세과목의 시험지가 그 언젠가 집 앞 상점에서 주인 몰래 슬쩍했던 초콜릿처럼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귀에서는 김 여사의 공부해라 잔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런 김 여사를 한 방에 잠재울 욕심으로 난 시험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방금 화장실에 다녀왔음에도 소변이 바짝 마려왔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내 손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 채 몇 분이 지날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등사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네축구시합에서 상대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선 절호의 찬스를 똥 볼로 날려버린 안타까움이 계속 되살아났다. 남초가 어설픈 마술을 부린 것이 그 시험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건 유도리 곁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남초와 함께 귀가할 때였다. 내 수사결과를 발표해야하는지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수사요원들이 즐겨 쓰던 말처럼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술을 부렸던 물건을 찾은 것도 아니고 유리 구두에서 지문을 채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양심과 욕심, 소유와 포기의 갈림길에서 갈등을 겪다 나와 마주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대로 헤어진다면 진실은 영원히 묻히고 말 것이었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된 나로서 끓어오르는 진실규명의 목소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남초야, 니 아까 등사실에서 기말고사시험지 있는 거 못 봤나? 세 과목이나 있던데. 얼마나 놀랬던지 나는 지금까지도 벌벌 떨린다, 고마.”

난 정공법이라는 구닥다리 전술보다 심리전이라는 초현대식 전술을 구사했다.

“아, 그거? 글쎄……. 보긴 했어……. 그런데 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그냥 나와 버렸지 뭐…….”

시험지를 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건 내 의심이 합리적이라는 말이었다.

“니 그때 뭐 막 쑤시넣던데 그거 시험지 맞제?”

이번에는 느슨히 풀었던 줄을 조금 당겨 압박해보았다. 세상 모든 남녀관계가 밀당이라던 누나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물론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걸 잘 아는 누나조차 쌀집 형과의 관계에서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썼다가 지우는 일만 되풀이할 뿐 좀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남녀관계에 있어 애송이인 나로서는 믿을 구석이라고 그것밖에 없었다.

“뭘 훔쳤다고 그래? 생사람 잡지 마. 자, 어디 살펴봐. 있나 없나.”

남초는 아래 윗옷의 주머니를 까뒤집는 몸동작을 취하면서 시치미를 잡아뗐다. 그 말에 다 큰 처녀를 앞에 두고 아이스케키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누나의 다른 가르침이 떠올랐다. 여자의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것. 그렇다면 주머니를 조사해보라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야말로 시험지를 벌써 안전한 장소로 옮겨놓았음을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난 다시 줄을 풀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라지 말고 나도 좀 보이도. 다른 아아들한테는 비밀로 하께. 고마 상부상조하자.”

상부상조라는 회유책에 남초는 흔들렸다. 누나의 밀당론과 긍부정론이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생활에도 적용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그녀는 인적이 뜸한 곳에 이르자 작은 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국어시험지였다.

“오해는 하지 마. 내가 빼낸 건 그것뿐이니까. 시험지를 발견하는 순간 너무 놀란 데다 너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도망치기 바빴거든. 대신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해. 그리고 그거 베끼고 나서는 내일 나에게 돌려주고.”

이제는 남초까지 나에게 베끼기를 시키고 있었다. 이러다가 나의 몸 자체가 누군가의 몸을 베껴 복제인간으로 생활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아울러 내 의심은 제거되기는커녕 한층 부피를 키워갔다. 정말 그녀는 국어 시험지만 훔쳤을까?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국어 한 과목이나마 시험공부를 안 해도 되니 그게 어딘가.

“알았다, 그라께. 고맙데이.”

남초가 저녁 땅거미 속으로 멀어져갔다. 그렇게 나는 남초와 공범이 되었다.

기말고사 성적정리에도 유도리는 나를 끌어들였다. 난 노예해방의 날이 머지않았다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요일인 그날도 성실하게 그의 지령을 수행했다. 이미 숙달된 조교의 지위에 올라선 만큼 작업은 별 어렵지 않게 끝났다. 결과는 나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신성불가침이던 1등의 자리에 황금박쥐가 올라있었다. 남초가 2등이었고 난 국어만점의 영향으로 한 단계 뛰어올라 4등을 차지했다. 눈여겨볼 건 남초가 국어와 산수, 사회 세 과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난 공범이면서도 들러리행세만 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흐뭇했다. 그건 내 성적이 한 단계 뛰어올라 김 여사의 날선 꾸지람과 회초리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라기보다, 황금박쥐의 수훈으로 남초가 왕좌를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 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난 황금박쥐를 축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도리로부터 부여받은 특수임무는 중앙정보부의 간첩소탕작전만큼이나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역시 둘러치는 방법이 제격이었다.

“어이, 황금박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이번에 혹시 일등 한 거 아이가? 일등 했는데도 그냥 넘어가면 가만 안 둔데이.”

들떠 있어야 할 황금박쥐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성적표를 내밀어 보이는 그의 손에서 아쉬움이 번져났다.

“안 그래도 뿔따구나 죽겠구만 니는 내를 놀리나? 가시나 저거 참말 강적이데이. 암만 열심히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아이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의 성적표에는 분명히 2등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마술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내 성적표도 이상했다. 4등이어야 할 석차가 3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몇 번을 새로 보아도 눈을 씻고 쳐다보아도 변하지 않는 숫자들은, 마술이란 그저 눈속임일 뿐이라는 나의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유도리라는 말에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누가 봐도 외골수인 형을 두고 아버지는 늘 그 말을 자주 썼다.

“이놈아, 유도리가 있어야지. 넌 어찌 그리 꽉 막혔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도리가 유도리를 부린 것일까? 그렇다면 난 또 아버지 말대로 유도리를 부려 유도리의 유도리를 모른 체 눈 감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성적표를 받고 기뻐할 김 여사의 표정이 그려졌다. 내 어깨가 우쭐거리며 쑤욱 올라갔다.

세월은 황금박쥐를 더욱 황금박쥐답게 만들어놓았다. 이전에는 이마와 얼굴윤곽만 닮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사라진 머리카락과 넓어진 잇새가 캐릭터를 3D 프린터로 출력해놓았다는 착각을 하게끔 했다. 덕분에 어색할 뻔했던 분위기는 깨끗이 사라졌고 내 문상목적이었던 남초의 소식을 묻는 일도 한결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그래, 와 안 물어보노 싶었다. 가시나 그거, 죽었다아이가. 대학을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그때 전후로 집안에 무슨 큰일이 있었는갑드라.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 가시나는 마약에 손을 댔다가 미치삐따카데. 그래 공부도 포기하고 들어와서는 정신병원 전전하다가 몇 년 뒤에 그리 됐다는 소문이 있드마는. 아까븐 아아다, 공부도 잘했는데 그자?”

기억 속에 뚜렷이 살아있는 친구의 부재 소식에 슬픔인지 무언지 모를 야릇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절제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복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유도리의 미망인이었다. 이상하게 안면이 많은 얼굴이었다.

“제자들이라고 들었는데 어려운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자, 제 술이라도 한잔씩 받으세요.”

할머니가 건네는 술을 받으려 잔을 들었다. 그때 할머니의 손등에서 화상흉터가 소매를 비집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 그건 낙원의 섬이었다. 난 그걸 바라보며 남초의 짧은 생을 추도하는 기분으로 단숨에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이전 01화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