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 26일 - 비상등

by 원광우

“부사장님께서 막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모시고 주차장으로 이동 중인데 곧 출발토록 하겠습니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40분 정도면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계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승진의 전화였다. 끊임없는 특근과 야근에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자랑하는 벽시계의 바늘은 어제 공휴일을 보내고도 아직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무실 직원들을 향해 악을 쓰며 업무개시시간이 지났다고 째깍거렸다. 속이 다시 더부룩해왔다. 아침이랍시고 먹은 거라곤 삶은 누룽지 두어 숟갈이 전부였건만. 내시경 후 보다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유를 들었을 때처럼 불안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새벽녘 명수를 픽업하기 위해 사무실로 출근치 않고 바로 광명역엘 다녀오겠다던 승진의 연락을 받으면서부터 생긴 증상이었다. 명수라는 용종이 위 속에서 똬리를 튼 후 그 존재감을 급작스레 키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명수는 이태 전에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증권회사로부터 날아든 낙하산이었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그건 사내에서 공인된 대명사였다. 말끝마다 인사기록카드에 기록된 토익성적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그로서는 낙하산보다 스카우트라는 영어표현을 더 선호했지만 좀체 그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직사유가 전직 회사의 파산 때문이라는 점과 직급이 부사장이라는 점이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주(社主)와 숙질간이라는 관계는 그의 바람을 더욱 무색하게 만들었다. 우호적인 시선을 갖자며 억지로라도 구실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들조차 업무연관성이라는 문제에 다다르면 발목이 잡혔다. 이 회사의 업종인 자동차부품생산과 그의 전직종인 증권업은 정나미가 뚝 떨어져 황혼이혼을 고려 중인 노부부의 입술들만큼이나 서로를 배척하는 대상이었다. 기술이 아닌 관리 분야라면 다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 또한 그의 직무가 펀드매니저였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지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던 사주는 그를 이름에 빗대 구조조정의 명수라는 표현으로 돌파하려들었다. 그의 노력은 낙하산의 재질만 나일론에서 돌로 바꿔놓았을 뿐 허사로 돌아갔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벌써 박힌 돌을 빼내려는 굴러온 돌임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부사장으로의 승진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내 시선에도 그는 하나의 돌이었다. 폭우가 쏟아진 뒤 도로로 떨어져내려 차량통행을 가로막고 선 낙석. 뭐 명수의 입장에서 보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업무적인 측면에서나 조직관리 측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난 웬만한 지렛대로는 뽑아내기 힘들 정도로 깊게 뿌리내린 돌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받침점으로 괼 만한 튼튼한 또 하나의 돌을 구하려함은 물론 힘점에 가해야 할 모멘트를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았어. 조심해서 와.”

통화종료 아이콘을 누르자 전화기 화면이 바뀌면서 그저께 명수와의 통화기록이 유난히 불거졌다. 뱃속에서는 숱한 돌들이 굴러다니며 아우성쳤다.

그날 처음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저녁 여덟시 경이었다. 다른 법 규정은 몰라도 근로기준법만은 철저히 지키려는 직원들이 일찌감치 빠져나간 사무실 창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그때까지 퇴근을 미룬 건 그들의 아전인수식 준법정신이 못마땅해서가 아니었다. 근무시간 면에서 난 오히려 주52시간이 아니라 주40시간, 아니 그보다 더 줄여야한다는 급진론자였다. 늦은 퇴근은 그저 시간의 효율성 제고를 가장한 귀차니즘의 발로에서에서였다. 아홉 시에 아내와 함께 성탄전야미사에 참석키로 약속이 되어있었고, 약속장소인 그 성당이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내리는 눈이 낭만이 아니라 성가심의 원인이 되어버린 나이 탓에 서둘러 책상을 정리할 때였다. 책상 위 전화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엉뚱한 일로 주당 근로시간 준수가 더욱 어려워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확 밀려왔다. 아니 어쩌면 크리스마스에 수당 없는 특근까지 강요당할지 몰랐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응시한 채 다음 동작을 유보했다. 전화기는 실험을 통해 내 가청역치를 구하려는 듯 데시벨 수치를 점점 올렸다. 그칠 줄도 몰랐다. 발신자가 CCTV를 통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난 마루타가 되기를 끝내 거부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벽의 모든 전등스위치를 내려버렸고 사무실을 나서며 출입문을 야멸치게 쾅 닫았다. 떠나기 전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문풍지를 바르는 심정으로 문의 밀폐상태를 점검하기까지 했다. 기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전화벨은 몸에 옮겨 붙은 것처럼 좀체 끊어지지 않았다. 그 집요함에 진저리가 쳐졌다.

엘리베이터가 하방화살표 버튼의 노란 불빛을 지우며 전화벨의 사망선고를 할 때였다. 사무동이라는 공간이 원래 불교의 기운이 넘치는 사바세계였던 것일까?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때 아닌 윤회의 교리가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전교는 생명체가 아닌 소리로까지 대상지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죽었던 전화벨소리가 홀연히 휴대폰 진동음으로 바지주머니에서 환생했다. 고고지성(呱呱之聲)을 달래려 폰을 꺼내자 화면에 명수의 이름이 선명했다.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 있던 두 남자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택시와 달라서 합승이 불법도 아니고 흥정도 필요 없다며 재촉하는 눈빛이었다. 난 고개를 숙임으로서 합승거부가 아닌 호출실수임을 사과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에서 그들의 몸을 서서히 집어삼켰다.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며 여보세요, 응답을 채 내기도 전에 출퇴근시간의 9호선 지옥철이 승객을 뱉어내듯 명수의 목소리가 튕겨져 나왔다.

“전무님 혹시 퇴근하셨어요?”

이제는 이 사람이 퇴근시간까지 감시를 하는 것인가? 의심은 불쾌감을 삼키고 퉁명을 토해냈다.

“퇴근중입니다만, 왜요?”

“아, 사무실로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으셔서요. 혹시 통화는 가능하세요?”

애써 격식을 차리는 가식. 무언가 거북한 대화를 할 때마다 나타나던 어조.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 말씀하세요.”

“모레 말씀인데, 26일요. 그날 별 일 없으시죠?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 수원 사무실로 좀 찾아뵐까 하는데.”

명수의 근무지는 대구의 본사였고 난 원청회사인 H자동차가 자리하고 있는 수원에서 연구소를 맡고 있었다. 업무회의가 열리면 당연히 내가 대구로 내려가야 하는 처지에 그가 올라온다는 말이 왠지 심기를 긁어댔다. 수화기 저편 명수의 얼굴이 유리창에 떠올랐다가 제법 굵어진 눈송이 그림자에 묻히며 흐려졌다. 그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 난 안경을 고쳐 썼다.

“별다른 스케줄이 없긴 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하면 안 되나요?”

물음표가 완성된 후에야 조바심이 에둘러 표현하는 여유를 꿀꺽했음을 깨달았다.

“아뇨, 제가 가서 말씀드리죠.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흐려지는 그의 말끝에서는 초조해하는 내 심리를 벌써 읽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노름판을 전전하며 상대의 패를 읽어내는 기술을 습득한 타짜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실수를 범했지만 게임의 주도권을 이대로 넘겨줄 수는 없었다. 흐름을 끊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난 실랑이를 포기하고 승부를 다음 판으로 미루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도록 하죠.”

궁금증을 억누르며 통화를 끝냈지만 의문은 스프링인형이 되어 자꾸 상자의 뚜껑을 뚫고 머리를 디밀었다. 바깥 어딘가에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이 흘러들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번쩍 튀면서 ‘연말 → 구조조정의 명수 → 인사이동’이라는 플로차트(Flow Chart)가 그려졌다. 그 배경에는 그동안 이어져온 명수와 나의 관계에 대한 직원들의 한 줄 평이 자리하고 있었다. ‘톰과 제리의 엘 클라시코.’ 인사이동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항상 소문의 포토라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노크소리가 났다. 인기척을 하자 문 뒤에서 승진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부사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두터운 코트 차림의 명수가 막 이쪽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가까이 오기도 전에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악수를 청해왔다.

“전무님. 안녕하셨어요? 하하하. 제가 자주 찾아 봬야하는 데 그러질 못해 죄송합니다. 이거 오랜만에 뵙는군요.”

능글거리는 웃음에 속이 오글거렸다.

“새벽에 출발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찍 도착하신 걸 보니. 혹 오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자,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이방인의 서울 표준어에 고향사투리의 억양이 지워질 수 없는 것처럼 친절을 담으려는 내 억양에 거북함이 역력했다. 표정이야 안 봐도 유튜브였다. 아무리 기를 써도 위장술은 내 전공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군대에서 위장을 할 때마다 떡칠이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인간에게 보호색을 부여하지 않은 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명수의 반응은 이런 나와 완벽한 데칼코마니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방의 가운데쯤 놓인 원탁 옆에 서서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벗은 옷은 반으로 접어 의자의 등받이 위로 던지다시피 걸었다. 거침없어 보이는 그의 행동은 대범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신경질적인 투박함이 옹졸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는 양복 윗도리의 단추를 하나 풀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거짓 친절과 가장된 대범함은 화학적 결합을 통해 침묵을 생성했다. 명수가 앉은 상태에서 장난스레 의자를 한 바퀴 뱅그르르 돌렸다. 그에게도 보호색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차나 한 잔 하실래요?”

분위기 전환은 호스트의 몫이었다. 매개물로는 만만한 게 마실 거리였다. 그럼에도 난 구태여 ‘차’라는 대표명사 뒤에 ‘나’라는 조사를 덧붙임으로써 언짢은 기분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그냥 커피나 한 잔 주세요.”

손오공의 화안금정(火眼金睛)을 가진 것일까? 명수의 대답에도 동일한 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치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되치기를 시도하는 듯했다. 이어지는 껄껄거리는 웃음이 그걸 대변했다. 기선제압에 실패한 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불리한 국면을 모면하기 위해 곧바로 문 앞에 서있는 승진을 향해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그려보였다. 커피 두 잔이라는 뜻이었지만 역전을 도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기도 했다.

승진이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걸림쇠가 딸깍 걸리며 비로소 본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명수가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앉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공격과 수비의 전술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면서 몸을 푸는 동작이었다. 규칙적이면서 반복적인 그 소리는 초나라의 노래가 되어 나의 전투의지를 꺾으려들었다. 지난 이틀간 느껴야했던 불안감이 온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소리의 주기가 점점 길어지다가 마침내 멈추었다.

“전무님께서 연구소를 맡으신지 얼마나 되셨죠?”

명수는 잽이 아니라 바로 훅을 날리면서 들어왔다. 난 내가 그린 플로차트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최근 사내에는 한 가지 루머가 떠돌았다. 평택공장을 매각한다는 얘기였다. 평택공장은 별도법인으로서 자회사였다. 얼마 전 그곳에서 노동자 한 명이 작업 중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노조는 회사가 전적으로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반면 회사는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은 작업자의 과실 또한 적지 않음을 주장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했지만 명분 쌓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테이블에 오른 안건 어느 하나도 조율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의견일치를 본 것이 협상결렬선언이었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는 직장폐쇄로 대응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역대 대통령의 그 한 마디는 지방신문의 기사 헤드라인이 되어 인터넷공간을 떠돌았다. ‘가동률 저하 → 매출급감 → 손익악화’라는 또 하나의 플로차트가 완성되어갔다. 이에 골치 아파진 사주가 앓던 이를 뽑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빨 빠진 개호주라도 개천가의 피리들에게는 무섬증을 유발하는 법이니 체구를 줄여서라도 이 바닥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겠는 것, 그게 소문의 핵심이었다.

한 부서에서의 근무기간을 묻는 명수의 질문은 나를 미아리의 소문난 작두도사로 변신시켰다. 오늘 그의 방문목적이 나를 평택공장으로 발령 내려는 의도라는 계시에 나의 신기(神氣)가 가닿았다. 전보조치를 취한 다음 공장을 매각해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그의 주특기인 구조조정의 백미가 아닐 수 없었다. 눈엣가시인 나, 속 시끄러운 노조문제, 나빠진 수익구조, 이 모든 문제를 비풍초똥팔삼의 순으로 정리할 절호의 찬스였다.

“벌써 5년이 지났네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난 고수인 그가 벌인 고스톱 판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

“5년이라, 짧은 시간은 아니네요. 그동안 우리 연구소가 참 많은 연구를 진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나요?”

부가의문문에는 비아냥의 흔적이 뚜렷했다.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 포문을 여는 셈이었다. 말이란 하면 할수록 화자의 본색이 묻어나는 법, 난 말을 아꼈다.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침묵이 최선의 전략이었다.

“…….”

“제가 조사를 해보았더니 전무님께서 부임한 이후로 연구 실적이 아주 많더군요. 그것도 모두 성공적 수행이었구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연구결과가 현장에 적용되어 수익으로 이어진 사례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건 다시 말해 R&D가 회사에는 실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는 묵비권을 암묵적 동의로 활용하기 위해 돌려까기 전술을 구사했다. 심지어 유도심문까지 불사하며 진실을 호도하려 들었다. 왜곡과 날조의 귀재인 정치검사의 본색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지금이야말로 침묵이 아니라 웅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연구 개발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개발하는 족족 성공하고 바로 현장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질 못하니까 거기에는 투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일 테지요. 또 저희들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의미는 원천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얘기지 양산기술까지 개발했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양산기술까지 개발하려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 R&D 투자비라는 게 도대체 있기나 합니까? 그나마 여태까지 해온 것도 국책과제를 수행하면서 지원받은 정부지원자금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게 연구비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회사에 도움을 준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번에 저희가 신기술을 접목해 개발한 생산시스템의 수출이 곧 성사될 단계에까지 와 있지…….”

“아, 그 유연생산시스템인가 하는 것 말이죠? 전무님께서 이번에 일본 출장 가시는 게 그걸 수주하기 위함이라면서요. 그것도 말로는 거의 수주되었다고 하지만 계약이 끝나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

명수는 사정없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다. 화제가 전문성의 깊이를 더할수록 불리하다는 걸 동물적인 감각으로 인지한 무조건 반사였다. 다급한 나머지 수주와 계약을 기회가 아닌 위기로 여기는 인지부조화 증상마저 뚜렷하게 나타났다. 상대가 자장면을 혼자 먹겠다고 침을 뱉자 그 위에 다시 자신의 침을 뱉어 아무도 못 먹게 만들어버리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기가 막히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눈을 아래로 깔더니 헛기침을 몇 차례 해댔다. 속내를 드러낸 노골적 표현에 아차 싶었을 것이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내가 해야 할 응답이 그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예.”

퇴로를 발견한 다행함이 가득 녹아든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승진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고 들어와서는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놓았다. 구세주의 출현에 임마누엘을 외치는 찬사가 명수의 입에서 쏟아졌다.

“난 말예요. 이 믹스커피가 제일 맛있더라구요.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의 배합이 정말 황금 비율이지 않습니까? 이 차장 생각은 어때?”

마음 같아서는 황금비율이 정확히 몇 대 몇인지를 알기나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의 능수능란한 카멜레온급 변신은 임기응변의 끝판왕경지에 도달해있었다. 난 하릴없이 라는 황금비수식의 해답을 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도 믹스커피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비위를 맞춰주는 승진의 아부가 만족스러웠던지 명수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후루룩거렸다. 딴에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흉내라도 내고 싶었는지 몰라도 역겨운 그 소리에 난 커피를 마시고픈 욕구가 일시에 사라졌다.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커피, 프림, 설탕 세 가지 중에 도대체 무엇을 1로 하고 또 무엇을 1.61803398……배로 넣었다는 것인지 이해하려 애를 썼다. 문이 닫히자 그가 잔을 내려놓고 하던 말을 이어갔다.

“정부지원자금 문제도 그래요. 제가 지난번에 얘기한 적 있지만 그걸 연구비로 다 써 버릴 게 아니라 일부는 회사에 필요한 자금으로 전용할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그거야말로 회사에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이기도 하구요. 그게 원칙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제가 알기로 다른 회사들도 다 그렇게 유용하고 있다고 그럽디다. 그걸 전용해서 썼다면 어려운 회사 살림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겠어요? 그것조차 반대를 하고 나서더니 결국 연구비랍시고 다 날린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에게는 자신만이 절대선(絶對善)일 뿐 다른 모든 사람은 악의 근원에 불과했다. 전형적인 자기중심적 소아병 환자였다. 아이들과 정치가들만 그런 병을 앓는가했더니 그 병원균은 어느새 이 회사에까지 침투해있었다. 과히 팬데믹이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펼친 기적의 논리는 공맹노장이라 한들 반박이 궁색했다. 뭐라고, 연구비를 다 날렸다고? 직속상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날 어깃장을 놓듯 자신이 한 부탁에 내가 거절한 일을 두고 명수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대구의 본사에서 임원회의가 열리던 날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수원으로 돌아오려는데 무슨 까닭인지 명수가 한사코 붙들고 늘어졌다.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원근불문(遠近不問), 청탁불문(淸濁不問), 도수불문(度數不問)을 술자리의 3대 철칙으로 여기던 주당으로서 평소 같았으면 더없이 반길 나였지만 왠지 그날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의 은밀한 말투가 다분히 느와르장르였던 까닭이다. 게다가 세계사를 돌이켜볼 때 그 질곡의 현장에는 항상 술과 여자가 자리하기 마련이었다. 온갖 구실을 꾸며대며 몇 차례나 거절했지만 명수는 끈질겼다. 상사라는 신분이 낯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원수지간으로 척을 지겠다는 각오를 않는 이상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사건을 계기로 결국 그는 여당의 실세로 난 재야세력으로 대척점에 서고 말았지만.

퇴근시간이 되어 우리가 찾아간 곳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일식집이었다. 그곳의 해산물은 지도에 대구를 섬이라 표기한들 의심치 않을 정도로 아주 싱싱했다. 어쩌면 메기효과를 능가하는 나름의 운송과 보관 노하우가 대대손손 전해지는 집인지도 몰랐다. 그걸 안주로 두주불사(斗酒不辭)한 뒤였다. 아마도 거의 술자리가 파해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공깃밥과 함께 매운탕이 막 들어오고 있었으니. 명수의 진의를 파악하려 난 긴장의 끈을 바싹 죄고 있었다. 그러나 상승한 혈중 알코올농도가 멜라토닌 분비량을 늘리면서 집중력은 차츰 흐트러졌다. 명수가 단숨에 소주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연구소장인 내 앞에서 액체로 던지기를 하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선전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전무님, 건의 하나 합시다.”

그의 입에서 출발한 건의는 내 귀에 도달하는 순간 명령으로 바뀌어있었다. 술이 폐활량마저 턱없이 줄여버린 것일까? 가슴 주변으로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불안했다.

“무슨 내용이신지…….”

겁에 질린 개꼬리마냥 내 말꼬리가 말려들어갔다.

“국책과제를 수행하는 정부지원자금 말인데요. 그걸 회사의 경비로 전용해서 쓸 수 있도록 박 전무님께서 힘을 좀 써주세요. 부탁합니다.”

R&D를 장려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기업에서 발굴한 연구개발 아이템 중 우수한 것들을 선발해 정부에서 자금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있다. 당시 우린 자동차부품과 관련한 몇 가지 신기술이 거기에 선정되어 개발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 자금을 돌려쓰자는 말이었다. 불법을 편법으로 포장하기 위해 그는 언어의 뜻마저 돌려쓰는 용의주도함을 발휘했다. 도용은 전용으로, 잔꾀는 힘으로, 사주(使嗾)는 부탁으로 탈바꿈해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부사장님, 그건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개발빕니다. 회사에 연구개발비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것마저 없으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된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부 연구비를 전용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잘못되면 제가 구속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에요.”

대비하면 재해로 그칠 일도 설마 하는 순간 재앙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난 ‘설마 진심일까?’ 의문을 갖기보다 내가 처할 위험을 부각시키는 전략이 유리하리라 판단했다.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술개발은 그냥 문서상으로 적당히 완료한 걸로 꾸미면 될 일이고, 거래업체를 이용해 거짓 세금계산서를 발행한다면 자금의 집행내역도 증빙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차피 프로젝트의 진행상황 점검도 서류위주가 될 것이니 문서들만 앞뒤를 잘 맞춰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전무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죠. 그게 연구개발에 성공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회사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범죄를 기업회생의 묘수로 둔갑시키는 망발에 가까웠다. 어렵사리 국민의 뜻을 모아 국회에서 법을 바꾸어놓았더니 초헌법적 시행령 개악으로 입법취지를 무시해버리는 정부를 대하는 듯했다. 말 뿌리에는 회사에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위라면 회사원으로써 까까빼빼(까라면 까고 빼라면 빼라의 줄임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터무니없는 논리마저 스며들어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회사에 몇 푼 도움을 주고자 저와 모든 연구원이 범법자가 될 수는 없지요.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착한 거절이란 애당초 없으며 틈은 보이는 순간 간격을 넓혀가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상처를 걱정하다가 오히려 오해의 후폭풍에 휘말릴 공산이 컸다. 이왕 거절할 거면 단칼에 휘두르는 게 뒤탈을 없애는 최고의 방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노력, 검토, 최선’과 같은 단어는 금기어였다. 그것들이야말로 당장 내일 아침 ‘결단, 합의, 확정’으로 변질되는 빌미를 제공할 게 뻔했다.

“아니, 범법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서류상으로는 적법하도록 아무 문제없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연구비를 보다 유용하게 쓰자는 그런 얘기지.”

명수는 느린 변화구를 노렸는데 시속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가 들어오자 허를 찔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루킹삼진을 당한 무안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말까지 얼버무렸다.

“그게 그 말씀 아닙니까? 실제 사용하는 용도가 다른데 서류상으로 맞는 것처럼 꾸민다고 해서 불법이 합법으로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더는 이 얘기를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몇 차례나 파리채를 내려쳤지만 버둥거림을 멈추지 않는 바퀴벌레를 향해 난 에프킬러를 쉴 새 없이 뿌려대는 확인사살을 자행했다.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내 목소리의 끝이 파르르 떨렸다. 화음을 맞추듯 명수의 입술도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그의 손과 입 사이에서 술잔의 왕복속도가 초음속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그 횟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우리 둘 사이의 공기는 음파의 진동마저 멈춰 세울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두 사람이 헤어질 때였다. 명수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등을 돌렸다.

“전무님. 오늘 이 자리, 우리 두 사람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생활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안녕히 가십시오.”

엘 클라시코의 대전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건 명승부가 아니라 직속상관이라는 어드밴티지를 보유한 명수의 홈구장에서 벌어지는 완벽한 편파경기였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일방적인 해코지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나의 모든 기안이나 제안은 명수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반려되거나 묵살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R&D의 성공률이 거의 100%에 가까운데 회사의 실적은 날이 갈수록 손실이 커져만 간다? 이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명수의 빈정대는 말 속에서 보복의 칼날이 서걱거렸다. 회사의 실적악화가 나의 잘못이라면 상사인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말인가. 되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 질문마저 포함된 각본으로 리허설까지 마친 연극을 공연할 게 뻔했다. 그 어떤 논리나 명분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 앞에서는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는 핑계이자 변명이 될 뿐이다. 난 입을 닫았다.

“혹시 이번에 H자동차의 인사이동 이야기 들으셨어요?”

명수가 간보기를 시도했다. 정치검사인줄 알았더니 그는 아예 약삭빠른 정치가가 다 되어있었다. 인사이동은 메타포도 알레고리도 아닌 나의 전출을 기정사실화하는 직설적 표현이었다.

“아뇨, 들은 바 없습니다만…….”

나의 부정적 답변은 보다 정확하게 그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은 다그침에 해당했다.

“그러시군요. 자, 그럼 어떻게 한다? 이거 워낙 무거운 얘기가 돼놔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군요.”

그가 다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조금 전과 달리 그 주기는 한층 빨라져있었다.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시계의 초침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리드를 잡자마자 몸을 스치기만 해도 금방 죽을 것처럼 반칙을 호소하며 땅바닥을 뒹구는 침대축구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성급함은 금물이었다. 조급증을 카페인으로 달래기 위해 난 잔을 들어올렸다. 커피에는 이미 향과 온기가 사라져있었다. 기대가 충족될 리 만무했다. 커피 잔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서 쟁반과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동시에 명수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H자동차의 구매부장이 이번 연말인사에서 해고를 당했어요. 면직처분된 것이죠.”

대화의 기류가 점점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경기지연 전략만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럼에도 난 최대한 시간을 아껴 쓰려 침묵을 고수했다.

“문제는 그의 면직사유가 우리 회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최 차장 아시죠? 최경식이.”

경식이라면 얼마 전 승진이 팀장을 맡기 전까지 설계팀장으로 일하던 친구였다. 그는 근무 태도가 매우 불량했다. 번번이 지각을 일삼았고 쓸데없는 외출이 잦았다. 도박에 빠져 사채를 끌어다 쓰는 바람에 회사로까지 채권자들이 들이닥치는 등 사생활도 문란했다. 업무측면에서도 실수가 빈발해 회사에 끼친 손해 또한 적지 않았다. 난 근무기강의 확립차원에서 그를 팀장에서 보직해임 시켜버렸다. 물론 일부 사례만으로 결론을 도출할 때 빠지기 쉬운 일반화의 오류라는 위험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 그 사례라는 것이 워낙 여럿이어서 오류발생확률을 제로로 수렴시켰다. 결정에 불만을 품은 그는 약 3개월 전에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최 차장이 H자동차 감사부로 투서를 했대요. H자동차 구매부장이 우리 회사의 사장님에게 골프채를 뇌물로 받았다구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일까? 아닌 밤중에 날아든 골프채와 투서가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연장전의 경기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우리 편이었던 경식이 상대골대가 아닌 우리골대를 향해 힘차게 드리블하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은 이어지는 명수의 말로 곧 밝혀졌다.

“나도 몰랐던 일인데 오래 전에 그 구매부장이 우리 회사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나 봐요. 고마움의 표시로 사장님께서 골프채를 한 세트 사서 최 차장 손에 들려 그에게 전달했구요. 그걸 기억하고 있던 최 차장이, 사직하면서 가졌던 우리 회사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투서로 표현한 것입니다. H자동차에서는 곧 감사에 착수했고 그게 사실이라는 걸 밝혀낸 거죠.”

블랙박스 영상을 재생이라도 하는 것처럼 뇌물수수의 정황이 시나브로 드러나고 있었다. 한편의 스릴러물을 원했던지 그 와중에도 그는 도움의 상세내용을 슬쩍 감추는 티저광고 전략을 선보였다. 덕분에 궁금증은 한층 증폭되었다. 명수야말로 타고난 어그로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난 은근히 가중되는 위기감 뒤에 찾아올 클라이맥스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와의 연관성을 캐내려는 의지는 그 기대감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 일로 뇌물을 공여한 사장님에게도 페널티가 주어졌습니다. 우리 회사가 H자동차에 납품하던 물량의 일부를 반납하도록 요구 받은 거죠. 매출로 따졌을 때 20%에 해당하는 상당히 큰 물량입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회사 살림이 더 어렵게 된 셈입니다.”

페널티라는 단어가 우리 지역에서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심판의 호각소리로 바뀌어 다가왔다. 판정은 치명적이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의 반칙은 경식이 했지만 팀 성적은 내 연봉에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몇 번이고 슬로우 모션으로 비디오를 돌려봤지만 경식이라는 기점과 회사의 매출이라는 종점 사이에 나를 거치지 않는 길은 없었다. 더구나 정황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명수는 나를 놀래는 것만으로 부족했던지 스스로도 흥분하고 있었다. 한숨을 한 번 훅 내쉬고는 다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주기가 한결 느려진 게 상승한 심박수를 늦추려는 듯 보였다. 그 소리는 금방 멈췄다.

“사장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셔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한다며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우린 인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고 그 시행안에 대해서는 사장님의 재가까지 얻었습니다.”

기다리던 뇌물공여의 목적은 인사위원회 이야기에 묻혀들었다. 이슈를 이슈로 덮는 그의 화법은 나를 더욱 미궁으로 빠뜨렸다. 인사위원회라면 나 또한 일원이었다. 왜 난 이번 인사위원회에서 배제되었을까? 명수는 왜 내 앞에서 골프채 사건이 회부된 인사위원회를 들먹이는 것일까? 도대체 그 결론이 무엇이기에?

“사건의 모든 원인은 최 차장에게 귀결된다는 것이 인사위원회에서의 통일된 의견이었습니다. 또 최 차장의 불만은 박 전무님의 인원관리 미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대부분 동의를 했구요. 팀장해임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라고 본 것입니다.”

개연성이 한층 빛을 발하던 명수의 시나리오는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허점이 드러났다. 결말을 예고하는 복선이 너무 허접했다. 티가 나도 너무 났다. ‘회사의 손실 → 나의 책임 → 전보조치.’ 그들이 새로 만들려는 플로차트에 객관성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도 틀려먹었다. ‘불법행위 고발’의 해결책을 ‘불법’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고발’에서 찾으려들었다. 사과 값이 오른다고 국민이 아우성을 질러대니 오렌지를 대신 먹으라는 정부와 무엇이 다를까? 전형적인 프레임전환 술책이었다.

위안을 주는 부분이 없지 않기는 했다. 대부분이 동의했다는 말은 모두가 동의한 건 아니라는 의미였고 양심 있는 임원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응원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하찮은 박테리아도 죽을 때는 비명을 질러 주변 동료들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어쩔 수 없이 좌천을 받아들이는 한이 있어도 비겁한 굴복이 아닌 대승적 수용임을 알리고 싶었다.

“결론을 내린 게 아니라 만드셨군요. 인사위원회에서 저를 배제하신 것도 그 때문이구요. 그래 오늘내일 매각절차만 기다리는 평택공장으로 저를 보내니 속이 후련합니까? 까짓것 가라면 가죠. 목구멍 횡포를 무슨 수로 견디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공격은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법이다. 난 침묵모드에서 돌변하며 서슬이 퍼럴 정도로 날을 세워 달려들었다. 불의의 일격에 명수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기습에 미처 대비 못한 당황의 결과는 아니었다. 난 승리의 쾌감이 뇌의 쾌락중추를 채 자극하기도 전에 경제전문가들이 떠들어대는 주가와 환율예측만큼이나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직감했다.

“예? 평택 공장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번 인사위원회에서 평택공장과 관련한 검토를 한 바는 전혀 없습니다만…….”

너무 앞서간 것이 역풍을 불러왔다. 수비를 도외시한 채 닥공(닥치고 공격의 줄임말)모드에 돌입한 것이 실책이었다. 섣부르게 전략을 노출한 게 뼈아팠다. 엎지른 물을 걸레질로 주워 담아 남은 물마저 구정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후회만 남게 하는 입은 닫고 깨달음을 주는 귀를 활짝 열어야 했다.

“사실 이번 인사위원회에서는 골프채 문제를 계기로 조직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를 하고자 했습니다. 앞으로 매출이 크게 떨어지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회사 재무구조의 개선을 위해 조직을 슬림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 우선대상으로 연구소를 택했습니다. 아까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현재 연구소가 회사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연구소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

방심한 결과치고는 너무 참혹했다. 나와 명수와의 전투인 줄 알았더니 연구소와 회사의 전쟁이었다. 명수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앞에 나의 임전무퇴(臨戰無退)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역시 이순신의 전략이 원광법사의 전술보다 우위였다. 이미 사장의 승인까지 득했다니 남은 절차라곤 공표와 실행 뿐 그걸 저지할 방법은 더욱 묘연했다.

“연구소의 3개 팀 중 개발팀을 생산본부의 생산팀으로 흡수 통합시키기로 했습니다. 설계팀과 연구팀의 경우는 상당수의 인원을 다른 부서로 전환배치한 후 인원을 대폭 줄여 운영하기로 했구요. 또 본부급인 연구소를 실급으로 격하시키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전무님께는 골프채 사건도 있고 해서 권고사직을 시행키로 했습니다.”

창밖으로 몇 대의 전투기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갔다. 주변의 공군 비행장에서 모의훈련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에어쇼를 펼치는지 꼬리의 궤적을 따라 다채로운 색상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하늘에 수를 놓았다. 권고사직, 네 글자가 내 시선을 어지럽히다 차츰 흩어져갔다.

“조직개편은 며칠 후인 내년 1월 1일부터 바로 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전투기의 소음이 여운으로 남아 쉭쉭거렸다. 나쁜 시력이 청력에 영향을 미치듯이 청력의 장애로 시야가 흐려졌다. 간유리를 통해 비치는 것처럼 명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는 나를 피해 고개를 모로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모레부터 1월 1일까지 전무님 해외출장이 예정되어 있죠? 사실은 그래서 제가 오늘 급히 올라온 것입니다. 내일은 토요일이라 얘기를 전할 수 있는 날이 오늘밖에 없더군요.”

30년간을 한결같이 근무해왔지만 그 경력으로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등허리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지게를 짊어진 것 같았다. 시간이라도 넉넉하다면 어디 주변에서 지게 작대기라도 찾아 일어설 엄두라도 내보련만 당장은 그 비슷한 새끼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시간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줄 명수도 아니지만 자존심이야말로 내 삶의 버팀목이었다. 우리네 삶에 퇴로란 처음부터 없었다. 정신줄 놓은 할머니가 낭떠러지를 앞에 두고도 손주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한 걸음씩 나아가듯 직진 말고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모레 출장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 주십시오. 그래도 30년 근무했던 곳을 떠나는데 정리하려면 며칠의 시간은 필요치 않겠습니까?”

아무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외출장을 갈 수 있을까? 나를 버린 회사를, 아니 그들을 위해서? 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지만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라는 그의 말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또 현재로써 나에게는 혹시라도 우리 가족들의 입에 밥줄을 치려는 거미가 있는지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절박한 일이기도 했다.

“그 생각에 동의는 합니다만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생각으로 이번 출장은 다녀오셨으면 하는 게 사장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수주가 불투명해도 전무님께서는 수주확률이 높다고 계속 말씀하셨으니까 그나마 기대를 해보자는 생각이시겠죠. 미우라라고 그랬나요? 그쪽 업체 사장인 그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관련된 기술적 지식에 대해서도 전무님만한 분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대신 출장일정과 상관없이 전무님의 퇴직일은 12월 31일로 했으면 합니다. 연말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회사나 전무님 측 모두 여러 면에서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은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권고사직을 알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애사심을 강요하는 그의 몰염치에 몸서리가 쳐졌다. 뿐만 아니었다. 자칫 발생할지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사주(社主)를 엄폐물로 삼는 치밀함은 비위를 건드리다 못해 상하게 만들었다. 메스껍던 속이 뒤집어지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뱃속에서 꿈틀대던 명수라는 용종은 단순한 염증이 아니라 살모넬라와 비브리오의 숙주였나 보다. 그는 그렇게 세균들을 배양하면서 적자생존의 생태계에서 적자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치트키가 권모술수(權謀術數)와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뒷문과 뒷구멍을 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 세상이야말로 나에게는 가상현실이었다.

난 인내의 달인 행세를 해야만 했다. 인내는 미덕이 아니라 화병의 근원이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병을 다스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포기와 체념을 양분삼아 고개를 든 또 다른 인내심이었다. 그 곁에서 위로자로 등장한 건 자기합리화였다. 만약 이번 수주에 실패한다면 그들은 그 책임마저 싸잡아 나에게 미룰 사람들이었다. 그래, 떠나는 판국에 억울한 누명까지 쓸 수는 없지. 미우라 사장과도 마지막 인사는 필요했다. 오랫동안 비즈니스 파트너를 넘어 인간적으로 우정을 쌓아왔던 사람이 아닌가. 출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리로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난 출장을 가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저도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군요. 출장을 다녀오다 보면 대구에 있는 제 숙소를 정리할 시간이 빠듯할 것 같은데 말미를 좀 주시죠.”

본사로의 출장이 잦았던 탓에 경비절감의 차원에서 대구에 있는 회사 소유의 원룸을 난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걸 사용한 것도 어언 5년. 그 또한 정리하자고 들면 예삿일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효율성과 편리함을 추구해온 인간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때문에 어딘가에 정착해 생활하다보면 사용하는 도구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생활 짐은 인체의 각질과도 같아서 함께 살 때는 모르다가도 막상 옮기려 내놓으면 상상할 수 없는 부피로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이삿짐센터의 역할까지 스스로 감당해야할 형편이니 그 또한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단출한 혼자 살림인데 오늘 내일 이틀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괜히 자해행위를 한 기분이 들었다. 명수가 뿌려댄 소금이 상처에 닿으면서 고통스러웠지만 지혈에는 자못 효과가 컸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가능하면 제 날짜 안에 정리해보겠습니다.”

시간을 더 끄는 것은 무의미했다. 비로소 ‘포기 → 수용 → 멈춤’이라는 마지막 플로차트가 완성되었다.

“어쨌든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전무님께서야 워낙 훌륭한 분이시니 곧 또 자리를 찾으시겠죠.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명수는 흡족한 듯 일어나 의자에 걸쳐있던 코트를 챙겨 입었다. 그 사이 난 문을 열어 배웅할 채비를 차렸다. 우린 잠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가 놓았다. 수족냉증이 있는지 그의 손이 한결 차가웠다. 승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명수가 걸어가는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명역까지 다시 명수를 바래다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늘따라 녀석의 몸동작에서 지나치게 서두르는 흔적이 역력했다. 난 명수를 기억에서 삭제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문을 닫았다.

회의실에 부하직원들을 모아놓고 사직사실을 알렸다. 초라해지기 싫어 사직사유로는 아무도 믿지 않을 줄 알면서 누구나 꼽곤 하는 개인사정을 들었다. 놀란 표정들을 지으며 분개하는 바람에 약간의 소요가 일 거라 생각했지만 시종일관 차분한 분위기에 내가 도로 놀랐다. 나의 일이지만 오늘의 결과를 그동안 나만 짐작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 역시 자기중심적 소아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명수의 손놀림에 맞추어 행동하는 구체관절인형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수화기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가 통화가 개시되었음을 알렸다. 곧이어 갖가지 소음들이 섞여들었다. 영숙은 외출 중에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어딘가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기는지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소식을 전하는 건 고사하고 운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당신, 지금 어디야?”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태연을 가장한다는 것이 더 어색해 내 말끝이 흔들렸다. 차량의 클랙슨 소리가 대화 속에 끼어들며 흔들리는 말끝을 덮었다. 먼 곳에서 응급차의 사이렌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전통시장에 와 있어요. 요즘 과일이 좀 비싸요? 그래도 여긴 나은 편이니 그걸 좀 살까 싶어서요. 당신, 사과 좋아하잖아요. 가격이 두 배나 뛰었지만 그래도 우릴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는 당신 생각해서 한 봉지 샀죠. 그런데 왜요?”

영숙의 목소리는 명도가 흰색에 가까웠다. 퇴사소식을 전하기에 더없이 적기였다. 다행이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의 함수인 필립스곡선처럼 우울증 지수와 목소리 명도 사이의 관계식 역시 반비례곡선일 테니까.

“저기 말이야…… 오늘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나, 이번 연말부로…… 회사 관두기로 했어…….”

난 실어증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뜸을 들이며 더듬거렸다. 말줄임표가 그려질 때마다 속울음이 삼켜지며 목이 메었다.

“…….”

영숙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간간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바람소리도, 차량들의 소음도, 왁자한 시장의 분위기도,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최대로 볼륨을 키워놓았던 TV앞에서 불시에 음소거 버튼이 작동된 듯했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오면 이럴까? 전화기를 확인해보았다. 전화는 아무 문제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영숙의 상태가 걱정된 나머지 다시 입을 달싹거리려는데 그녀의 씩씩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터져 나왔다.

“잘 되었어요, 여보. 당신 요새 많이 힘들어 했잖아요. 덕분에 좀 쉬죠, 뭐. 안 그래도 나, 유럽여행 한번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영어를 못해 걱정했는데 당신하고 같이 가면 되겠네. 당신 영어 잘 하잖아요. 어쨌거나 오늘은 빨리 집에 오세요. 우리 둘이서 진하게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아셨죠?”

내 눈동자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포화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 대구 숙소의 짐을 정리해야 해서 오늘 저녁에 거길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모레부터 왜 일본 출장이잖아. 그건 가기로 했거든. 통화 끝내는 대로 바로 대구에 가려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멈춰선 것 같았다. 아니 모든 게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내 몸만 일시정지상태였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 조금만 기다려요. 짐 정리를 하려면 혼자서는 힘들 테고 또 이런 기분 상태에서 당신 운전하면 안돼요. 지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제가 지금 바로 당신 회사로 갈게요. 제 차로 대구 함께 가요.”

“…….”

“여보, 알았죠? 회사 정문 앞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네?”

잠시 영숙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울려나는가 싶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회사 정문 앞에 도착했지만 어떻게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도로 옆으로 간이 화단이 조성되어있었다. 간신히 몇 걸음 옮겨 화단 난간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겨울하늘은 어제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켜온 내 삶이 암흑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세상은 바뀌려는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바뀌지 않는 세상을 바꾸려면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어야한다. 나에게 맞는 새 세상은 그럴 때라야 열린다. 저 쪽에서 영숙의 차가 비상등을 켜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