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by 원광우

“어찌 저리 태평스러울까. 버스 놓치면 어쩌려고…….”

순자가 거듭 새된 소리를 해도 상구는 여전히 스마트폰 삼매경이었다. 시내버스 도착정보를 훤히 꿰고 있는 마당에 구태여 서둘 이유가 없었다. 폰 화면에서는 제 집을 찾아가는 개미들 마냥 버스모양의 그림이 노선도 위를 꼬물거렸다. 이따금씩 혼자웃음까지 지어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디지털라이프를 즐기는 신인류로서의 자부심마저 가득했다. 그 모든 것이 속도제어가 불가능해진 자전지구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쳐댄 결과였다.

오지게 빠르다는 5G 핸드폰으로 갈아탄 지 어언 2개월. 그 시간이야말로 예순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티즌에서 네티즌으로, 네티즌에서 또 유티즌으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시켜온 인고의 세월이었다. 전화기의 사용요금을 결정하는 간단한 일에서부터 그걸 나름 옴팡지게 활용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그리 난해하던지. 단계마다 마주친 언어들은 또 왜 그리 생소하기만 하던지. 슬림, 베이직, 플래티넘, 프라임 같은 요금제 이름들은 결정 장애를 유발시켰고, 로밍이니 테더링이니 하는 신조어들은 샐러리맨 시절 진급시험에서 줄곧 토익 800점을 넘나들었던 실력을 무색하게 만들었었다. 그뿐이던가. 깨알을 뿌려놓은 듯한 매뉴얼은 날이 갈수록 흐려져만 가는 시야를 비웃고 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숱한 장벽들을 차례로 격파해온 그였다. 돋보기를 끼고 흔들리는 손가락을 애써 부여잡으면서 사용법을 익히느라 핸드폰의 화면을 직접 꾹꾹 눌러댔던 나날들. 그 사이 노력은 응분의 대가를 지불해 어느새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는 물론 길 찾기나 배달주문, 지로납부, 민원서류발급, 영화표예매 같은 일들은 사소한 일상으로 변해있었다. 멀티윈도우나 스크린미러링, 모바일핫스팟, 챗봇과 같은 언어들도 더 이상 외계어가 아니었다. 명실상부 호모디지쿠스의 면모를 유감없이 구가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나서요, 앱인가 지랄인가 너무 믿지 마시고. 어서요.”

숫제 그녀의 목소리는 애걸조로 변해갔다.

“걱정 안 해도 돼.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15분이나 남았다고 이 핸드폰이 말해주고 있잖아.”

아날로그로 점철된 삶이 어찌 디지털인생을 이해할까? 상구는 잠자리가 서로 안방과 골방으로 멀어지는 동안 감히 그 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격차로 벌어진 자신과 순자의 사이버공간상 위상차를 인식하며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자족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의 출장지는 대구였다. 열차표는 코레일톡 앱을 통해 수원발 대구행 KTX로 미리 예매해 두었다. 5킬로미터 남짓 되는 수원역까지의 이동은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태생적으로 에너지소모 최소화 시스템이 몸속에 내장되어 대중교통이라고는 택시밖에 이용하지 않던 그가 어렵사리 그런 결단을 내린 배경에도 어김없이 액티브 스마트족으로서의 긍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소파에서 뭉그적대는 것도 그 분야에서는 한낱 무지렁이에 불과한 마누라에게 시내버스앱과 비용절감의 그래프관계라는 스마트경제학의 한 단원을 실습을 통해 강의하고 싶어서였다.

“아이고, 기차 놓칠까 내가 다 조바심이 나네. 자, 일어나요, 이제 그만.”

순자는 상구를 내쫓을 기세로 양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이 아스팔트에 붙은 껌딱지를 떼어내려 고압살수차를 동원해 강력한 물줄기를 분사하는 환경미화원을 꼭 닮아있었다.

“아, 글쎄 정류소가 어디 한참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파트 입구만 나서면 엎어져 코 닿을 데 있는데 뭘 그래. 5분 전에만 나서도 아무 문제없으니 염려 말아.”

강의시간 종료 종소리가 울렸건만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스마트경제학교수는 못들은 체 진도빼기에 여념이 없었다. 와중에 핸드폰 위를 쉴 새 없이 달려온 개미가 네 정류소 앞까지 도착해 다음 강의에도 대비해야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껌딱지가 세찬 압력의 물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겨우 떨어졌다. 이때다 싶어 순자는 소몰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현관으로 향하는가 싶던 상구는 문득 잊은 게 있는 것처럼 뒤돌아서서는 거실 한쪽 벽에 붙은 홈 네트워크시스템 앞에 가 섰다.

“아이 출발하라니까 거기는 또 왜 가 서요?”

쉬는 시간을 더 빼앗는다면 앞으로 강의거부라는 최후수단까지 구사할 수 있다는 의지가 순자의 표정에 역력했다. 상구는 아랑곳 않고 선 자세 그대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엘베 호출해야지. 26층이라 그거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찮은 걸. 자, 호출! 그래 지금 2호기가 15층 올라오고 있으니 이젠 나가도되겠군.”

“참, 가지가지 하시네.”

순자의 가슴속에서 시한폭탄의 시계초침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론 당신도 스마트폰 활용도를 높여보지 그래. 이젠 방구석에 앉아 장을 보는 정보화시대라는 거 몰라? 그러다 나중에 손주 녀석들에게까지 말 안 통한다고 따돌림 당해.”

하지 않아도 될 시대타령까지 늘어놓으며 손주들까지 끌어들인 발언은 시한폭탄의 폭발시기를 더욱 앞당겼다.

“하이고, 정보화는 무슨. 당신이나 그리 사세요. 꼼짝 않고 지내느니 내 몸 움직여가며 사는 게 난 훨씬 좋으니까. 언제부터 자기가 신식이 되었다고, 참 나 기가 막혀서. 사고방식이라고는 상투 틀고 갓 쓴 영감 저리 가란 양반이 뭔 스마트야, 스마트가. 암 말 말고 그냥 조용히 갈 길이나 가슈. 괜히 어디 가서 오지랖 떨다 창피나 당하지 마시고.”

순자를 디지털세상의 불구자로 취급하며 상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려던 상구의 의도는 TV드라마를 통해 갈고 닦은 그녀의 카운터펀치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칫 만회하려 한 마디를 더 보탰다가는 자신이야말로 드라마세상의 불구자 취급을 받을 위기에까지 내몰렸다. 머쓱해진 그가 현관문을 열자 엘리베이터가 입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이것 봐. 얼마나 편리하냐고. 문명과 미개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게지. 상구는 괜히 허공에다 대고 혼잣말을 하며 분풀이를 대신했다.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뙤약볕이 땀샘을 자극해댔다. 가로수들은 부지런히 광합성을 하며 줄기를 뻗고 잎사귀를 늘렸지만 그늘의 크기는 나무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정류소가 빤히 보였다. 정류소 지붕의 생산성도 현저히 저하되어있었다. 땅바닥에는 제 면적의 반에도 못 미치는 겨우 손바닥만 한 그림자가 드러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 안에서 오밀조밀 들어선 사람들이 암내를 풍기며 영역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상구의 입에서 휘파람이 새어나왔다. 저런 꼴불견은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펼쳐지는 일이었다. 폰의 화면을 켰더니 타야 할 버스는 전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곁을 지나쳐 정류소 앞에 멈추었다. 번호판에 눈길이 가닿았다. 백넘버 30.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핸드폰으로 계속 위치추적을 해온 개미의 노선번호였다. 아니 아직은 전 정류소에 있어야 할 놈이 아니던가. 예상과 다른 상황의 전개에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개미는 먹은 것을 한 바탕 토해놓고는 새로운 식사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줄지어 섰던 마지막 한 명이 막 출입문 곁으로 다가갈 때였다. 뇌가 긴급하게 연산 작용을 개시했다. 버스까지의 거리를 자신의 최고속도로 나눈 후 개미의 마지막 한입식사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교했다. 그리곤 곧바로 뛰라는 명령을 다리로 전달했다. 아울러 어깨에 걸린 손가방을 옆구리에 바싹 붙여 들 때 공기저항이 최소가 된다는 정보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땅바닥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나 도심의 도로를 질주하는 코끼리 한 마리에게로 집중되었다.

물리적 법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나이 탓인지 체중 탓인지 초기속도는 기대치를 밑돌았지만, 질량이 큰 만큼 그에 비례해 급속도로 가속도가 붙었다. 마지막 스퍼트까지 가미되자 개미의 꼬리 끝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개미는 똥구멍으로 매연 한 움큼을 퍼부으면서 서서히 차이를 벌리다 결국은 멀어져갔다. 매정한 말과 함께 찬바람을 휑하니 일으키며 떠나가던 젊은 날의 여친이 놈의 뒷모습에 오버랩되어 지나갔다. 즉시 결과검증에 나선 뇌가 오류분석결과를 내놓았다. 보고서에는 상구와 우샤인볼트를 같은 인간이란 이유로 동일하게 평가한 것이 실수였다고 적혀있었다.

킥킥대며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상구는 속절없이 정류소로 돌아왔다. 그깟 일로 기가 죽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목덜미의 땀을 손수건으로 한 번 쓱 문지른 그는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다음 버스는 15분 후로 예정되어있었다. 그걸 타도 기차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이다. 화면을 바꾸어 회사의 전자결재시스템에 접속했다. 디지털노마드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기다림의 시간조차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재를 해야 할 문서들이 줄을 지어 나타났다. 오늘 출장과 관련한 문건도 있었다.

엄지로 스크롤해가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처리해나가는 동안 저 앞 교차로에서 새로운 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류소의 사람들이 주섬주섬 대오를 형성하며 개미의 식탁을 꾸렸다. 그런데 정류소에 가까워지면서 속도를 줄이던 개미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인도와 가장 가까운 차로로 진입해야할 녀석이 계속 중앙선에 가까운 차로를 유지하더니 급기야 멈춰 서서는 제 먹은 것을 찔끔 뱉어놓고 입을 싹 닦으며 날름 뺑소니를 쳐버리는 것이었다. 어, 어, 어……. 사람들이 하나같이 벙어리 행색을 했다.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개미허리라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놈의 배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세쌍둥이를 잉태한 임산부거나 극심한 소화불량에 걸린 모양이었다. 원인이 입덧이든 체증이든 더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놈의 마누라가 식전 댓바람부터 기차를 놓치느니 마느니 오두방정을 떨어쌓더니……. 입이 보살이었다.

다음 버스로는 기차시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상구는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고쳐먹으며 정류소를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귀신에 씐 것만 같았다. 시내버스 앱이 정보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어쩌면 머피의 하수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다행히 상구는 늦지 않게 역에 도착했다. 역사 내에서는 떠나는 자와 떠나온 자가 지난 오백 겁(劫)의 생애 동안 맺어왔던 인연을 잊은 채 엇갈려 지나쳐갔다. 등줄기로 속옷이 쩍쩍 달라붙었다. 머피의 입김이 자신의 소속을 소위 그들만의 리그로 강등시켜버린 결과였다. 실내로 들어서면 한결 시원해지리라 믿었건만 블랙아웃을 걱정하는 에어컨은 불쾌지수를 도리어 끌어올렸다. 이럴 때라면 카페인이 제격이다. 더군다나 이런 다중이용시설에서는 유명 프랜차이즈의 로고가 뚜렷이 박힌 커피 잔을 하나쯤 드는 행위가 뉴노멀로 굳어지는 추세가 아니던가. 커피전문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에서 키오스크 장벽이 막아섰지만 상구에게 있어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출입의 특권을 부여하는 증명서에 불과했다. 노련한 동작으로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카드결제와 같은 버튼들을 차례로 눌렀다. 그는 전형적인 쪄죽따 스타일이었다. 커피를 내어주며 시럽을 추가하겠냐는 점원의 질문에는 단호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모름지기 커피란 뜨거울 때 그리고 블랙으로 마실 때라야 향기와 맛이 최고조에 달하는 법. 그건 믿음을 넘어 상류사회 지식인의 중요한 덕목으로까지 간주되고 있었다.

커피 컵을 손에 쥔 상구는 플랫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선형의 열차가 레일 위를 미끄러져 들어왔다. 중년 신사 한 명이 종이승차권을 펼쳐 객차호수를 확인하며 바닥에 표시된 승차위치를 찾고 있었다. 그 앞에서 상구는 보란 듯이 스마트폰의 화면을 켜 모바일승차권을 펼쳤다. 어디보자, 여기가 9호차 위치지? 괜히 지껄이는 혼잣말의 음향과 음색은 과도하게 높았으며 팔은 지나치게 길게 뻗어있었다. 열차는 제 위치에 정확히 멈춰 섰다. 출입문이 열리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폭풍배려까지 잊지 않았다. 그때도 모바일승차권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 승객들의 눈높이에 정확히 맞춰져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평소 15초였던 화면 꺼짐 시간을 10분으로 미리 바꿔놓은 용의주도함의 결과였다.

좌석은 창 측이었다. 객차안의 냉기는 적당했다. 윗옷을 벗어 창 옆 옷걸이에 걸었다. 손가방은 의자 밑 벽 쪽으로 세워두었다. 그리곤 좌석에 앉아 테이블을 펼친 후 그 위에 커피가 든 종이컵을 얹었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자 저절로 눈이 감기면서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출장과 여행이라는 두 단어가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결과는 관계식으로 나타났다. 출장⊆여행. 설렘이 찾아왔지만 그건 잠시였다. 새로운 관계식이 출현했다. 부담감∊출장, 부담감∉여행, ∴ 출장⊈여행. 새삼 오늘의 출장목적이 상기되면서 가슴을 심하게 압박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구의 옆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미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 몇몇이 출입문 쪽에서 객실통로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 제일 마지막에 걸어오는 여성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쯤 되었을까? 반투명 선글라스 탓에 정확히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차림새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붉은색의 스커트 끝단은 무릎에서 한 뼘 이상 올라붙어 하체를 타이트하게 감쌌고, 흰 블라우스의 깊게 패인 가슴라인에서는 젖가슴의 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의 문명인답게 한 손에는 커피 컵이, 다른 손에는 몇 권의 책이 쥐어져있었다. 책들이 살포시 압박하는 바람에 더욱 팽팽하게 당겨진 왼쪽가슴에서는 한층 볼륨감이 살아났다. 큰 키에도 하이힐을 신었는지 발밑에선 똑똑똑 규칙적인 소리가 났으며, 줄이 긴 핸드백이 어깨에 걸려 메트로놈 역할을 담당했다. 머리카락은 연한 갈색으로 굵게 웨이브져 흩날렸다.

상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그말리온으로 변해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엎드려있었다. 여신이시여, 바라건대 저 여인이 옆자리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 좌석번호를 확인하며 다가오던 그녀가 상구의 옆 좌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기도의 동기가 도덕성상실 때문이 아니라 수컷본능에서 비롯된 순진한 욕망이란 것을 알아차린 아프로디테가 관대함을 발휘해 응답으로 갈라테이아를 보내온 것이다.

갈라테이아는 먼저 좌석 앞 테이블을 빼내려했다. 손에 쥔 물건들을 그 위에 내려놓으려는 의도가 확실했다. 하지만 양손이 구속된 상태에서 행하는 동작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상구는 도움을 주려 손을 계속 움찔거렸지만 아프로디테로부터 진의를 의심받을까 두려웠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베푸는 친절에 갈라테이아 역시 오해해 경계심을 고조시킬지도 모른다. 망설임이 이어졌다.

그녀의 손이 거의 테이블에 닿을 때였다. 곁눈질을 하던 상구의 눈에 순간적으로 아찔한 광경이 비쳐들었다. 허리가 숙여짐과 동시에 블라우스 목 부분이 아래로 쳐지면서 옷 속의 비밀스런 부분이 환하게 펼쳐진 것이다. 하얀 속옷으로 끝부분이 약간 가려지긴 했지만 그건 영문자 더블유(W)의 형태를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묘사하자면 그리스문자의 오메가(ω)였다. 일부러 자신이 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개가 되돌아간 것도 무의식중에 저절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피사체는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그 잔상은 좀체 사라지지 않은 채 아주 진하고 강하게 남아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심장박동수가 늘면서 혈압이 상승했고 숨소리가 가빠졌다.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는데 이번에는 투박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되돌리기에 좋은 기회였다. 졸지에 잃어버린 그리스문자를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집중력을 한층 가미해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성과 없이 돌아오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충만한 시선이었다. 책들이 놓이는 소리였던지 테이블 위로 그녀의 손을 떠난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상구는 포기하지 않고 고개를 약간 들어 서치라이터의 수색범위를 확장시켰다. 애석하게도 오메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조각미를 뽐내며 존재의 뿌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메가는커녕 그 반쪽도 찾지 못한 그는 소모한 에너지에 대한 본전생각이 간절했지만 시선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무언가가 추락하는 것이 잠시 눈에 어른거렸다. 동시에 아랫배 언저리로 약간의 충격이 전해졌다. 날개 잃은 천사는 곧 정체를 드러냈다. 그건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컵이었다. 종이컵은 상구의 하복부에 내용물을 잔뜩 쏟아놓고는 튕겨져 나가 바닥에서 원호를 그리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인체의 통증에 대한 반응은 시각(視覺)과 무관하게 무조건 반사로 일어나는 법이다. 상구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종이컵의 질량과 속도, 비행거리, 중력가속도를 바탕으로 자유낙하의 합리성을 따져볼 겨를조차 없었다.

“앗 뜨거.”

불길이 이는 듯한 강렬한 고통이 순식간에 아랫도리를 휘감았다. 엉덩이에서 가장 강력한 탄성계수의 용수철이 작동했다. 그의 몸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자 앞의 테이블이 휘청거렸고 그곳에 있던 종이컵마저 커피를 쏟아냈다. 와이셔츠의 허리부분과 바지의 앞섶이 온통 커피로 물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후다닥 통로로 튀어나갔다. 난감한 건 더 이상 대처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부위란 게 뜨겁다고 함부로 어루만질 수도, 훌러덩 옷을 벗어던질 수도 없는 워낙에 야릇하고 묘한 곳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어떡하죠?”

미안해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고 걱정스런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일만이 급선무였다. 호흡을 정지시키고 온몸을 최대한 비틀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은 열차 안에서 코끼리를 춤추게 만들었다.

“이걸로 좀 닦기라도 하시죠.”

그녀가 손수건을 건넸다. 상구는 그것을 받아 쥐고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걸로 닦는다고 고통이 사라질 리도 없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하복부로 집중된 수많은 아르고스의 눈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객실 바깥쪽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없는 객차의 연결통로에 섰다. 레일과 바퀴의 마찰음이 의식을 분산시킨 탓인지 잠깐 사이 화기는 제법 잦아들었다. 통증으로 마비되었던 뇌가 서서히 제 기능을 회복하면서 부하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던 문제해결기법이 떠올랐다. 현상파악-원인분석-대책수립-결과평가. 그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는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는 일이야.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탈의를 해서 피해상황을 확인해야겠지.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사고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탈의를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독립공간이라면 화장실뿐이었다. 마침 사이에 벽을 두고 나란히 남녀가 서있는 표지판이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그림에서 두 사람은 엄격히 구분되어있었지만 문은 단 하나라는 점에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상구는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쪽에서 주먹으로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욕, 수면욕, 성욕보다 더 신성한 배설욕구를 방해하는 데 대한 분노와 신경질의 몸짓이었다. 엉거주춤 문 앞에 서서 기다리자니 바짓가랑이로 흘러내린 커피가 한 방울씩 똑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러다 바지에서 커피의 종유석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바닥에는 또 커피의 석순이 자라나지 않을까? 마침내 온몸이 커피 석주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뭐 그런 뜬금없는 생각들이 번져나는 커피 향에 섞여들었다.

다행히 종유석도 석순도 생기기 전에 화장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인상을 심하게 찌푸리며 어정쩡한 자세의 상구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씩씩거리며 지나갔다. 바람결에 이죽거리는 소리가 묻혀왔다. 기차 처음 타나?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명예훼손죄의 성립여부를 따져볼 정도로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상구는 법률적 검토를 후순위로 미루었다.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를 내리며 변기에 걸터앉았다. 양 다리 사이로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졌다. 땅거미가 질 무렵의 호숫가. 사그라드는 태양빛에 무성한 수초들이 검은 실루엣만 드러낸 가운데 그 위를 붉게 번진 노을이 뒤덮었고 수면 위에서는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심하게 덴 흔적은 없었다. 불현듯 세베리의 얼굴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왔다.

세베리는 초등학교뿐 아니라 대학을 함께 다닌 동창 박영태의 별명이다. 그와는 최근까지도 가끔 만남을 이어오는 중이다. 별명의 유래는 50년 전 초등학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소변습관이 유별난 친구였다. 소변이 마려울 때면 보통의 아이들처럼 화장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직접 해결하는 과감함을 선보였다. 장소는 물론 구경꾼의 성별조차 완전히 무시했다. 운동장의 철봉대기둥 옆에서, 씨름판의 모랫바닥에서, 교실 담벼락에 붙어 서서, 심지어는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을 향해서. 전천후로 뿜어대는 그의 물줄기는 햇볕이 강렬한 여름이면 일곱 빛깔 무지개를 선연하게 그려놓곤 했다. 아마도 시대를 앞서 새로운 분야의 예술을 선보인 천재 퍼포먼스아티스트였는지도 모른다. 역사를 돌아보건대 천재예술가들이 당대에 제대로 평가를 받은 경우는 그리 흔치않다. 그 역시 영광이 아닌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했다. 행위예술을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던 아이들은 그저 그의 예술을 고자질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공연현장은 기술적 문제로 영상은 누락된 채 음성을 통해서만 시시각각 선생님에게로 실황 중계되었다. 그때마다 선생님 또한 예술의 문외한임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박영태! 니 자꾸 아무데서나 오줌 쌀 끼가? 와 변소 놔두고 어믄 데서 오줌을 싸 제끼노? 똥개 새끼가?”

그 정도의 비난에 굴복할 영태가 아니었다. 영태가 예술가의 기질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계속되는 공연으로 표시하자 선생님은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노무 자석, 한 번만 더 그라몬 다시는 오줌도 못 누도록 꼬치를 확 따뿔 끼다.”

요즘 세상이라면 대번에 스마트폰을 통해 녹음내지 녹화되어 온갖 SNS를 떠들썩하게 도배할 발언이지만 디지털이 돼지털로 아무 거리낌 없이 치환되었을 그때만 해도 시골소읍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의 권위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였다. 게다가 4학년 이상의 고학년은 남녀가 따로 분반되어 있었기에 상구네 반에서는 머슴애들만 있어 성희롱과도 관련이 없었다. 물리적 거세라는 초강경조치의 예고에도 영태의 예술 혼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어느 봄날 아이들의 졸음이 절정에 이르던 마지막 수업시간이었다.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선생님이 큰 소리로 영태를 불렀다. 고함소리에 아이들의 졸음이 저만큼 달아났다.

“박영태! 이리 나온나. 니 오늘은 소사실 앞에다 오줌을 싸질렀대매? 내가 뭐라 캤노? 한 번만 더 그라몬 오줌도 못 싸게 만들어준다캤제? 퍼뜩 나오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멈칫멈칫 교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영태의 뒷모습에서 순교자의 이미지가 길게 그려졌다. 단상 위에서 선생님은 엄중하게 뒷말을 이었다.

“니 같은 놈은 본때를 보이주야 된다 아이가. 말을 하몬 알아들어야 사람이제. 백 번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으몬 그기 사람이가? 니는 오줌을 쌀 수 없어야 정신을 차리는 기라. 퍼뜩 바지 내라라.”

모든 아이들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정말로 선생님이 영태의 몸에 가위질을 해댈까? 영태도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쭈뼛거리긴 했지만 입에서 처음으로 사과의 말이 새어나왔다.

“쌤요. 한 번만 봐 주이소.”

“시끄럽다, 후회해도 늦었다 고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버르장머리를 고치나야 되는 기라. 마아 빨리 바지나 내라라.”

단호한 선생님 말에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옮겨갔다.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가자 그는 몸을 움츠리며 조그만 양손으로 허전해진 양다리 사이를 최대한 가리려 애를 썼다. 아이들의 눈은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윽박지름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부끄러븐지는 아는 모양이네. 그래 부끄럼을 타는 놈이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나. 그 손 치아라.”

영태는 천천히 손을 다리 사이에서 떼어내며 차려 자세를 취했다. 점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의 신체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금방이라도 가위질이 이어질 것 같았다. 선생님은 윗옷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빼냈다. 모두가 가위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의외로 빨간 매직펜이었다. 매직펜의 뚜껑을 연 선생님이 붉게 물든 주둥이를 영태가 예술행위를 할 때마다 핵심적으로 사용하던 도구 가까이로 가져갔다. 한껏 숨을 죽이던 아이들이 놀란 건 선생님의 다음 동작 때문이었다. 영태의 고차원적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던 선생님이 정작 영태의 그곳에다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삼 분쯤 지났을까? 영태의 다리 사이에는 빨간 고추 하나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덕분에 영태는 자의반 타의반 선생님의 작품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하는 VIP 관람객이 되었다.

“니는 오늘부터 빨간 꼬치다. 니그들도 함 봐라. 꼬치밭에 있는 빨간 꼬치하고 똑같제? 한 번만 더 아무데서나 오줌 싸몬 파란 꼬치, 노란 꼬치로도 만들어줄 끼다. 그라몬 언젠가는 무지개 꼬치가 안 되겠나? 알았으몬 인자 바지 올리고 들어가라.”

영태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지를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그를 빨간 고추의 약칭인 빨고라고 불렀다. 그러다 빨간 고추를 상표로 하는 움베르또 세베리라는 브랜드가 유행하면서 별명 또한 글로벌화되었고 부르기 쉽게 세베리가 애칭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세베리가 호출된 건 빨강이 또 다른 빨강을 부르고 고추가 또 다른 고추를 불러온 연상 작용의 결과였다. 순수했던 동심의 세계는 상구에게 아침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던 머피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은 그 이상의 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커피에 젖어버린 옷가지를 해결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옷이야 그렇다 쳐도, 보기 흉하게 얼룩진 와이셔츠와 바지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출장길이 아니던가. 설령 그것을 세대를 초월한 유명작가의 예술세계라 우긴들 행인들의 감각은 그 옛날 세베리에 대한 선생님과 우리들의 이해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상구는 자신의 오른손에 그녀가 전해준 손수건이 쥐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손수건이라면 도깨비방망이는 못되어도 클렌징티슈의 역할 정도는 해낼지도 모른다. 바로 옆에 세면대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고무적이었다. 일찍이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부활을 경험한 선지자가 물로써 영혼을 씻어낸다면서 세례라는 걸 베풀지 않았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얼룩도 지울 수 있는 물이라면 옷의 얼룩을 지우는 일쯤이야. 상구는 손수건에 세면대의 물을 묻혀 커피의 잔해들을 살살 문질러보았다. 성인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가 한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염자국은 그 세력을 한층 넓힌 반면 한결 연해져있었다. 물론 방수성능이 뛰어난 기능성 소재라는 과학과, 얼룩의 생성시점이 방금 전이었다는 시간개념이 공조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어쨌거나 딱히 흉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상구는 제자리로 향했다. 가랑이와 허리춤에서 축축한 기운이 색다른 느낌으로 전해져왔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세탁 비용이라도 드려야 할 텐데. 그건 그렇고 혹시 덴 곳은 없나요?”

그녀가 또 한 번 사과해왔다.

“아…… 예……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세요? 뜨거운 커피라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녀의 시선이 상구의 그곳, 민망하기만 한 곳을 자꾸 더듬었다. 흘금흘금 건너다보는 그 눈길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얼룩이 사라진데 대한 의아심과 비밀스런 부분을 훔쳐보는 은밀함이 함께 배어있었다. 조금 전까지 오메가를 찾아 혈안이던 상구를 향해 영문자 유(U)를 탐색하며 가하는 반격이자 복수가 아닐 수 없었다. 상구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뭘. 너무 걱정 마세요. 주신 손수건으로 옷을 닦았더니 대충 입을만해지더군요. 그건 그렇고 손수건이 더러워져서 어떡해요? 버려야할 것 같은데…….”

상구가 말끝을 흐리는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끈질기게 바지의 앞지퍼부위를 노리고 들었다. 불편해진 상구는 바닥에 놓여있던 가방을 허벅지에 올려놓으며 차단막을 쳤다. 가방에도 커피는 군데군데 튀어 있었다. 그녀의 손수건은 그걸 닦는 데도 이용되었다.

“손수건이야 버리면 되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인데요. 나중에 혹시 상처가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세요. 제가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니까요. 전 김미영이라고 합니다. 전화번호는 거기 적혀있는 대로구요.”

비즈니스에티켓은 상구라는 시스템의 기본설정 값이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았지만 대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 역시 명함을 꺼내 전달한 것은 물론 목례까지 깍듯이 올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젠 괜찮으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전 이상구라고 합니다.”

형식과 격식을 갖추었다고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이미 치부를 다 드러내버린 탓에 상구는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말을 섞는 것도 바라보는 것도 쑥스럽기만 했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에게 구조의 손길을 요청했다. 구세주는 명함앱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미영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폰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그것으로 미영의 정보는 회사명, 전화번호, 메일주소 등으로 분류되어 주소록에 저장되었다. 무심코 바라보던 미영이 관심을 보였다.

“어머, 저랑 같은 앱을 쓰시는군요. 꽤 연세가 있으신 것 같은데 스마트폰을 정말 잘 활용하시네요.”

“아니 이런 걸 가지고 뭘…….”

겸손한 입과 거들먹대는 어깨가 서로 양쪽에서 당기는 줄이 팽팽하게 땅겼다. 행여 어깨가 단시간에 입을 눌러 이김으로써 속물성이 고스란히 드러날까 봐 상구는 미영의 명함을 살피며 딴청을 피웠다. 명함에는 국내 일류그룹의 로고와 함께 생명보험회사의 상호가 굵은 고딕체로 찍혀있었다. 그녀의 이름 아래로 생활보험설계사라는 작은 글씨도 보였다. 보험설계사라. 건축이나 기구를 설계하듯 보험도 설계가 필요한 모양인데 왠지 자신의 무지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설계라는 단어는 세베리를 다시 소환했다. 그의 직업이 공과대학의 기계설계학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 대학 소재지가 오늘의 출장지인 대구였다. 별안간 그를 만나고 싶었다. 세베리가 원조 빨고라면 자신은 오늘의 빨고인 셈, 그와의 만남이 무슨 운명처럼 여겨졌다. 상구는 곧장 세베리에게 문자를 날렸다.

‘세베리, 변함없이 빨간색을 잘 유지하고 계신가?’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데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의 소설이었다. 문자의 내용을 들킨 것만 같았다. 세베리의 답은 지체 없이 도착했다.

‘나이가 몇이냐? 세월의 햇볕에 그 통통하던 움베르또 세베리도 태양초로 말라 비틀어져가는 중.’

‘오늘 대구 온 김에 색상과 모양을 한꺼번에 확인하고 싶은데 저녁에 시간 괜찮으신가? 소주 한 잔 어때?’

‘좋지. 어디서 만날까?’

‘새빨간 그대가 핫한 장소로 정해보시게.’

‘알았어. 장소를 정해 따로 연락하지.’

세베리와 약속을 정하는 사이 옆자리에서 여린 숨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은 채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팽팽한 가슴은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깊게 패어진 골을 경계로 양쪽으로 솟아오른 가슴의 경사면에는 푸른 실핏줄이 얇은 피부를 뚫고나올 것처럼 선명했다. 하복부로부터 아메리카노의 뜨거운 고통이 다시 전해져왔다. 더 바라보았다가 또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몰라 두려웠다. 상구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출장업무를 마치고 세베리를 만나기 위해 전철에서 내린 상구에게 요의가 찾아왔다. 그의 발길이 근처의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 앞에서 지퍼를 막 내릴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번졌다. 다름 아닌 속옷으로부터 발산되는 강한 커피 향이었다. 아침의 일이 되살아났다. 아메리카노를 두 잔씩이나 쏟아 부었으니 뭐 그리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아랫도리에 갇혀있던 향기입자들은 퇴로가 뚫리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자유를 만끽하며 제멋대로 흩어졌다. 화장실의 넓은 공간속에 난무하던 요산냄새가 일시에 스러져갔다. 향기 나는 속옷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커피 향 팬티, 라임 향 러닝셔츠. 그 외에도 오렌지, 박하, 허브, 민트 등 갖가지 향기들을 속옷별로 조합시킨다면 품목의 다양화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는 건 어떨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는 상품들이 벌써 개발되어 빅 히트를 친 후 자신을 이미 돈방석에 앉혀놓고 있었다. 정보화 사회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세상. 새삼 한 발 앞서가는 자신을 자랑스레 여기며 손을 씻는데 거울 속에서 나르키소스가 변신한 수선화들이 꽃망울을 앞 다퉈 터뜨렸다. 그때 주머니속의 전화기가 부르르 떨며 미영에게서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혹시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침엔 정말 미안했습니다.’

답장을 보내는 상구의 머릿속에서 나쁜 기억은 이미 깨끗이 사라진 후였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향기 나는 속옷을 선물해 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고마워할 일이지요.’

장문의 문자를 보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두 번째 문자를 보내면서 망설인 것인지, 그녀는 답을 두 통으로 나누어 연속으로 보내왔다.

‘무슨 의미신지? 어쨌든 별일 없어 보여 다행이군요.’

‘혹, 내일 저녁 시간 되시면 죄송하단 의미로 대구에서 제가 술 한 잔 사고 싶은데요.’

객실통로를 걸어오던 그녀의 육감적인 모습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녀와 함께 한 번쯤 일탈해 보고픈 뜨거운 욕망도 되살아났다. 제안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먼저 그런 제안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의문마저 들었다. 모레까지 출장이니 내일 저녁이면 시간도 문제없다. 까닭모를 불안감이 찾아왔지만 상구는 아메리카노를 어 메리 커넥션(A Merry Connection : 행복한 인연)의 씨앗으로 단정하며 흔쾌히 만남을 수락했다.

‘그렇게 하죠. 내일은 나도 대구에 머무를 계획이니.’

문자를 보낸 후 지도앱을 실행시켰다. 검색 창에 세베리가 알려준 카페의 이름을 쳐 넣은 후 이동방법으로 도보를 선택했다. 목적지가 파란색 풍선으로 표시되면서 그곳까지 최단거리의 길이 굵은 선으로 나타났다. 방향과 거리, 기준점 또한 친절하게 제시되었다. 발걸음을 떼어놓기 무섭게 현재 위치가 굵은 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카페는 유명세를 자랑하듯 넓은 홀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창가 쪽으로 세베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또한 기다림의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죽이고 있었다. 상구는 그 쪽으로 향했다. 몇 걸음 앞에서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뒷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낯설지가 않았다. 붉은색 미니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연갈색 머리카락까지. 김미영, 조금 전까지 문자를 나눈 아침의 아메리카노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하이힐 소리를 똑똑거리며 막 세베리의 테이블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녀도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일까? 희한한 인연에 가슴이 설레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뒤이어 세베리가 벌떡 일어났다.

“앗, 뜨거.”

비명소리는 세베리의 것이었다. 크기와 톤은 물론 길이까지 아침나절 상구가 KTX 열차 안에서 내질렀던 것 그대로였다. 헤라는 아르고스를 이곳에도 파견했던지 백여 개의 눈알이 일시에 세베리에게로 쏠렸다. 세베리의 바지 앞섶으로 하얀 김을 피워 올리며 아메리카노가 흘러내렸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으로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상구는 도플갱어를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쓰러짐이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는 점이다. 떨어지던 커피 잔도 그랬다. 컵은 순수하게 위치에너지만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거기에는 운동에너지가 추가되어있었다. 수평인 상태에서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미영의 손끝에서 발생한 외력이 가미되어 물을 따를 때처럼 약간 기울여진 채 커피가 일정량 쏟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손을 떠났던 것이다. 만약 세베리의 하복부에 가해진 충격이 더 커졌다면 에너지보존법칙의 관점에서 보건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늘어난 에너지의 영향일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서 슬로우비디오로 영상을 몇 번씩 되돌려 봐도 결과는 한결같았다. 그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미영의 고의가 개입된 행위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어쩌면 이런 일이 그녀의 명함에 적힌 설계의 정의가 아닐까?

꽃뱀 한 마리가 풀숲을 헤치며 지나갔다. 무의식중에 상구의 입에서 그 옛날 문청을 자처하며 외워대던 시 한 수가 읊어졌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출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그건 단어를 바꿔가며 되뇌어졌다.

두 명의 얼간이를 찾아 보험을 설계하는 꽃뱀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커피를 쏟아야 한다

인생은 감당하기 버겁기만 하고

그저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이거늘

비난받을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IT기기의 강자임을 내세우며 시대의 첨단을 주도하는 사회의 리딩그룹에 속해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이런 개뿔.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자신은 누구에게나 만만한 먹잇감에 불과했다. 진정한 고수는 도구를 활용하지 않아도 사람을 움직여 제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그것이야말로 이번 출장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이자 수확이었다.

이후의 일은 아침의 재방송이 될 게 뻔했다. 상구는 미영을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싶지 않았다. 미우나 고우나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눈을 선사해준 사람이 아닌가.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왔다. 다만 세베리에게만은 자신처럼 헛된 망상과 기대를 품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건 지금 이 시간 세베리의 태양초가 겪고 있을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또 같은 경험을 공유한 동지가 갖는 동병상련의 심정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세베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베리.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겨야 할 듯. 미안하이. 그런데 충고하네만 아름다운 것은 항상 독을 품기 마련이라네. 부디 향과 독을 잘 구별하길…….’

경황이 없는 탓인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베리로부터 답신은 없었다. 잠시 폰을 들여다보던 그는 미영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지만 급작스런 일정 변경으로 내일 만남은 취소해야겠군요. 대신 아메리카노 한 잔 대접하지요.’

기프티콘이 나풀나풀 나비가 되어 스마트폰의 화면 위를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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