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자가 되어 돌아보았다. 난 소가 되어있었다. 나이가 들어 일할 힘을 상실했다는 심판이 내려져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였다. 지난 두 달 행여 목숨을 연장할 길이 있을까 갖은 애를 다 써보았지만 거들떠보는 농부는 없었다. 울끈불끈 허벅지에 근육을 만들어가며 소싸움대회의 수상기록을 내밀어도 허사였다. 꼬박꼬박 시간 맞춰 던져주는 건초에 만족하며 안이하게 살아온 결과였다. 진즉에 목초지로 나갔을 때 야생으로의 탈출시도라도 해볼 걸. 후회해봤자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급기야 혈연과 지연 학연 같은 모든 연줄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글쎄’ 아니면 ‘불경기라서’와 같은 책임회피성 변명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속도의 몇 십 배 빠르기로 실망은 좌절로 바뀌어갔다. 그 사이 기세등등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두려웠다. 인식표 없는 무명용사가 될 수 없다고 명함 대신 주민등록증을 내밀 수는 없었다. 오늘 모임의 대상이 대학시절 함께 야학을 운영했던 동지들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숱한 세월 속에 봉사와 헌신이라는 젊은 날의 동류의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달라진 사회적 위치가 신분을 대신하며 표면으로 드러날 게 뻔했다.
모임 장소는 강남이었다. 사당에서 2호선으로 환승했다. 출입문 위의 노선도는 타원형의 순환 고리를 그리고 있었다. 계속 타고 있으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겠지. 그렇게라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난 여전히 내일을 구상하는 진취자이기보다 과거를 자랑하는 낙오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창유리는 스쳐 지나는 지하공간의 캄캄한 암흑 위로 후줄근한 차림의 백발노인을 그려냈다. 노인은 서울역과 남영역 사이에서 갑자기 불이 꺼지며 시간이동을 하는 드라마 속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심장박동수보다 더 빠르게 떨어댔다. 종석이었다.
“오고 있냐? 어디쯤이야?”
요즘 핸드폰요금제 중에 통화 무제한을 제공하지 않는 종류도 있는 것일까? 그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진부한 전화예절을 추앙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여기, 방배. 십 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
만남을 재촉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만남을 피하고 싶은 감정이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 뉴턴의 제3법칙은 통하지 않았다. 작용과 반작용은 엄연히 그 크기가 달랐다. 이번 시즌 그들만의 리그에서 탈락해 하위리그를 전전하는 통에 내 힘은 쇠약일로를 걷고 있었다.
“난 벌써 도착했어. 빨리 와.”
“알았…….”
그는 대답할 시간조차 여유 있게 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통화시간이 길어질수록 참석여부에 대한 망설임을 더할까 봐. 거기 더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참석을 포기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며칠 전 오늘의 모임을 전화로 알려왔던 사람도 바로 그였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서울에 있는 지인을 만났다가 잡고 있던 지푸라기도 놓쳐버린 심정으로 귀가하던 광역버스 안에서였다. 허탈함에 또 다른 지푸라기를 핸드폰으로 찾고 있을 때 문자가 수신되었다.
‘노가망스 모임 공지. 2월 25일 오후 다섯 시 지하철 강남역 근처 송원초밥. 전원 필참 바람.’
노가망스란 대학시절 야학동아리 내에서도 특별히 동기 여덟 명만을 회원으로 한 모임의 이름이었다. 분석하자면 ‘No’라는 영어와 '가망'이라는 한국어, ‘스(s)'라는 복수형 어미가 합성된 우리만의 은어였다. 가망이 없는 친구들의 집합, 뭐 그런 의미라고나 할까? 대체로 공부보다는 술이나 담배, 당구, 카드놀이 같은 잡기에 더 관심이 많던 친구들이었으니 좋은 의미는 아니어도 그런 대로 썩 잘 지은 이름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작명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우릴 묶어서 우연히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부드럽게 발음되는 것이 프랑스어 같은 냄새도 났고, 또 언뜻 들어서는 묘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어 자천타천 사용하다보니 그만 어느 순간에 굳어져버린 것이었다. 이후 우린 견강부회(牽强附會) 격으로 그 이름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없다는 것은 무한대와 동일 개념인 만큼, 노가망스란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능성이 무한한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짝퉁을 사고도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다보면 명품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우린 짝퉁을 걸치고 수드라에서 브라만으로의 계급상승을 꿈꾸었다.
욕망에 도덕과 윤리의 옷을 입히면 희망으로 자라지만 그러지 않으면 욕심으로 변모한다. 욕심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우린 차츰 공부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엔 모두 나름 괜찮은 밥벌이들을 하나씩 꿰어 찰 수 있었다. 비로소 브라만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의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이었다. 우린 지도를 펼쳐놓고 함께 쉬어갈 휴게소를 정했다. 해당휴게소에서는 점호가 이루어졌고 다시 출발을 할 때면 다음 휴게소를 정하곤 했다.
바이샤 지점을 막 지나면서부터 사고인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만난 분기점과 인터체인지가 화근이었다. 한 명이 해외근무라는 분기점(Junction)을 통해 다른 고속도로로 빠져나가자 다른 이는 결혼이라는 분기점을 만나면서 빠져나갔다. 그 도로에서는 또 출산이나 학부모 같은 인터체인지(Interchange)가 나타났고 그때마다 휴게소점호에 참석하는 인원수는 줄어들었다. 크샤트리아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우린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단톡방이 만들어져 생사 정도는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가진 게 벌써 수년째였다. 그런 친구들이 오랜만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이미 고장이 나버린 차로는 고속도로에 진입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자전거로 뒤쫓은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감만 확인한 채 열패감에 사로잡힐 게 뻔했다. 이번 점호는 참석치 않기로 결정했다. 불참통보조차 포기했다. 알리는 순간 숱한 질문공세가 이어질 것이고 거기에 일일이 변명을 늘어놓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져들어 난처함을 자초하기 십상이었다. 난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가둬버렸다.
휴대폰은 즉시 부당한 감금을 온몸으로 항의하며 석방을 호소했다. 구속적부심이라도 청구할 태세였다. 민주시민의 일원으로 무죄추정의 원칙마저 묵살할 수는 없었다. 꺼내보니 종석의 전화였다. 그 또한 노가망스였다.
“문자 받았지? 나올 거지?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
예나 지금이나 그의 속사포는 조금도 성능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응 사격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야, 우리가 만난 게 벌써 3년이나 지났네. 내가 막 명퇴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말이야. 사실 너 때문에 나, 그 힘들던 시기를 잘 넘겼거든. 만나면 너랑은 할 말이 많아. 2차는 둘이서 따로 하자. 알았지? 그럼, 그때 봐.”
종석은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가 최근 다시 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자가 있는 제품을 무상으로 수리해주거나 교환해주는 제도를 뜻하는 리콜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어째 그 대상이 불량이라는 뜻을 내포한 것 같아 옳은 표현인지 아닌지 애매하긴 하지만.
“응, 생각해볼게.”
‘고민해볼게’가 머리에서 입을 거치는 동안 급작스럽게 수정되었다. 통화시간을 줄여 위기의 순간에서 재빨리 벗어나려는 타고난 순발력의 힘이었다. 그렇다고 결정을 번복한 건 아니었다. 의중은 여전히 불참 쪽에 무게중심을 이동시켜놓은 상태였다.
안전지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종석은 또 전화를 해왔다. 곧 그를 너무 과소평가했음이 밝혀졌다. 내 얼버무림은 그의 레이더에 석연찮음으로 걸려들었고 성능 좋은 그의 디코더는 그것을 불참으로 정확하게 해독해냈던 것이다. 판독결과지까지 내보이는 통에 난 어쩔 도리 없이 불참을 참석으로 뒤집고 말았다. 무엇보다 모임에는 대충 얼굴만 비치고 둘이 따로 얘기나 하자는 당근이 내 고집의 허술한 벽을 허물어버렸다. 분명 그의 명예퇴직 경험은 나에게 살과 피가 될 수도 있었다.
웬걸 전철은 강남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놀란 가슴으로 출입문을 쳐다보았지만 문은 틈새 하나 보이지 않았고 바깥의 모습은 더욱 빨리 멀어져갔다. 다음 역에서 되돌아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모임에는 지각이 확실했다. 생각해보니 지각으로 얼룩진 삶이었다. 결혼도 남들보다 늦었고 승진도 늦었으며 내 집 장만도 늦었고 하다못해 세웠던 목표들의 달성시점은 공사를 막론하고 느려터지다 못해 포기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일하게 앞선 게 있다면 퇴직시점이었다.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윤기야, 여기야 여기.”
종석이 손을 번쩍 쳐들며 나를 불렀다. 좌중의 시선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뜻하지 않게 난 주인공이 되었다. 먼저 도착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곤란이었다. 한눈팔기가 불러온 나비효과라는 생각에 애꿎은 나비를 원망하며 얼른 숨어들 자리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친구들은 한사코 게이가 아닌 나에게 게이처럼 스킨십을 하려고 달려들었다. 어색한 가운데 혹시나 불심검문이 이루어질까 초조함에 휩싸였지만 다행히 명함을 요구하는 녀석은 없었다. 종석은 나를 구석인 제 맞은편 자리로 안내했다. 군대생활을 통해 위장술을 습득한 표가 났다.
구석자리는 타인의 공격방향을 축소시켰다. 은폐 또한 한결 용이하게 만들어 방어력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난 친구들의 눈길을 적당히 따돌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대화의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멀리 떨어질수록 경계에 가까워지고 경계선에 서는 순간 노출의 위험은 극대화된다. 적당한 거리 속에서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휩쓸릴 때라야 대중의 관심은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드문드문 말을 걸어주는 종석은 최고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었다. 난 오늘의 본래 목적인 종석과의 별도 만남을 기다리면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 채 모임이 빨리 파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건 과학적 법칙만으로도 충분히 예견된 일이긴 했다. 자연계에서 엔트로피는 절대 감소하는 일이 없다. 더욱이 이 자리는 미국대통령이었던 트럼프의 발언만큼이나 화제의 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는 술자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엔트로피에 트럼프를 곱한 값으로 계산되는 럭비공지수는 과히 내 연산능력을 초과하는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가들의 주둥이리스크를 능가하는 위험성이 감지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모임을 정례화하자는 얘기가 어딘가에서 불쑥 나오는가 하면 매달 일정한 금액을 회비로 걷자는 얘기가 또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사는 모습도 볼 겸 친구들의 집을 돌아가며 장소로 정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부담백배 후회막급이었다. 술잔을 귀로 들이부어 청각을 술기운으로 마비시켜버리고 싶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속다짐을 수없이 되풀이하는데 한 친구가 벌떡 일어서며 ‘주목, 주목’외쳐댔다. 난 옆 친구의 그림자로 스며들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자, 모두들 잘 들어. 공지할 사항이 하나 있어. 사실 며칠 후에 내 아들놈이 결혼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날 시간되는 사람들은 와서 밥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 장소는 강남이거든. 청첩장은 내가 나중에 따로 보내줄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쏠 테니 마음껏 마시고, 알았지?”
다른 친구가 말을 받았다.
“이 자식 이거, 올해 완전히 횡재 만났구먼. 야, 너 진급한 건 왜 얘기 안 해.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안 되지 안 돼. 여기들 봐. 이놈 올해 부사장 승진했대. 내로라하는 P제철에 부사장이라면 차관급 아냐? 임마, 오늘 이것 갖고는 어림도 없어. 2차도 모두 네가 사는 거야. 야, 우리 오늘 2차는 어디 아리따운 아가씨들 나오는 술집에 가서 코가 비뚤어지게 한 번 마셔보자. 누구 이 주변에 그런 곳 잘 아는 사람 없어. 어디 소개해 봐.”
검언유착의 검은 유착 관계를 보여주듯 두 사람은 손발이 착착, 호흡이 척척 들어맞았다. 그들의 대화가 스포일러로 작용해 탱탱하던 럭비공의 공기압이 빠져나갔다. 사태는 내가 걱정하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각기 몸담고 있는 직장이야기가 번호표를 뽑아들고 대기열에 서있었다. 화살이 날아들기 전에 남몰래 과녁을 치워야했다. 연극이 필요했다. 마침 종석이 담배를 꺼내 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곡각본에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그 동작이 내 연기의 시작신호였다. 지문을 기억해냈다. 일어서며 옷걸이에 걸린 무대복장을 꺼내 걸친다. 담배를 찾는 듯 주머니를 뒤적인다. 담배를 발견하지 못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종석 뒤를 쫓는다.
“종석아, 나도 담배 하나 줘.”
목소리의 주파수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작위적인 냄새가 흥건했다. 다행히 관객들은 분위기에 취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종석 역시 라이어헌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너, 담배 피냐? 끊었다고 안했어?”
사실 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흡연문제를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종석의 팔짱을 낀 나는 재빨리 그를 끌어당겼다. 그것 또한 희곡지문의 일부였다. 질질 끌리다시피 따라오던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풀려했다.
“왜 이래, 이거 놔.”
“잠깐만. 아무 말 말고 그냥 따라 와.”
연극무대로부터 벗어나 식당 바깥쪽에 마련된 흡연실에 도착해서야 난 팔을 풀었다. 대형재떨이를 중심으로 다른 일행 서넛이 둘러서서 매운 담배연기를 뿜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정말 담배 하나 줘?”
종석이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입에서 구름 꽃이 피어나며 근두운이 만들어졌다. 그걸 타고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난 말했다.
“나, 그냥 집에 가려구. 몸 상태도 별로 안 좋고 해서. 너 때문에 억지로 오긴 했는데 계속 많이 불편하네. 너 얼굴도 봤으니 이제 갔으면 해. 좋은 분위기 깨기 싫어서 이렇게 빠져나온 거야. 다른 친구들한테는 말 좀 잘 전해줘.”
난 한시가 급하게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근두운 위로 몸을 날렸다. 불행하게도 환골탈태하지 못한 내 몸은 미처 올라타기도 전에 밑구멍으로 쑥 빠져 내렸다. 종석이 입에 문 담배 끝에서 또 한 번 빨간 불꽃이 피어났다. 백열등조명에 근두운이 조각조각 흩어졌다.
“무슨 소리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같이 가. 오늘은 너랑 따로 한 잔 하고 싶단 말이야.”
“아냐. 넌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나중에 와. 나 먼저 갈게. 자, 그럼 다음에 봐.”
몸을 돌리는데 휘영청 밝은 달이 확 다가들었다. 이마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손으로 더듬었더니 달빛이 찍은 낙인자국이 선명했다. 사회생활 부적격자. 실직이란 죄로 말미암아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벌이 선고된 것이다. 근두운 대신 함거가 놓여있었다. 그쪽으로 두어 걸음 옮기자 종석이 급히 불렀다.
“윤기야, 잠깐만.”
고개를 돌렸다. 종석은 어느새 곁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독한 니코틴 냄새가 ‘호~ ’ 입김 약이 되어 낙인 위로 지나갔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나, 옷 갖고 금방 나올게. 알았지, 응?”
대답을 하기도 전에 종석은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난 아랑곳없이 걷기 시작했다. 먼 유배의 길을 떠나면서 인연에 연연해하는 모습은 볼썽사나웠다. 구경꾼들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드러냈다. 피로감이 엄습해왔다. 두통과 어지럼증마저 일었다. 2개월 사이에 조로(早老) 환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실직은 텔로미어의 길이를 줄이며 DNA 염기서열까지 바꾸는 힘을 갖고 있는 무자비한 놈인지도 모른다. 그때 종석이 어깨를 툭 쳤다.
“야,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면 어떡해? 한참 찾았잖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이마에는 낙인이 아니라 훈장이 방울방울 번득거렸다.
“친구들과 시간 보내지, 왜 왔어?”
“아냐. 안 그래도 녀석들 허세 부리는 게 눈꼴사납던 차에 잘 되었지, 뭘. 자, 어디 가서 한 잔 더하자. 너 맥주 좋아하잖아? 이리 와. 근사한 맥줏집 내가 아는 곳이 있어.”
종석이 길을 잡았다. ‘아니오’는 이미 나의 언어가 아니었다. ‘아니오’는 그 어떤 행동에도 책임질 수 없는 나를 두고 ‘아니오’라고 말했다. 난 종석의 곁에 엉거주춤 붙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큰 길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호프집이었다. 넓은 공간에 어두운 빛깔의 목재들을 인테리어로 사용한 게 타깃페르소나가 나와 같은 유배자들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흐르는 음악마저 가사에 슬픈 서사가 뚜렷한 김광석이었다. 벽에는 떠나간 자들의 낙서가 빽빽했다. 이 바닥에 설 자리라곤 없는 처지에 마지막으로 타깃오디언스가 되어주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어때, 강남이긴 하지만 여긴 분위기가 좀 색다르지? 지난번에 우연히 한 번 왔었는데 옛날 생각이 많이 나게 하더라구. 그러고 여기 생맥주가 말이야, 하우스맥주인데 정말 맛과 향이 끝내줘. 마셔보면 너도 금세 반하고 말걸.”
종석의 말과 행동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다. 마신 술이 마실 술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우스맥주라. 직접 만든 술이란 의미일 테니 나에게는 유배지로 가는 길목주점에서 밀주로 파는 막걸리와 무엇이 다를까? 알바가 메뉴판을 들고 왔다. 아들 민수가 겹쳐보였다.
2,000cc 생맥주 피처를 한 번 더 주문할 때였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종석이 돌멩이 하나를 특 던졌다. 무심코 버린 것이 아니라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한 투석이었다.
“백수 생활 해보니 재미있어? 힘들지?”
종석이 어떻게 내 실직을 알고 있을까? 그건 제임스본드나 되어야 캐낼 수 있는 일급비밀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회사 그만 둔 거.”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거 아니잖아. 그래,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이야?”
그가 만취했을 거란 내 판단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연기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파문을 일으켰다. 나에게 무슨 계획이 있었던가? 일자리를 찾아야지 한 건 계획이 아니라 현실부정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현실과 맞짱을 뜰 수 있는 배짱조차 없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무리지어 몰려들었다. 난 더욱 위축되며 할 말을 잊었다.
“…….”
“네 마음 내가 잘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건 그렇고 취직해서 일할 생각은 있는 거야? 만약 있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도 같아서. 사실 오늘 널 구태여 보자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다이어트 식단이라면 몰라도 생존의 식단에 찬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가운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다.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자니 또 민망함의 고개를 넘어서야했다. 난 우물쭈물하는 말로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이 더 우선순위임을 내보였다.
“글쎄 내가 사업을 할 체질은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고, 취업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말이야. 오늘 집에 가는대로 나에게 이력서를 한 통 보내 봐. 내가 잘 아는 선배가 한 명 있는데 자동차 프레스 전문가를 찾더라구. 이 양반이 사장인데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꽤 규모가 되는 회사인가 봐. 급여나 복지조건도 괜찮대. 네 생각이 나서 내가 한 번 알아보겠다고 그랬지. 너 전공이 자동차 차체잖아. 차체는 프레스 제품으로 이뤄질 테고. 어때 해볼 만한 자리 아니야?”
차체와 프레스라는 전문영역에서 종석과 나의 기대감은 서로 엇갈려 지나갔다. 종석의 로켓은 정점을 향해 수직상승하고 있었지만 나의 로켓은 정점을 지나 급전직하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자동차에서 차체와 프레스는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달라. 자동차 조립공장이 네 개의 공장으로 구성되는데 그게 프레스, 차체, 도장, 의장 공장이거든. 프레스와 차체 공장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 둘에 필요한 기술도 달라. 프레스가 성형기술이 필요한 곳이라면 차체는 용접기술이 필요한 곳이지. 물론 관련성이야 있지만 그 선배가 원하는 기술자에 내가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관련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지식도 있을 거 아냐? 이 나이에 실무를 직접 할 것도 아닐 테고. 채용하려면 면접도 해야 할 테니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은 그때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나에게 이력서부터 보내줘. 알았지?”
종석의 말 포장지는 얇아서 속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는 일갈이 내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일리가 있었다. 사실 내 망설임의 저변에는 나와의 전문성 차이가 아니라 자신감의 결여가 깔려있었다.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난 대답조차 내 의지가 아니라 그의 부탁에 따른 것이라며 체면치레를 앞세웠다.
“그럴게.”
새로운 피처가 날라져왔다. 술은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수가 되어 화제를 생물로 만들었다.
“야, 윤기야. 너 애들이 어떻게 되냐? 다들 대학 졸업 안했어?”
순간 또 한 번 민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며칠 전 갓 대학을 졸업한 녀석은 여전히 취준생의 굴레를 벗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도 편의점이다 웨딩홀이다 닥치는 대로 겹치기로 알바를 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었다. 딸 혜경의 앞날도 도긴개긴이었다. 온 가족이 도다리 눈을 무릅써가며 눈치작전을 전개해 사범대 입학에 성공하면서 전쟁터를 벗어나나 했더니 그 앞에는 더 높은 경쟁률의 임용고시 지옥문이 열려있었다.
“큰 놈이 엊그제 졸업했어. 작은 애는 이제 3학년 올라가고.”
아이들의 현실에 몰입한 나머지 섣부른 입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앞질러 나댔다. 말이란 무기는 남이든 나든 칼끝의 방향을 가리지 않는 놈이었다. 아차 했을 땐 칼끝이 이미 피부 끝에 닿아있었다.
“졸업했으면 취업은?”
종석이 칼의 손잡이를 잡은 채 지그시 눌렀다. 칼날이 살 속 깊이 파고들었다.
“아직은……. 제 딴에는 이리저리 발품을 파는 모양인데 잘 안 되네. 요즘 워낙 취업문이 좁잖아. 야, 이 집 맥주 진짜 맛있다.”
난 사회의 구조적모순을 정당방위의 근거로 내세우며 민수를 변호하기 급급했다. 그건 또 팔불출을 자인하는 실책이 되고 말았다. 연이은 실책을 만회하고자 무리수를 두며 화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러기에 맥주의 맛 운운한 건 너무 클리셰적 발상이었다.
“내가 백수일 때 말이야. 우리 아영이가 취직해 있었거든. 왜 걔가 S전자 다니고 있잖아. 그 때 그 덕을 많이 봤어.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가 있어서 한 푼도 안 내고 건강보험 혜택을 봤거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게 꽤 큰돈이더라구.”
가족 중에 건강보험에 가입한 직장인이 없는 우리는 지역보험 대상자였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은 보험료 부담을 직장가입자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반분하지만 지역가입자는 전액 자신이 책임져야한다. 보험료 부과기준도 다르다. 직장가입자가 소득을 기준으로 하는데 반해 지역가입자는 거기에 재산까지 얹어 결정한다. 나의 경우 단 한 푼의 소득도 없지만 허름한 집 한 채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가졌다는 이유로 월 20여만 원씩을 꼬박꼬박 납부해야하는 것이다. 종석을 향한 나의 부러움은 현재를 넘어 과거까지 소급하며 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돈 번다고 월급날이면 내게 용돈을 주기도 했어. 아빠 기죽지 말라면서. 그때는 정말 다 키웠다는 생각이 들대.”
종석은 케이스스터디를 과제로 던져주었다. 그의 성공사례와 나의 실패사례는 도표로 만들어져 뚜렷이 대비되었다. 둘 사이에는 아주 굵은 선이 그어져있었다. 그건 우리 국토의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인 휴전선처럼 통행이 불가능한 장벽 같았다. 종석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집사람 말이 요즘 아영이가 연애를 한대. 근데 여편네가 걱정이 태산이야. 남자가 명문대를 나오긴 했는데 아직 백수라면서. 어째 만나도 꼭 그런 사람을 만나냐는 거야. 아영인 남자가 곧 취직될 거니까 걱정 말라는데 마누란 영 내키지 않는 낌새야.”
별안간 눈앞의 장면이 몇 달 전 한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민수가 여자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귀엽고 착해보였다. 대학동기인데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제 여자 친구라 녀석은 소개했지만 인공지능을 넘어서는 내 오감 번역기는 친구를 연인으로 해석했다. 유난히 사람이름을 잘 외지 못하는 나를 향해 이어서 보인 녀석의 태도는 번역기의 수준을 의심치 않게 만들었다.
“아빠, 아영이에요, 아영이. 잊지 마세요.”
어째 낯설지 않다 했더니 그 아이의 이름이 아영이였다. 민수에게 평생 디딤돌이 되어주길 원했던 나의 실체는 알고 봤더니 걸림돌이었다. 돌이 놓인 지점도 가족의 곁이 아니라 종석 쪽에 치우쳐있었다. 굳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미덕을 앞세우며 민수를 원망하면서 종석과 그의 아내를 두둔하려들었다. 만약 혜경이 백수와 연애를 한다면 나 또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녀석과 종석의 딸이 이렇게 엮일 줄이야.
“너 얼굴색이 왜 그래? 취한거야?”
모든 감각기관이 지령을 거부한 채 태업을 벌였다. 주모자인 영혼을 체포해 가둬버리고 싶었지만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민수와 아영이 종석의 말을 무대음악 삼아 하늘하늘 춤을 추며 떠다닐 뿐이었다.
“자식, 힘내. 우리 나이면 누구나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야. 너무 기죽지 말고. 어쨌든 이력서는 꼭 보내줘.”
만악(萬惡)의 근원이 사탄이라면 난 만통(萬痛)의 근원이었다. 모두의 아픔이 나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나 스스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수와 아영, 아내, 종석 부부에 이르기까지. 피할 길은 없는 것일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았어. 집에 가는대로 이력서는 보내줄게. 그런데 종석아. 그만 일어서자.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취하는 것 같아. 이러다 실수할까봐 걱정돼.”
“야, 천하의 주당 박윤기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구나. 그래, 그럼. 마지막 남은 이 잔만 비우고 가자.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앞으로도 드문드문 연락이나 하면서 살자. 자, 건배.”
어설픈 초보연기에도 종석은 속아 넘어갔다. 아니 속은 척하는 그의 행동에 내가 속았는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나에게 속은 그가 나로 하여금 그를 속였다고 생각하도록 속였는지도 모른다. 진실이야말로 남을 속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니까. 두 사람의 잔이 부딪치면서 술자리의 마침을 알리는 종료 벨이 울렸다.
광역버스로 환승하기 위해 정류소에 왔다. 행선지별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제각각 길게 늘어서있었다. 어느 줄이 내가 타야 할 버스의 줄인지 헷갈렸다. 매일같이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이 많은 사람들. 살기 위해 서울엘 와야 하지만 정작 살 곳은 서울에 없는 사람들의 현주소였다. 서울은 날로 비만증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병증은 위험수준에 육박했다. 영혼 없는 돌팔이들은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양심을 파는 치료를 일삼았다. 과다하게 축적된 살과 지방을 덜어내고 떼어내는 것이 올바른 치료법이건만 그들은 맞는 옷만 찾으면 되지 않느냐 옷장수의 편을 드는 것도 모자라 체질량지수의 기준치가 잘못 설정되었다며 살을 더 찌운들 건강에 하등 문제가 없다고 우겨댔다.
“수원행 버스 줄인가요?”
한쪽 줄 꽁무니에 서있는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내며 빤히 쳐다봤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한 번 하자 그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말 한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는 피로감이 그의 안면을 뒤덮고 있었다. 어떤 버스정류소에서는 민수가 그러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 이어폰을 귀로 가져가는 그의 등 뒤에서 무력감이 뭉게뭉게 퍼져 나왔다.
암만 생각해도 민수와 아영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세상에 보존과 개발을 병행할 수 있는 묘안이 없으며 바둑에서는 세력과 실리를 모두 취할 수 있는 묘수가 없다. 둘의 사랑을 갈라놓든지 종석의 선처를 구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였다. 문제는 내가 선택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에게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없었고 한신처럼 과하지욕(袴下之辱)의 용기도 없었다. 난 책임을 슬그머니 민수에게 떠넘기고 싶었다. 녀석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전화기를 빼어들었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날 무렵 민수가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어디 있냐? 집이니?”
난 선임에게 뺨 맞고는 후임들을 불러 한 따까리를 일삼던 군대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알바 끝나고 서울에 잠시 왔어요. 아영이가 오늘 월급날이라고 저녁 먹자해서 지금 같이 밥 먹고 있어요.”
민수의 대답 가운데 아영이라는 이름이 나의 비등점을 물 수준에서 체온 수준으로 급격히 끌어내렸다.
“넌, 이 녀석아. 어떻게 된 게 창피하지도 않니? 제가 돈을 벌어 저녁을 사줘도 시원찮을 판에 여자 친구 월급날이라 저녁을 얻어먹고 있다구? 염치도 없어? 밥 사준다니까 체면이고 뭐고 없이 얼씨구나 좋다하고 앉아있는 거야, 지금?”
분노가 성대의 입구에 확성기를 배치했다.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옮겨왔다. 몇 차례나 책을 완독하면서 외워두었던 ‘분노를 다스리는 열 가지 방법’마저도 내 분노에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지금 시계가 몇 시야? 알바 끝났으면 일찍 집에 들어가 취업준비라도 할 생각은 않구. 빨리 들어와.”
몸속에 쌓였던 대부분의 분노가 배출된 후 체념이 빈자리를 거의 채울 무렵이었다. 민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아버님, 저 아영이에요. 안녕하셨어요? 민수가 공부하겠다는 걸 오늘은 제가 불렀어요. 민수, 요즘 정말 열심히 공부해요. 곧 좋은데 취직할 수 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아영이 내민 민수의 알리바이는 증인석에 앉은 나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나이를 먹어도 헛먹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민수의 고함에 가까운 음성이 곁가지로 들렸다.
‘뭐하는 짓이야. 전화기 이리 내. 강아영. 빨리 전화기 줘.’
몸싸움이 빚어지는지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목소리는 또 바뀌었다.
“죄송해요, 아빠.”
귀머거리가 되면 곧 벙어리가 된다. 난 반대로 벙어리에서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랬다. 아영인 강아영이었다. 이종석의 딸이 아니라. 다시금 저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방향을 잘못 정한 분노에 대한 분노였다.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향해야 할 분노였다. 전화기 저쪽에서는 민수가 계속 나를 찾았다.
“아빠, 아빠…….”
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택시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민수, 너 거기 어디야? 아빠,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아영이랑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횡단보도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서있었다.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오늘은 그들과 제대로 한 잔 나누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