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을 터널삼아 열차가 지나갔다. 레일이 아닌 자갈길을 달리고 있었다. 거대한 굉음과 엄청난 진동이 잠시 멀어지나 싶다가도 금방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아 롤러코스터처럼 일정한 코스를 순환해 달리는 모양이었다. 간에서 분해되지 않은 알코올 기운이 기억들을 마구 가위질한 날이면 으레 되풀이되는 증상이었다. 고통을 무릅쓰며 잘려나간 파편들을 습관처럼 찾아 헤맸다. 몇 시간째 이어지는 노력에도 머릿속 화선지는 첫날밤을 보낸 신방의 창호지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여관방을 벗어나 택시를 잡아탔다. 가로수들이 휙휙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회색빛 구름이 망각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하는 수 없이 타임라인을 기준으로 순도 높은 기억들만 일렬종대로 정렬시켰다. 세단기를 통과한 문서 파편들을 모아 복원시키는 심정이었다. 어젯밤의 윤곽이 어렴풋이 듬성듬성한 모자이크 형태로 나타났다.
미숙이 인도한 식당은 여러모로 어수선했다. 가용면적에 비해 턱없이 많이 배치된 테이블들이 무질서하게 따닥따닥 붙어 앉았고, 종업원들은 그저 일머리 없는 샐러리맨처럼 꼬불꼬불한 통로를 바쁘게만 쫓아다녔다. 용적률을 높여 한탕 하려는 부동산업자들의 투기심리 만큼이나 주인의 장삿속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래도 나름 꽤 유명한 식당인지 우린 삼십 분 가까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빈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매사 이유 없는 손해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숙은 기다린 시간에도 가차 없이 손익계산서를 들이대며 초음속의 속도로 주문서를 날렸다. 물과 컵을 준비해 온 종업원이 보조를 맞추어 주방과 카운터를 향해 ‘아둘 소하나’(아귀찜 이인분과 소주 한 병을 뜻하는 말)로 주문을 번역해 외쳤다. 이어서 피자에 토핑을 추가하듯 ‘매운 맛’이라는 별도의 맛 주문이 미숙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 모든 일은 내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에 일어났다. 난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들먹이며, 매운 맛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미각이 아니라 촉각으로써 맛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알쓸신잡의 티를 내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잰 체하며 퉁바리를 놓으면 잠시 웃음이야 끌어낼 수 있겠지만, 매운 맛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과거가 호시탐탐 소환될 타이밍을 노리고 있어서 그 대비가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벤자민버튼 신드롬이라고나 할까? 최근 들어 나에게는 그와 같은 일종의 과거회귀본능이 유달리 심해지고 있었다. 곤혹스러운 건 미숙을 만날 때만 증상이 발현된다는 점이었다.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은폐하기 위해 전두엽을 통해 자동적으로 진돗개가 발령되었다. 무의식이 의식에 앞서 처리되는 인간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워치콘이나 데프콘이 발령되어도 완전한 위장은 어려울 것 같았다.
테이블 귀퉁이에서 빈 소주병이 늘어갔다. 세 번째 병이 바닥을 보일 즈음이었다. 미숙의 레이저조준기가 오랜 시간 나의 얼굴에 붉은 점을 찍고 있었다. 난 사거리(射距離)에서 벗어나려 괜히 술잔을 집어 올렸다. 술잔은 입술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도중에 미숙의 손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움직이면 쏜다는 엄포가 전광판의 글귀로 바뀌어 그녀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오빠, 잠깐만. 생각나? 군대 있을 때 내가 면회 갔던 날.”
군대, 면회. 한결 차가운 어감의 어휘들이 그날의 추위를 고스란히 몰고 왔다. 체온이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었다.
“기억하지, 그럼. 아마 눈이 많이 왔었지?”
“맞아. 다음날은 훨씬 많이 내렸어. 혼자 돌아오는데 얼마나 눈이 쏟아지던지 무섭기까지 하던 걸. 어쩌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내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있는 거 있지? 마치 나라는 존재가 그 자리에 아예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정상체온을 회복하기 위해 난 미숙의 손을 뿌리치며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저체온으로 죽든 총에 맞아 죽든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오빠, 그날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나, 그거 꼭 물어보고 싶더라.”
만날 때마다 삼배통대도(三盃通大道)에 일두합자연(一斗合自然)(출처 : 이태백의 독작(獨酌))을 그토록 외쳐댔건만 그 시절을 깡그리 잊었단 말인가. 별안간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일었다. 대답하는 입술 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달리 뭐가 있었겠어? 널 보니 좋았고, 그간 술에 굶주렸고, 거기다 오랜만에 하루 외박이라는 자유가 주어졌으니 그리 된 거지.”
“세월이 이만큼 지났으니 이제 좀 솔직해져도 될 것 같은데……. 뭔가 심각한 말을 하려 했던 거 아냐?”
그녀의 질문은 류현진의 컷 패스트볼만큼이나 대처가 어려웠다. 왜 심각해야했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부쩍 느껴지는 노화로 인한 기억력 상실 때문인지, 서로가 간직한 기억의 밀도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심각한’이라는 형용사를 내가 잘못 해석한 때문인지. 아웃이 되는 한이 있어도 루킹 삼진만은 피하자며 배트를 힘차게 휘둘렀다.
“심각한 말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신선한 공기가 이해에 도움을 줄까 싶어 난 옆쪽 벽에 붙은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밖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파도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해변 한 모퉁이에서 강태공의 손전지불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둥둥 떠다녔다. 투명한 가림막이라도 쳐진 것처럼 환기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헤어지자 말하고 싶었잖아. 그렇지? 막무가내로 술에 취한 것도 그 때문이고.”
그녀가 면회 왔던 날, 내가 술에 취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날따라 이상하리만치 내 사전에는 피동형의 동사만 가득 들어있었다. 난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에 먹힌 것이었고, 잠을 잔 게 아니라 잠든 것이었으며, 다음날의 부대복귀도 돌아간 것이 아니라 쫓겨 간 것이었다. 또 우리 관계가 그 면회를 계기로 어긋난 것도 확실했다. 그날 이후 미숙으로부터 단 한 장의 편지도, 단 한 줄의 연락도 받지 못했으니까. 잘못이라면 그녀의 변화에 대한 원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내가 쉽게 굴복하고 수용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지만 거기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심어주고 그 사랑을 끝내 쟁취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수 없는 군인이라는 현실적 여건, 그동안의 궁핍한 생활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결여, 그 두 가지라면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지 않을까? 그걸 알지 못하는 그녀는 나를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어들여 십자가를 지우려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모든 걸 상세하게 설명할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웃기지 마.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고무신 갈아 신은 건 너잖아.”
변호를 한다는 게 기껏 속된 군대용어를 갖다 붙인 것이 전부였다. 보낸 것이 아니라 떠난 것이라는 다소 고상한 말이 곧 생각났지만 말끝은 이미 빌라도의 고막을 통과한 뒤였다. 그나마 쉽게 이해시켰으리라는 자기위안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하지만 미숙의 다음 말은 내 항변이 이미 설득력을 상실했음을 일깨워주었다.
“아냐. 분명히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난 계속 눈치 없이 까불었던 것 같아. 바보같이 뒷날 돌아오는 길에서야 깨닫게 되더라고. 이해는 해. 오빠가 내 첫 남자가 아니었다는 걸 입대전날 벌써 알았을 테니까.”
입대전날 훈련소 근처에서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낸 여관방의 천장벽지는 유난히 쥐 오줌으로 얼룩얼룩했었다. 그 원인을 설명이라도 하듯 쥐들은 밤새 천장에서 운동회를 벌였다. 덕분에 우리는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 많은 아이들이 자라듯, 서생원들 또한 인구증가에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겠냐며 킥킥거리기도 했다. 그날 난 이불자락을 들쳐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그건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든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다른 것’이라든가, ‘성 해방’을 주장하는 부류라서가 아니라, 애당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첫 남자’의 의미도 미숙의 말에 내포된 신성(神聖)이나 신비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만나기 이전에 만나던 남자가 있었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단순한 기준에 불과했다. 비뚤어진 입에서 절대로 바른 말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미숙은 증명하고 있었다.
“오해야, 그건. 면회 왔던 날은 그냥 취했던 거야. 입대전날 밤도 그래. 멀리 집결지까지 동행해준 네가 고마웠을 뿐이야. 자, 자, 그만 관두자. 지금 와서 그런 걸 따진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속마음을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납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가만있자니 그녀의 말을 수긍하는 꼴이고, 강하게 부정하자니 그건 또 다른 아픔을 부르는 행위였다. 난 그저 더 이상의 안타까움을 끊어내려고만 했다.
“확실해. 그날 한 방에 머물면서도 나를 피하기만 한 게 증거야. 오빠가 멀게만 느껴지던 그 거리감에 내가 얼마나 서글펐는지 알아? 결국 임신 중이었던 난 낙태를 포기했고 혼전출산으로 쫓기듯 그 남자랑 결혼한 거란 말이야.”
미숙은 출산의 비밀까지 공개하며 내가 유죄임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새로운 증언에 난 하염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고는 묵비권밖에 없었다. 체념이 이어졌다. 다만 미숙이 떠난 이유가 밝혀진 점, 내 아이는 아니어도 한 생명을 구했다는 점만이 잔잔한 위로로 다가왔다. 그녀의 태도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증거법정주의를 채택하는 이 나라의 재판정에서 자신의 증언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걸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술잔을 들어 올리는데 가속도가 붙어갔다.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섣부른 결정에 대한 자책과 후회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우린 엉망으로 취했고 기억은 거기서 단절되어있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진동이 가슴께로 옮겨왔다. 진원은 안주머니 속 휴대폰이었다. 켜보니 상단 상태표시줄에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듯 말풍선이 걸려있었다. 난 그 끄트머리의 줄을 잽싸게 낚아챘다.
‘동기 박인규 금일 오전 두 시경 달마산 등산 중 사망. 빈소 원곡시 제일병원 장례식장. 장지 원곡공원묘지. 발인 5월 10일.’
머릿속의 모든 데이터가 깨끗이 비워졌다. 삭제하겠냐는 한 마디 경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나의 행선지가 인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난 스스로 느낄 정도로 허둥거렸다. 혹시라도 요금을 떼일세라 걱정이 되었던지 운전수는 이따금 전방주시의무에 소홀하면서 백미러를 통해 흘낏흘낏 내 표정을 살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돈을 건네는 나를 향해 몇 차례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현철은 악수를 하기도 전에 서둘러 문자에 관한 물음표부터 찍어댔다.
“너도 동창회로부터 문자 받았지?”
현철과 인규,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자장면의 단무지와 양파, 춘장과도 같은 사이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중화식당은 그리 오래 유지되질 못했다. 서로 다른 대학으로 나뉘어 입학하면서 소원해진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불문율처럼 되어있던 이말삼초(二末三初)의 군 입대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사회생활과의 차단을 전제로 구축되는 군 생활이 관계의 훼손을 가속화시키는 기폭제역할을 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급기야 전역 후 대학졸업과 취업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식당은 거의 폐업 위기에 직면했다. 그나마 지인의 경조사자리에서 얻어듣는 풍문으로 생사 정도만 확인하면서 지낼 뿐이었다. 그러다 삼십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어떤 모임자리에서 난 우연히 현철을 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인사조차 생략한 채 골목식당을 유명 맛집으로 변화시켜 연일 상한가를 치는 TV프로그램의 연출자를 자처하며 확장개업을 주창했다. 인규와는 계속 연락이 닿았던지 며칠 전엔 언행일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재개업축하연을 열자며 셋이 만나자는 약속을 정해왔다. 그게 오늘이었다.
“지금 받긴 했는데 워낙 어이가 없어서……. 야, 너 어디 연락 해볼 만한 데 없어? 가족들 전화번호 몰라?”
“막 연락해 알아봤어. 산 정상 근처에서 쓰러져있는 것을 새벽에 등산객이 발견했대. 경찰이 사체를 수습했고. 음주를 한 상태에서 실족한 것 같다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정상에서 이미 인규를 찾은 현철은 서서히 냉정을 회복하며 하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금방 도착한 나는 숨가빠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빨리 그의 모습을 보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지만 말을 아끼려는 듯한 현철의 뉘앙스에도 그런 면이 엿보였다.
“혼자서 산행을 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려. 등산이라고는 좀체 하지 않는 녀석이었거든. 그것도 밤중에 갔다니까 더 이상할밖에.”
“그럼 뭐야? 누가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님 자살이라도? 원한관계나 치정 같은 뭐 그런 문제라도 있었어? 부부관계는 괜찮았고?”
속물근성이 호기심에 더해지면서 상승효과를 내는 바람에 나는 거침없이 속사포의 방아쇠를 당겨댔다.
“문제는 무슨? 제 주변관리에 얼마나 철저한 놈이었다고. 마누라에 대한 신뢰도 특별했어. 세상에 그런 여자 없다면서.”
“그럼 미심쩍을 것도 없잖아.”
“글쎄 또 모르지. 지난번에 만났을 때 한참 돈 많은 과부 타령해쌓더니 그새 또 불륜에 얽혔는지도. 막말로 엊저녁에 묻지 마 산행을 안했다는 보장도 없잖아. 허허허.”
현철은 쓴 웃음을 지으며 농지거리로 응사했다. 그가 난사한 총탄 여러 발 가운데 불륜이라는 놈이 마치 조준사격을 한 것처럼 나의 가슴에 정확하게 와서 꽂혔다. 음지에서나 번식하는 그 단어는 파문을 일으키다 어제 만난 미숙의 얼굴을 깊게 새겨놓고 사라져갔다. 이혼으로 혼자된 지 오래인 나야 아니라 쳐도 아직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미숙의 사정을 고려하면 우리 관계야말로 그렇게 입방아를 찧어댄들 특별히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을 떨쳐버리려 끓어오른 가래를 캭 돋우어 멀리 뱉어냈다. 공교롭게도 가래는 부는 바람을 타고 내 바짓가랑이로 떨어졌다.
군대시절 이후 내가 미숙을 처음으로 다시 만난 건 협력사 방문을 위해 원곡으로 출장을 왔던 날이었다. 약속시간까지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내 눈에 세 가닥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텔표지가 들어왔다. 낮 시간의 붉은 그 표지는 선정적이다 못해 도발적이었다. 누군 빨간 매니큐어만 봐도 호스티스를 떠올린다더니 그와 내가 무엇이 다를까? 실상 그것은 목욕탕이었다. 도색잡지를 압수당한 나는 슬며시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다. 돈을 지불하고 사물함 열쇠를 받을 때였다. 카운터 아주머니의 눈이 내 몸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좀 전에 빼앗긴 잡지의 벌거벗은 모델이 된 듯 거북살스러움을 참지 못해 난 얼른 몸을 돌렸다. 그때 화살 하나가 날아와 사정없이 등에 꽂혔다.
“저……. 김기식씨 아니세요?”
그녀는 음절마다 기역이 들어가는 내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마침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햇살이 난무해 눈이 부셨던 난 그녀를 역광이 빚어낸 실루엣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기시감이라 여겼더니 그것이 안면이었다는 확신이 든 건 이리저리 손차양을 하며 고개를 몇 차례나 내저은 뒤였다.
“맞네, 기식이 오빠. 오빠, 나야 미숙이.”
온천표시는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세렌디피티를 기대하며 사라가 헌책방에 내다판 ‘콜레라시대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더 먼저 다가왔다. 우리를 서로 끌어당기던 인력은 세월의 풍화로 그만큼 약화되어있었다. 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저녁 미숙과 나는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즐겨듣던 음악과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술버릇을 화제 삼으면서 쉽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난 대과학자인 뉴턴을 의심한 게 시건방진 행동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콜레라 시대의 아리사는 한 여자를 51년 9개월 4일간이나 기다린 끝에 힘들게 얻은 자신의 사랑을 대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실패한 결혼, 고독한 중년으로 대변되는 나의 현재 삶이 내 입을 통해 새어나왔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그렇다면 해보고 후회하자는 건 결혼뿐 아니라 이혼에도 해당된다며 유머답지 않은 유머를 늘어놓기도 했다. 한번 트인 말문은 치부라 할 수 있는 내 과거의 단면들을 여과 없이 낱낱이 표출시켰다. 거기에는 아리사에 자극받은 내가 옛사랑의 불씨를 지펴낼 불쏘시개로 미숙의 동정심을 이용하려는 용의주도함이 없잖아 숨어있었다.
자아비판은 전염성이 강했다. 미숙은 기껏 진창길을 걸어왔더니 도달한 곳은 수렁이더라는 한마디로 전업주부에서 목욕탕 카운터로 변신한 사연을 설명했다. 실직한 남편에 대한 원망도 빼놓지 않았다. 어느 가정이고 간에 부부생활을 악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하는 건 가난의 몫이었다. 벌써 은혼식을 치렀을 법한 그들의 결혼생활에 균열의 조짐이 어른거렸다. 이혼조차 해보고 후회하자 말했던 걸 후회하면서도 그 후회가 내 진심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우리 둘의 관계는 그때를 발판삼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우린 함께 밥을 먹는 횟수를 늘리는 동반성장(同飯成長)을 통해 서로의 처지를 더불어 개선해보려는 동반성장(同伴成長)을 꾀했다. 이후 원곡으로의 출장은 그녀를 만나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고 만남은 2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농담이라도 그렇지. 그게 죽은 친구 앞에서 할 소리니?”
바지의 가래침을 닦아내며 난 퉁명스럽게 현철에게 핀잔을 놓았다.
“그렇지? 죽은 놈 두고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 그나저나 너와 오늘 만나기로 했다니까 엄청 반가워했었어. 너랑은 할 말도 많다면서. 그랬는데 하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총탄이 박힌 곳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지혈을 위해 붕대를 칭칭 감느라 난 대답할 틈이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빈소에나 다녀오자. 참, 너에게 아직 이야기는 안했다만 너 인규 와이프가 누군지 모르지? 미숙씨야. 인규 말이 네가 군대 가기 전에 사귄 적이 있었다던데…….”
응급처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인규라는 총탄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내 몸을 관통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무서운 회전력과 속도로 파고들었다. 심장까지도 한 걸음에 내달을 태세였다. 심한 통증에 난 가슴을 부여잡고 까무룩 무너져 내렸다. 인규와의 만남을 하루 앞두고 미숙과의 약속이 정해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 미숙의 치밀한 계산이 개입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꿈결에서처럼 그녀의 전화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숙이 전화를 걸어온 건 며칠 전이었다.
“오빠, 어디야?”
장소를 이용해 안부를 묻는 말로 통화의 첫머리를 여는 건 그녀만의 버릇이었다. 여전히 내 귀에는 꼼짝 말고 거기 딱 기다리고 있으라는 협박으로만 들렸다. 좀 바꿔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할 때마다 그녀는 콧방귀만 뀌었다. 하기야 보이지도 않는 곳을 보라며 통화를 시작하는 것과 의미 없기로 무엇이 다를까?
“버스 안.”
나 역시 나만의 응대방식을 고집하며 선문답 흉내를 냈다. 억지스레 웃음을 만들려는 이런 행동이 무료한 일상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그걸 비웃듯 버스운전수가 발을 바꾸어 액셀러레이터를 질끈 밟았다. 난 타성에 젖어 살면서도 관성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멈추려는 발과 급히 움직이려는 머리가 따로 놀면서 순간적으로 몸이 중심을 잃었다. 옆 사람과의 충돌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사과의 목례를 보냈지만 그의 인상은 한층 굳어졌다.
“싱겁긴. 어디 출장 간 건 아니지? 서울이야?”
벌써 한 차례 버스승객들의 우스갯거리가 되었으니 내가 싱겁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곳 상황을 알 리 없었지만 그녀가 선택한 언어는 우연치고는 아주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응, 서울. 퇴근 중. 웬일이야?”
내 특유의 무뚝뚝함이 전화기의 마이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길가에선 철쭉이 시들어가는 중이었다. 가지 끝에 힘겹게 남아있는 꽃잎조차 전날 내린 비의 손장난에 물이 빠져 붉은 색이 한층 바래있었다. 봄은 바쁜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보고 싶어서 그러지.”
버스의 차창 너머로 붉게 물든 저녁놀이 나이 쉰의 유부녀 말을 원색적으로 덧칠했다. 새빨간 목소리였다. 다소 천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 공감감적 심상에 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미숙은 무채색을 더하며 다소 채도를 낮추려들었다.
“이번 주말에 원곡 올 거지?”
라디오에서는 프로야구 중계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을 연고로 한 트윈스가 원곡의 치타스를 상대로 한 점 차 박빙의 리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트윈스의 골수팬을 자처하는 나는 스피커 쪽을 향해 귓바퀴를 최대한 오므렸다.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일요일에 약속이 있어 내려갈 참이었어. 고등학교친구들을 만나기로 했거든.”
장난삼아 넘겨짚은 말이라 여기면서도 왠지 싸한 느낌이 휩싸고 드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몰라? 미숙이 손바닥에 기식이란 말? 내 안테나가 꽤 값이 나가는 거거든. 조심해 그러니까. 엉뚱하게 한눈팔다 걸리지 말고.”
갑자기 잘 던지던 트윈스의 투수가 치타스 타자가 타격한 공에 머리를 맞았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조심해야겠네.”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개꼬리처럼 감겨 내려갔다.
“그럼 오빠, 기차표 예매하는 대로 도착시간 알려줘. 내가 역으로 마중 갈게.”
우리들의 만남약속은 어느새 이루어져있었다. 땅거미가 밀려왔다. 밤이 낮을 밀어내는 시간이었다. 내 가슴속에서는 연인관계였던 그녀와 나의 과거가 지인관계로 변한 현재를 밀어냈다.
“알았어. 또 연락할게…….”
그 사이 트윈스는 치타스에게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불의의 투수교체가 더없이 안타까웠다.
현철이 나를 흔들어댔다. 자음과 모음이 제각각 분리된 채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버려 귀 울림으로만 느껴지던 소리들이 말의 형태를 되찾았다.
“놀라게 해 미안해. 일부러 숨기려 했던 건 아니야. 인규 이 녀석이 제 입으로 모든 걸 직접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기에 그때까지 입을 다물기로 한 것뿐이야. 게다가 너와 미숙씨의 관계를 내가 안 것도 최근의 일이고. 지금 생각해보니 인규가 그 이야기를 오늘 하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야.”
총상의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통증도 사라져있었다. 내 몸은 사점(死點)을 지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구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인규의 문상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문항의 시험지가 내 손에 들려있다는 걸 알았다. 답안지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했다.
난 학창시절 우수했던 수학지식을 활용해 문제풀이에 몰두했다. 우린 각기 다른 방정식으로 얽혀있었다. 우선 인규와 미숙에게는 부부라는 방정식이 존재했다. 모든 사람에게 공인된 그 관계는 단순한 1차방정식과 같아서 미지수의 값을 구하는 일이 지극히 간단했다. 반면 나와 미숙은 연립방정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과거라는 명확히 알려진 하나의 관계식이 있었지만, 미래라는 불투명한 관계식도 있어서 근을 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인규와 나는 아주 복잡한 다원연립방정식구조였다. 미지수가 몇 개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나의 과거연인과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나와 미숙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관계식도 문제였다. 그 개수가 미지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규의 죽음으로 불능이 되어버린 식도 있었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할 일은 아니었다. 내게는 주어진 힌트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숙과 나의 과거를 인규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달리 해석하면 그 말은 미숙이 나와 인규의 관계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미숙이 손바닥에 기식’을 들먹인 것만 봐도 그랬다. 만약 그 사실을 지금껏 나에게 숨긴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만 밝힐 수 있다면 미숙과 나 사이의 미지수를 구하는 것은 물론 다음 작업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
미숙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의 원리였다. 잠자는 개를 건드리다 내 자신이 물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개에 물릴 확률까지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인 끝에 조문이라는 답안을 작성하여 현철에게 내밀었다.
빈소는 빈소가 아닌 듯했다. 휑하니 썰렁했고 영정은 명부를 대조하는 사자(使者)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젊고 밝은 얼굴이었다. 제대 앞에서는 향 연기가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염불소리가 망자의 발을 붙들며 느릿느릿 흘렀다. 나는 인규를 만나지 않음으로써 만났고 우린 말없는 침묵으로 재회의 인사를 나눴다.
셋이 함께 모인 자리였음에도 현철은 인규에게만 혼술을 권했다. 그 사이 난 아침에 완성하지 못한 모자이크를 불러들였다. 어제 미숙과 헤어지던 부분은 아직도 공백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신 바뀐 부분이 있었다. 그 전후 조각들의 배경하늘이 뚜렷해진 것이다. 하늘에는 희부연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그건 미숙의 귀가시간이 장례절차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아울러 내 정체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공기주머니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현철이 절을 했다. 그를 따라 무릎을 굽혔다. 그때 난 내 두뇌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다른 방법으로 방정식을 풀려한다는 걸 깨달았다. 행여 미숙과의 관계가 훼손될까 걱정은, 그것이 드러날까 비난받을까 두려움으로 바뀌어있었고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으로 발전해있었다. 이기적 본능을 감추려했지만 자기합리화조차 최근 여론조사기관들만큼이나 신뢰성을 상실해버려 자기세뇌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돌아서서 유족들과 맞절을 나눌 때였다. 난 사시(斜視)가 되어 두 눈을 각각 분리 작동시켰다. 한쪽 눈으로는 상주의 눈길을 엄폐하면서 나머지 눈으로는 미숙에게 끊임없이 질문공세를 펼쳤다. 예상치 못한 나의 방문과 공격에 동요할 만했지만 미숙은 시종일관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강철 멘탈을 과시했다. 빈손으로 빈소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손님맞이 방도 텅 비어있었다. 우리 뒤편에 앉은 대여섯 명이 아니었으면 봉사자들의 수가 문상객을 웃돌 지경이었다. KTX급 서빙카트를 타고 온 음식이 백짓장을 맞든 봉사자들 손에 의해 빠른 속도로 상 위에 차려졌다. 반대로 그릇과 입을 오가는 현철과 나의 수저이동속도는 무궁화호만큼이나 느려 터졌다. 시간은 많이 늦어있었다. 현철이 귀경열차를 타야하는 나를 걱정했다.
“기식아. 그만 일어나자. 더 있어봐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없고. 넌 또 먼 길 가야 하잖아.”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는 내 손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미련이 묻어있었다. 그때 술기운에 촉촉하게 젖은 음성들이 뒤에서 들려왔다.
“며칠 전에 내가 인규를 만났거든. 그런데 그날 이 자식이 뭐라 했는지 아니? 요즘 사람들이 웰빙, 웰빙하는데 자기는 웰다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마치 오늘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야, 술도 산도 좋아하지 않는 놈이 한밤중에 일부러 술을 준비해 산에 갔다는 게 이상하지 않니? 이건 아냐. 실족사가 아니라고.”
“사체검안의 말로는 저체온증이 직접사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대. 그렇다면 술과 저체온증의 공통분모가 뭐겠어?”
“인규 누나에게 들으니 제수씨가 어제 새벽에야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왔대. 그러니까 오늘 새벽인 셈이네. 아니 그 사람은 대체 그 시간까지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장례식장을 벗어나는 내 발에서 족쇄가 끌리며 철거덕거렸다. 길을 재촉하자니 보이지 않는 채찍이 몸에 휘감기며 생채기를 아로새겼다. 상처에서 나를 향한 질문들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지난 2년간 미숙을 통해 내가 꿈꾼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얻으려 남다른 의지를 품기는 했을까? 그 와중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역경을 주저 없이 맞설 자신은 있었을까? 마냥 세월의 관성에 떠밀려 무책임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원곡역에 도착했더니 미숙의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오빠, 문상 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고마워. 한 번 더 볼 수 있어 반가웠고. 조심해서 잘 가. 그리고 어젯밤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마지막 말이 아리송했다. 어젯밤 미숙이 잊지 못할 기억은 내게 잊힌 기억이 틀림없었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엘리베이터의 공간에서 그녀를 포옹하던 장면이 어슴푸레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연쇄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무엇으로든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겠냐며 인규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어지럼증이 일었다.
기차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 화면을 켰다. 미숙의 문자가 아까 그대로 열려있었다. 순간 무언가가 욱하고 치밀어 올라왔다. 난 화면의 한쪽 구석을 눌러 문자의 삭제를 시도했다.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전에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들이 하나씩 휴지통으로 사라졌다. 묘한 흥분이 일었다. 주체하지 못한 나는 통화기록이며 사진을 포함해 연락처에 이르기까지 미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심지어 휴지통을 비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번엔 하늘에서 철새의 모습을 한 미숙이 서식지를 찾아 떠돌고 있었다. 난 삭제한 기록들을 되찾으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내부저장소는 물론 SD카드의 파일들 어디에도 미숙의 흔적은 없었다. 전화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서야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나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았다. 바로 미숙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성이었다. 그건 고독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안간힘이었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나만의 이기심이었다. 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본성을 내세우며 면죄부를 주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