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카리스마

by 원광우

태양이 귀갓길을 서둔 흔적은 어둠의 끝에 짙게 묻어있었다. 여름하루의 긴 궤적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출장으로 얼룩진 나의 하루도 녹록치 않아 속옷에서 흐릿하게 땀내가 배어났다. 업무용 샘플이 잔뜩 든 가방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러댄 결과였다. 체취에 민감한 견공의 후각을 가진 듯 택시운전수가 자기 쪽의 창문을 내렸다. 난 모른 체 내비게이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비게이션 한쪽 모퉁이에 목적지인 대전역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걸 신호로 핸드폰을 꺼내 코레일앱에 접속했다. 몇 차례 조건을 부여하자 수원행 열차의 목록이 주르륵 화면을 가득 채워왔다. 무궁화호를 선두로 KTX며 ITX 같은 영문 편명들이 뒤를 이었다. 큰 고민 없이 난 무궁화호를 선택했다. 쾌적함이나 소요시간의 측면에서 선뜻 손이 가지 않긴 했지만 이른 출발 탓에 가장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출발시간까지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것도 단 몇 푼이나마 기찻삯을 아낀 것도 위안거리로 삼기에 넉넉했다.

내 좌석은 객차 중간쯤의 통로 측이었다. 좌석 앞에 멈춰선 나는 가방을 앞좌석과의 사이 공간에 던지다시피 쑤셔 넣었다. 선반위로 올리려했지만 이미 지쳐버린 육신에게 그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만큼이나 가혹한 행위였다. 그런 다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 때문에 다리의 위치가 영 어정쩡했지만 좀 벌려 앉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옆자리가 비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이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객차 내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이 보이는 것이 자리주인이 나타날 확률은 로또당첨까지는 아니어도 주사위의 눈을 맞추는 수준이하일 게 뻔했다. 설령 주인이 나타난다 해도 잠시 일어나는 수고만 한 차례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름 플랜 비까지 준비한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출발시간이 되자 열차는 이 나라가 선진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맞춰 안내방송이 객차내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기계음 같은 남성의 목소리가 정차역마다의 도착시간을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아무 감정 없이 읊어댔다. 좀체 무료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저절로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을 계산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덧셈이 아니라 낯선 뺄셈이어서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한 시간 이십 분. 멀뚱히 가기에는 제법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가방 귀퉁이로 손을 밀어 넣자 책 한 권이 잡혀 올라왔다. ‘로마인이야기’를 완독하면서 그 매력에 푹 빠져버린 시오노나나미였다. ‘은빛 피렌체’. 책갈피는 베네치아를 떠난 마르코 단돌로가 피렌체에서 올림피아와 재회하는 장면에 꽂혀있었다. 두 사람의 포옹이 막 풀리던 참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 여성이 내 옆으로 다가와 서있었다. 3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에 우뚝 솟아오른 광대뼈가 꽤 뚜렷한 주관의 소유자임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긴 머리칼이 볼을 반쯤 가려 명암차를 완화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꼿꼿이 선 자세는 커리어우먼의 자태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나를 쳐다보던 눈이 곧 꼬리를 길게 끌며 내 옆자리로 이동해갔다. 누구의 침범도 허락할 수 없다는 자신만의 영역표시이자 강한 수호의지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통로로 비켜난 후 가방을 끄집어내려 부산을 떨었다. 툭하면 꼰대로 몰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그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불행하게도 가방은 그런 나의 의지를 차디차게 외면했다. 어딘가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좀처럼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잠시만, 괜찮아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어수룩한 나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마땅히 해야 할 다음 행동이 떠오르지 않은 나로서는 그녀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팔을 내저으며 잠시 물러서게 한 다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양손으로 앞 뒤 좌석의 윗부분을 잡고서는 훌쩍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그녀의 가녀린 몸은 내 가방을 타넘고는 자신의 자리인 좁은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어 어…….”

그녀의 날렵한 동작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내 벌어진 입은 쉬 다물어지지 않았고 시선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초점을 잃어갔다.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반면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당황하기는커녕 그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는 여유마저 보였다. 까짓게 뭐 놀랄 일이냐며 오히려 반문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이어질 그녀의 활약상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중 관찰했다. 여성적인 매력에 이끌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바람피울 궁리를 하는 게 수컷의 속성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이었다. 육십이 다 되도록 아직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와 양손 가득 기다란 손톱 날을 세운 채 잠복형사의 눈알을 번득이는 아내로 인해 난 이미 준(準) 거세 상태에 돌입해있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나의 관심은 아마도 복선이 실제상황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검증작업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가방에서 A4지 묶음으로 된 인쇄물을 한 다발 꺼냈다. 대놓고 살펴볼 수 없었던 나는 은근슬쩍 곁눈질을 일삼으며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인쇄물에는 한자(漢字)가 가득 적혀있었다. 글자체가 번체(繁體)가 아니라 간체(簡體)인 걸로 보아 중국어문서가 틀림없었다. 더 이상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재크의 콩나무처럼 쭉쭉 자라던 호기심은 금세 모가지를 꺾어버렸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야 했다.

덜컹거리던 기차바퀴의 소음에 묻혀있던 실내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음들이 터져 나왔다. 출입문이 여닫히는 소리, 진동으로 바꾸기를 거부한 할머니의 전화기가 뱉어내는 트로트풍의 벨소리, 통화를 하며 까르르 넘어가는 젊은 여성의 웃음소리, 다분히 취기가 번져나는 중년들의 대화소리. 승객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내는 음향 데시벨은 높았다. 소리는 중첩되어 그 크기를 점점 키우다 못해 급기야 객실내부를 도떼기시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바로 앞좌석의 두 아주머니 목소리는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맘에 끓어오르고’의 소프라노 음역 대를 지나 악을 쓰는 경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리의 근원을 적극적으로 제지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소음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콕 집어 지적하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설령 그런다한들 ‘왜 나만 갖고 야단이야.’ 한다거나 ‘당신이나 잘 하슈.’하고 대든다면 꼬리를 내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인품과 성격의 한계였다.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듣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이이제이라는 특단의 대책도 마라톤 풀코스만큼이나 멀어져버린 독서와의 거리를 결코 좁히지는 못했다.

“아이, 참.”

그녀라고 다르지 않았던지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만이 가득 담긴 그 소리는 남들이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을 만한 크기여서 선전포고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속수무책으로 소극적인 대응을 보인 나와는 천지차이의 반응이었다.

“미자 그년 말이야, 엊그제는 제 사돈될 집에서 보낸 이바지음식으로 내 허파를 확 뒤집어놓더라고 글쎄. 오백만 원짜리라나 뭐래나? 내 눈꼴이 시려서 그냥.”

“지난 동창회 때는 왜 딸내미가 대기업 입사했다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잖아?”

앞자리에서는 오페라가 막을 내리고 연극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두 배우를 향해 손가락질을 두어 차례 했다. 손가락 끝에서 무언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이들이 첫 번째 처리대상이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녀뿐이라는 의식이 지배한 무의식적 행동이었다. 때를 맞춰 머릿속에서 서양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던 그림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들라클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다. 그곳에는 잔다르크를 대신해 그녀가 웃통을 벗어부친 채 붉은 깃발을 앞세우며 돌격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이 나뉘어 각각 앞좌석 두 아주머니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돌발 상황에 놀란 나머지 대사를 까먹어버린 두 배우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그러자 보란 듯이 그녀는 한쪽 손의 집게손가락을 곧추세워 자신의 입술 한가운데로 가져갔다. 동시에 입술 사이로 강한 바람소리가 새어나왔다.

“쉿!”

길지도 크지도 않은 단음절의 그 소리에서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가 풍겨 나왔다. 잠시 눈알을 굴리며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은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수그러드는 모습이 그걸 증명했다. 무안한 표정과 함께 사과의 말까지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네요. 조심할게요.”

단 한 마디로 세상 무서울 것 없어하는 50대 중년여성의 기고만장을 일순간에 제압하다니. 그녀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그녀 주변으로 금빛 후광이 감싸고 들었다. 눈이 부셔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기(神奇)를 넘어 신비(神秘)의 영역에 도달해있었다. 어쨌거나 난 마르코 단돌로의 행적을 다시 쫓을 수 있어 내심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가장자리의 물살을 잠시 잠재웠다고 소용돌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거대한 회오리 속을 수많은 소음 조각들이 계속 떠돌며 원심력에 의해 튕겨 나왔다. 그 중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건 30대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의 통화목소리였다.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 통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좀 부족해도 그냥 그렇게 보고해. 언제 그걸 다 고치냐고? 그것 말고도 나 이번 주에 야근할 일 천지야. 조금 전에도 김 부장한테 전화로 한참 잔소리 들었구먼.”

직장동료와의 업무상 전화가 확실했다. 아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끈적끈적 늘어지며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게 아주 듣기 거북했다. 그녀 역시 비슷했던지 그쪽으로 불편한 시선을 힐끔거리는 횟수가 늘어갔다. 다만 앞의 아주머니 때와는 달리 개전(開戰)만큼은 상당히 자제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두 나라 사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자칭 중립국이 버티고 있는데다, 또 통로라는 바다가 심리적인 거리감을 더욱 키운 모양이었다. 상대를 자신 쪽으로 간단히 주목시키는 것도, ‘쉿’과 같이 단박에 뉘우칠 수 있도록 효과적인 응징을 하는 것도, 말과 행동을 적절히 조합해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 국경을 맞대는 인접국이라는 요건은 필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그녀의 고개가 다시 그를 향해 돌아갔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제법 오랜 시간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난 그것이 그녀의 인내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반증임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기요, 이봐요.”

그를 부르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아까와 같은 카리스마의 칼날이 번득였다.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되면서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바람에 내 몸이 움찔거렸다.

“잠깐만. 옆에서 누가 부르네.”

무감각한 것인지 일부러 세 보이려 무감각한 체 하는 것인지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낸 그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말예요, 왜요?”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상대가 여자라 못내 깔보는 듯한 허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반항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전화를 오래 할 것 같으면 객실 바깥에서 하면 안 되나요? 굳이 우리에게까지 업무내용을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요. 밤늦게까지 야근해야하는 넋두리를 왜 우리에게 하는 거죠? 당신네 부장 뒷담화까지 우리가 들어줘야하나요?”

그녀는 어느새 아마조네스의 여전사가 되어있었다. 남자를 발견하면 바로 죽여 버리거나 노예로 삼아버리는 부족. 서너 발의 화살이 연속적으로 그녀의 활시위를 떠나갔다. 화살은 그가 피할 틈도 허락하지 않은 채 사정없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화살촉 끝의 독은 반항아를 길들이는 신비의 묘약이었다. 그는 졸지에 깨갱 비명과 함께 사타구니 속으로 꼬리를 사린 똥개로 돌변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미처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을 새도 없이 에뜨거라 객실 밖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힘과 논리를 병행한 말솜씨에 지켜보는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슬며시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았다. 활을 쏘기 위해 한쪽 가슴을 도려낸 아마조네스와 달리 그녀는 양쪽 모두 튼실한 가슴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일을 기화로 주위의 많은 사람들 시선이 우리 좌석 쪽을 스쳐갔다. 하나같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경계의 눈빛이었다. 난 괜스레 그 모든 일을 벌인 장본인이 나인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딱히 시선을 고정할 곳을 찾지 못해 망연히 기차의 앞쪽만 응시했다. 그래도 주변의 분위기는 확연히 감지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벌써 두 차례나 그녀의 서슬 퍼런 언행에 곧바로 기가 죽어버리는 사람들을 목격하면서 자신들 또한 똑같은 수모를 당하지나 않을까 모두가 몸을 사렸다. 그건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에서 여지없이 나타났다.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생겼는가 하면 우리 쪽을 가리키며 상대를 조심시키는 사람들이 늘었다. 덕분에 소음은 한결 줄어들었다.

얼떨결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나를 향한 또 다른 질문이었다. ‘이젠 됐나요?’ 내지는 ‘만족한가요?’ 같은. 아니 ‘나 잘했죠?’하고 은근히 칭찬을 강요하는 유도심문의 성격을 띤 것이었는지도. 차마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난 맘속으로 그녀를 향해 수도 없이 엄지 척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된 건 아니었다. 기차객실은 공간이 꽤 넓었고 아직 뒤쪽까지는 그녀의 존재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저 뒤편에서 약간 성질이 다른 소음이 퍼져 나왔다. 사람의 입이 아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 같았다. 주위가 조용해진 만큼 그 소음은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느껴졌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자못 궁금해진 나의 머리도 따라 회전했다.

몇 칸 뒤에서 고등학생 두 명이 나란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피커를 켠 상태로 방송영상을 보는지 거기서는 출연자들의 목소리가 아무런 여과 없이 새어나왔다. 고지식할 정도로 게으름이라고는 모르는 소리 입자들은 실내 공기를 매질로 우리에게까지 그 파동을 빠트림 없이 전달시켰다. 거기다 녀석들은 웃음소리며 박수소리를 이따금씩 추가시켜 진폭과 진동수를 더욱 키워댔다. 주위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고개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이번에도 그녀의 활약을 기대한다는, 박수와 함께 보내는 일종의 응원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잔뜩 찌푸린 눈살사이에서 극심한 피로감이 묻어났던 것이다. 잔다르크도 아마조네스도 체력적 한계만큼은 극복하지 못하는 것일까? 실망한 마음을 그렇게 다스리는데 갑자기 그녀가 팔로 내 옆구리 근처를 툭 쳤다. 드디어 출전을 결심한 것일까? 그러면 그렇지. 병법의 가장 기본이 속임수가 아니던가. 상대의 경계를 풀기 위해 이쪽 전략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구나. 그녀는 손자병법까지도 꿰뚫고 있음이 분명했다. 날 건드린 행동을 출전의 예비동작으로 이해한 나는 그녀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제껏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카리스마의 기운이 이번에는 내 쪽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내 몸을 녹여버릴 것처럼 강렬한 레이저를 눈으로 쏘아대며 학생들 쪽으로 고갯짓과 함께 턱을 두어 차례 튕겨댔다. 원래 비겁함과 약삭빠름은 늘 세트로 붙어 다니기 마련 아닌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의 머리는 암호와도 같은 그녀의 동작을 쉽게 풀어냈다. 해독결과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동안 두 번이나 내가 해결했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한 번 나서보시죠.’

불현듯 얼마 전 지하철에서 겪은 일화가 머릿속을 채워왔다. 내 바로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어디가 불편한지 자꾸 몸을 비비적거렸다. 좌석을 촘촘히 채운 사람들 틈에서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았던 탓이다. 난 최대한 몸을 움츠렸지만 그것만으로 할아버지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계속 꼼지락댔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쪽 옆에 앉은 고등학생이 지나치게 자리를 넓게 차지한 채 핸드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놈은 쩍벌상태로 할아버지의 움직임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견디다 못한 할아버지가 놈에게 다리를 좀 오므리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놈의 입에서 다짜고짜 욕설이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요는 내 돈 내고 탄 지하철에서 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느냐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이유를 설명하느라 몇 마디를 덧붙이자 놈은 벌떡 일어나더니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자세로 위협하기를 불사했다. 그걸 쳐다보면서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봉변은 고스란히 할아버지 몫이었다. 그런 낭패를 나라고 당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면 못 본 체 외면하는 것이 상책이다. 난 그때와 똑같은 수법을 동원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행동을 그저 없었던 일로 치부하며 고개를 숙여 시선을 손에 든 책에 갖다 꽂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곳만이 나의 유일한 피신처였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겁쟁이라 놀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린 녀석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느니 그 편이 백배 나은 일이었다. 답답했던지 그녀가 말을 건네 왔다.

“내 손에는 더러운 걸 묻히기 싫다? 그런 뜻인가요?”

“…….”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잠잠하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도무지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마음속으로 학수고대할 뿐이었다.

“그럼 할 수 없죠. 대신 그 이어폰 좀 빌려줄래요?”

“…….”

그것마저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생략했지만 난 주섬주섬 이어폰을 귀에서 떼어내랴 다른 쪽 끝부분인 잭 단자를 핸드폰으로부터 분리하랴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내가 채 정리하기도 전에 이어폰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빌려달라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좀 나갈게요.”

“…….”

그 말 역시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길을 비켜주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그녀의 몸은 내 다리 위를 휙 날다시피 넘어간 후 객실통로에 서있었다. 마치 아까 자기 자리로 들어갈 때의 영상을 거꾸로 돌리며 역 재생하듯이.

객실 뒤쪽으로 옮겨가는 그녀의 등에서 나를 향한 비난이 쇄도해왔다. ‘머저리 같은 자식. 저러고도 남자라고. 아우 등신.’ 난 얼른 고개를 앞쪽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눈은 그녀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이어폰까지 빼앗긴 내 귀는 그녀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질 못했다. 그녀의 당찬 목소리가 귓바퀴를 거쳐 고막을 울리고는 진동을 더욱 증폭시켜 달팽이관으로 파고들었다.

“학생! 이 기차에 너희들만 타고 있니? 그렇게 예절이 없어서 어떡해. 동영상을 보려면 최소한 소리가 바깥으로 나오지는 않게 해야 할 것 아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어른들보고 꼰대라고 욕할 수 있어?”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학주가 따로 없었다. 그보다 ‘친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 묻던 폭력교사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뱉어낸 말의 뉘앙스만큼은 그때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보지 않아도 비디오요, 재지 않아도 사이즈였다. 그 앞에 앉은 아이들의 표정이 훤히 그려졌다. 심지어 지하철에서 할아버지를 향해 쌍욕을 퍼붓던 쩍벌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엉뚱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조금 전 그녀의 힐난에 곤혹스러워했던 기억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버렸다. 잔다르크에서 아마조네스로, 아마조네스에서 학주로 시도 때도 없이 카멜레온 같이 변신하는 그녀를 체험하는 내 입가에서는 살며시 웃음이 번졌다. 그 사이 풀이 죽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죄송한데요. 저희가 이어폰이 없어서요.”

이런 게 유비무환이 아닐까? 아니 그것만으로 그녀를 설명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의 준비성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용의주도에 주도면밀을 몇 번은 곱해야 할 정도로. 나에게서 이어폰을 빌려간 건 바로 이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었다.

“이어폰이 없다고? 그럴 줄 알았어. 자 그럼 이걸 써.”

“…….”

말문이 막히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어떡하든 구실을 잡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했겠지만 그녀 앞에서는 부처님손바닥 안일 따름이었다. 녀석들의 당혹감이 그대로 내 피부로 전달되어왔다.

“뭐 해 안 받고? 그리고 그건 저 앞에 앉은 아저씨 거니까 다 쓰고 나면 갖다드리고.”

“아……. 예……. 감사합니다.”

송장도 뻗을 자리를 살피는 법인데 아무리 나이가 어리기로소니 상대를 파악하지 못할까? 녀석들의 머뭇거림 사이에서는 강약약강의 본성이 꼼짝없이 드러났다. 막 이어폰을 꽂았는지 녀석들의 자리에서 나오던 소음이 일시에 끊겼다. 아울러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장면들도 페이드아웃 되어갔다.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도떼기시장은 철시를 서두르는 장사치들로 파장분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는 그녀의 발자국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올 뿐이었다. 문득 어떤 식으로든 환영행사를 거행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측으로 비켜서며 그녀를 맞이할 준비에 돌입했다. 비록 꽃은 뿌리지 못할망정 퍼레이드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때 좌석 밑에 놓인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개선행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다름 아니었다. 어디 장애물이기만 할까? 나만 편하자는 몰염치의 명백한 증거물로도 하등 손색이 없었다.

진로방해. 그건 스포츠경기였으면 옐로카드를 부를 수 있는 비신사적인 파울행위에 해당했고, 도로교통법을 적용하면 범칙금에 벌점까지 감수해야하는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소음에서 비롯된 일이어서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야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객차 안을 종횡무진 누비며 독서실총무를 자처할 수 있었던 데는 정숙이라는 아주 초보적인 질서의 확립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 연장선상에는 민주시민의 책임과 정의의 구현 같은 훨씬 상위 개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교육열을 보유한 국민들의 나라, 이 대한민국에서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사람으로서 그걸 모른다면 허리띠를 졸라매며 등록금을 갖다 바친 부모님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노리는 마지막 타깃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발현되었다. 더군다나 이미 한 차례 지시이행위반으로 그녀의 눈에서 벗어난 내가 아니던가.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대비책을 마련해야했다. 아무리 무거워도 가방은 치우는 것이 안전했다. 난 부리나케 가방을 꺼내 이두박근 삼두박근의 조력을 얻어가며 가까스로 선반 위로 들어올렸다. 그 사이 그녀는 월계관을 쓴 니케의 모습으로 내 옆에 도착해있었다.

“짐을 올리셨네요. 불편했던 건 아닌데.”

예상과 달리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왔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가방이 사라졌다는 걸 인식하는 것만 봐도 그녀는 나의 이기적 행위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자신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범죄현장이 철저하게 오염되어도, 범죄의 모든 증거가 사라져도, 범죄사실의 입증을 통해 너 하나쯤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야 일도 아니라는 자신감.

“아뇨. 오가는데 방해가 돼서 미안했습니다. 자 들어가시죠.”

정말이지 공소시효가 지난 죄를 자수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공소제기는 물론 더 이상 사건을 파헤치려는 의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난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검사영감을 모시는 깍두기로서의 면모까지 유감없이 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내가 깔아놓은 레드 카펫 위를 뽐내며 걷지 않았다. 나의 아부를 부정청탁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화려한 영접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방이 사라지면서 몸무게 2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스모선수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진 그 공간을 보행이 아닌 비행으로 지나려했다. 그녀는 아까처럼 과감하게 몸을 날렸다. 앞뒤 좌석 등받이에 얹은 양손을 지렛대로 새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녀의 몸은 정확하게 엉덩이를 좌석에 안착시켰다. 흡사 강자계(强磁界)의 공간속에서 N극과 S극이 격렬하게 키스신이라도 벌이듯이. 지극히 우아하면서 간결하고도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한 착지 아닌 착좌였다. 모름지기 그때서야 난 불을 뿜는 듯한 그녀의 카리스마 원천이 매사 습관화되어있는 체내에너지 절약동작에서 기인한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객차 내부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정작 나는 평화롭지 못했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던 하이데거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근거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독서로 불안감을 덮어쓰려 애를 썼다. 덮어쓰기라면 지우기보다 더 강력한 삭제방법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투를 벌이다시피 눈동자를 활자에 붙들어 매려했지만 그때마다 눈동자는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으며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나의 것이지만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예의 그 중국어자료에 심취해있었다.

그렇게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잠시도 경비를 소홀하지 않던 파수꾼이 시신경을 이용해 첩보를 보내왔다. 그녀에게서 각별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첩보를 정보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정밀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움직이는 건 그녀의 고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손에 연필과 자료를 든 채 그녀는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온갖 수고를 무릅쓰면서 동네반장 짓을 마다않더니 기껏 그 효과가 나타날 때쯤에서야 지쳐 쓰러져버리다니. 과연 그녀는 이렇게 숙면을 취하기 위해 조용한 분위기를 원했던 것일까?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보아하니 전문직 종사자 같은데 늦은 시각 귀갓길에서조차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일인다역을 소화해냈으니 오죽이나 피곤할까? 우습다기보다는 짠하니 안쓰러움이 전해져왔다. 흔들거리는 그녀의 고개가 유난히 무거워보였다. 저러다 금방 잠에서 깨지나 않을까 어깨라도 선뜻 내어주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걸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지만 자칫하다가는 치한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감히 내가 대적하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하무적 카리스마의 주인공이 아닌가.

원거리출장에 나설 때면 매번 넣어 다니던 목 베개가 생각났다. 그거라면 그녀의 상하진동을 멈춰 세울 수 있으리라. 가방에서 목 베개를 꺼내들고는 어떻게 전달할지 궁리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잔다르크나 여전사인 줄만 알았는데 오밀조밀 귀여운 구석이 많은 여자였다. 뿐만 아니라 밀려드는 졸음 하나 참지 못하는 한낱 가냘픈 여자에 불과하다는 게 선한 인상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쩌면 그 유약함을 숨기기 위해 카리스마를 가장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일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일(1)도 없었지만 처녀 총각의 상태에서 만났다면 오늘을 계기로 썸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철로를 바꾸는지 기차가 잠시 덜컹 흔들렸다. 진동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빤히 쳐다보던 내 눈과 마주치자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엉겁결에 난 그녀의 눈앞으로 목 베개를 내밀었다. 별 생각 없이 그녀가 그걸 받아들었다. 그리곤 목에 끼우더니 그 길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잠이 든 걸 확인한 나는 고개를 책 쪽으로 돌리며 다시 독서를 시도했다. 그러자 신기하리만치 책속의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숨은 함의까지 속속들이 전해져왔다. 독서삼매경에 빠져든 지 꽤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숨소리 같은 게 규칙적으로 내 귀를 자극했다. 여린 듯하지만 결코 여리지 않는 그 소리는 그녀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바로 코를 고는 소리였다. 코까지 골 정도로 그녀를 지치게 만든 일상이 한 편의 영화가 되어 열차의 차창위로 펼쳐졌다.

신기한 일은 또 일어났다. 그토록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내가 그녀의 코골이에는 전혀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한 절간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더니 그것과 유사한 현상일까? 뭐 카공족들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이니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오늘 하루 내가 겪은 그녀로 판단컨대 그 코골이야말로 내게는 독서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비타민이나 머리를 맑게 해주는 카페인 같은 강한 각성효과를 지닌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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