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세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는데 안내 창구에 앉아있던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앞을 막아섰다. 공항출국장의 검색대를 통과하다 경광등과 함께 부저가 울렸을 때처럼. 내 뒤로도 여러 사람이 줄지어서있건만 왜 나만 붙잡고 묻는 것일까?
“K사에 갑니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발사된 붉은 레이저라인이 내 몸을 더듬고 지나갔다. 아침달리기를 하다가도 핫팬츠나 레깅스를 입은 여성이 발견되면 내 눈은 그 즉시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기 일쑤건만. 이만하면 벌건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벌이는 성희롱이었다. 말리거나 대드는 의인은 아무도 없었다. 난 꼼짝없이 울퉁불퉁한 내 몸매를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안구는 내 줌렌즈가 갖지 못한 투시기능도 보유한 모양이었다. 잠깐사이에 내 손가방도 가차 없이 스캐닝하고 지나갔다. 보험약관이나 전집류의 서적 카탈로그를 찾는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걸 탐지하지 못했는지 그녀가 한발 물러섰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나를 제외하고 동승한 사람은 모두 일곱이었다. 버튼이 그들의 손에 의해 눌러지며 눌러진 곳마다 불이 들어왔다. 7층 역시 누군가에 의해 눌러져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차림새를 눈여겨보았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정장슈트.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색상과 무늬들만 약간씩 다를 뿐. 암만 생각해도 나만 검색대에서 걸린 이유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들 가운데 장(張)이 셋(三) 이(李)가 넷(四)인데 나만 박(朴)이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평소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조리 외우고 있는 것일까? 살아남으려면 그깟 일인들 못할까마는 정말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였다.
바로 앞에 한 사람이 마주서있었다. 급하게 오른 나머지 출입문 쪽으로 등을 돌릴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푸른색 줄이 눈길을 끌었다. 신종 액세서리인가 싶어 따라가 보았다. 배꼽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이르자 본인의 사진이 박힌 출입증이 대롱거렸다. 아, 저것이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지만 나에게만 없는 것. 그녀가 나를 거침없이 추궁할 수 있었던 명분. 지난 육 개월 동안 갖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했던 바로 그것. 그때서야 아무 이유 없이 의심받아야했던 조금 전의 불쾌감이 가셨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나 역시 곧 시상대에 올라 애국가 연주와 함께 그걸 목에 거는 순간이 올 테니까.
7층에서 내려 시계를 보았다. 조 부장과 약속한 일곱 시 오십 분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아있었다. 출근 때마다 백분의 일 초 단위로 지각과 승부를 다투며 막판 스퍼트를 일삼던 지난날이 먼 과거처럼 여겨졌다. 좀 일찍 도착했노라 조 부장에게 전화라도 할까 하다 관두었다. 샐러리맨에게는 아침시간이 얼마나 절박한지, 또 그 시간을 빼앗는 게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혼자서 시간 보낼 곳을 찾다가 비상계단 쪽으로 난 문이 열려있는 걸 발견했다. 복도를 서성여봤자 출근자들의 호기심만 키워 사내 흥신소만 바쁘게 할 것 같아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가보니 흡연구역이었다. 원통형의 재떨이를 가운데 두고 샐러리맨 세계에서는 멸종위기에 놓인 아침형 인간 둘이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돌아서기도 민망해 빈 공간에 몸을 들였다.
그러고 보니 한때는 나도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일찍 깬 만큼 미러클모닝을 체험하게 되고 인생 또한 바뀌게 된다는 말에 혹해서. 그러나 그건 호사가들의 말장난일 따름이었다. 몇 달 새에 나를 찾아온 건 미러클모닝이 아니라 미라클졸음이었다. 근무시간 내내 난 약 먹은 닭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긴 사람이 닭이 되었으니 그것도 바뀐 인생이라 칭한다면 더 할 말은 없었다. 애당초 아침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것만 봐도 사기성 발언이었건만 그걸 간파하지 못한 내가 바보였다. 저녁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 시에 일어나는 사람이 아침형 인간이라면 아침 여덟 시까지 밤을 새워 일한 후 잠자리에 드는 사람을 아침형 인간이라 말 못할 근거는 또 어디 있는가. 저들은 그걸 알까? 그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야, 어제 엔비디아 엄청 올랐더라. 너 그거 갖고 있다 했잖아?”
“판지가 언젠데 그래. 대신 애플 샀다가 요새 완전 꼬라박고 있구만. 어제도 매매타이밍 노리다가 한잠도 못 잤어.”
먼 나라 주식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이야말로 일찍 일어나 벌레를 잡는 아침형 새가 아니라 밤새 먹이를 찾아다니다 헛걸음으로 지쳐 돌아오는 길에 그 새의 먹잇감이 된 아침형 벌레였다. 담뱃불을 끄고 돌아서는 그들의 등 뒤에서 벌레의 비애감이 번져났다. 일곱 시 오십 분이었다. 전화를 하자 조 부장은 금방 받았다. 그의 음성은 숨이 차다 못해 헐떡이고 있었다.
“비상계단에 계시다구요? 알겠습니다. 지금 1층에 도착했으니까 바로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 역시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가쁜 숨소리에 여덟 시라는 출근시간에 대한 원망이 녹아있는 듯했다. 나인 투 식스, 그건 전 세계적인 직장인의 근무 패턴이었다. 그런데 왜 여긴 출근시간을 당긴 것일까? 추측컨대 그 답은 퇴근시간에 있었다. 출근시간과 달리 퇴근시간이 정해져있지 않은 기업은 수두룩했다. 그런 회사라면 출근시간만 당기면 그만큼 근무시간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야근수당을 지불하지 않는 편법이야 시중에 차고도 넘치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이 회사도 인간개조에 앞장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원치 않음에도 아침형 인간으로 새로이 태어나라고. 이 시대에는 울지 않는 새라면 죽여 버려야한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나 울게 만들어야한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리더십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려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진정한 승자임을 망각한 채.
“박윤기 씨. 사무실로 가시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조 부장이 웃으며 서 있었다. 난 하던 생각을 접고 조 부장의 뒤를 따랐다.
“제가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 출근시간마다 이렇게 전쟁을 치르니 하루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벌써 지쳐 버립니다.”
출근전쟁이라니 아침형 인간은 이 회사만이 아니라 서울의 보편화된 현상인 모양이었다. 스스로 원했거나 강요당했거나 어쨌건 간에. 멸종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책이 무차별 양산이라 믿은 회사들이 무차별로 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어리광으로 들렸다.
“힘드시겠어요.”
위로하려드는 내가 더 힘들었다. 지친 삶이 질식당한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달 동안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내가 겪어야했던 그런 삶을.
“참 박윤기 씨는 댁이 수원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여긴 어떻게 오십니까?”
“전 서울 지리도 잘 모르고 해서 아예 지하철을 이용해 왔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할 것 같은데요.”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던 오늘의 출근길을 돌아보았다. 아침형 인간을 넘어서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은 방법이 생기려니 했지만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떤 정치가가 출마의 변으로 내걸었던 ‘저녁이 있는 삶’이 그의 낙선과 함께 매스컴에서 사라졌듯 내 삶에서도 사라질 판이었다.
“그게 정답입니다. 전철이 최고예요.”
정답이라면서 왜 자신은 오답을 택한 것일까? 서울근교가 아니라 서울 안에 사는 사람의 정답은 따로 있다는 뜻일까? 대학조차 인서울이냐 아니냐를 두고 등급 매김을 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억하심정에 그 또한 새벽형 인간이 되어보라 권하고 싶었다. 그러면 서울 안에서도 출근전쟁을 피할 수 있을 거라면서. 회사 근처의 헬스장이나 수영장에서 아침운동을 마친 후 출근하면 출근지옥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건강도 챙길 테니 말이다.
“…….”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그냥 삼켜졌다.
“먼저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음에 오늘 하루의 일정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 부장이 사장실 앞에 멈춰 서서 두어 차례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었다. 방안에서 김 사장이 환한 미소로 우릴 맞아들였다.
“오늘부터 첫 출근이죠. 이거 저희랑 인연을 맺게 되어 반갑습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겉 따로 속 따로가 아니라 겉도 따뜻 속도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난 인사였다. 정확한 사연이야 어찌되었건 나를 나락에서 건져준 건 사실이니까. 돈을 쓰는 취미라면 몰라도 돈을 버는 직업 중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는 법. 그를 생각해서라도 어떤 악조건도 참고 이겨내리라. 아직 턱에서 힘 빠질 나이가 아님을 확인이라도 하듯 난 입을 앙다물었다.
“별 말씀을. 박윤기 씨의 능력이 인정된 것이지요. 그건 그렇고 지금은 제가 좀 바쁘니까 우리 이야기는 좀 있다 별도로 나누도록 하죠. 조 부장, 일단 다른 분들 인사부터 시키고 나중에 면담시간을 따로 좀 잡아주세요.”
김 사장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다. 그 역시 아침형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원들의 바이오리듬 곡선을 강제로 변경한 데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경쟁사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 경쟁에서 밀리는 순간 도태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야하니까. 직원들이 고분고분 받아들인 것도 그 모든 걸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면접 때부터 철저하게 아군이었던 그와의 짧은 면담에 대한 아쉬움을 난 그렇게 토로했다. 조 부장이 다음으로 인도한 곳은 사무용 책상과 회의용 원탁, 그리고 의자가 서로 짝을 이루며 놓여있는 작은 방이었다. 잎만 무성한 난초 화분 하나가 책상위에서 삭막한 사무공간을 완화시켜주고 있었다. 푸른 잎이 핑크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입사를 축하합니다.
“여기가 상무님 방입니다. 업무용 노트북은 조금 있다 배달될 것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그럼 잠깐 계시면 제가 자료를 갖고 와 회사에 대한 소개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날더러 상무라는 호칭을 붙여 불렀다. 그 싹싹함이 거름으로 작용해 내 발밑에서 뿌리가 뻗어내려 사무실 바닥에 착상하기 시작했다. 면접에서부터 신체검사를 거쳐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골인지점으로 들어섰을 때의 보람과 성취감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고맙습니다. 기다릴게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 책상 위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명함과 함께 출입증이 들어있었다. ‘K 주식회사. 기술본부장, 상무이사 박윤기.’ 두 곳 모두에 찍힌 굵은 볼드체의 글씨가 비로소 나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사회적 역할에 따른 권한과 책임, 그리고 의무가 주어진 인격체로서의 나로.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내 평생 그만큼 화려한 시상식은 치러본 적이 없었다. S사에서 기술개발공로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할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분위기를 깬 건 가방속의 전화기였다. 전화기에서 새어나온 정명의 목소리는 분명 반가웠지만 보기 드물게 찾아온 흥분을 진정시켜버린 탓에 못마땅함 또한 숨길 수 없었다.
“오랜만에 출근한 기분이 어때? 할 만해?”
언제 대해도 밝고 쾌활한 그였다.
“모르겠어. 그냥 얼떨떨할 뿐. 그런 걸 보면 내가 쉬기는 오래 쉬었나 봐.”
얼떨떨. 평소의 부족한 어휘력치고는 내 마음상태를 꽤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였다.
“박 전무는 또 금방 적응할 거야. 아, 이제는 박 상무라고 해야 하나?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승진이 아니라 직급이 강등되는 경험도 다해보네 그래. 그게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고마워. 여기도 알게 모르게 네 도움이 컸던 거 잘 알아.”
“아냐, 오해하지 마. 내가 도움 준 건 하나도 없어. 단지 한 게 있다면 박 상무가 갖고 있는 능력을 그대로 김 사장에게 알려준 것뿐이지. 그건 그렇고, 고민거리가 또 하나 생겼어.”
정명의 말에 난 오랜 슬럼프 끝에 모처럼 타격감각을 되찾아 막 비상의 날개를 펼치려는 순간 부상을 당하고만 야구선수가 되었다. 다가온 팀닥터에게 부상의 심각성을 묻듯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잔뜩 긴장한 모양인데? 걱정 마. 이건 행복한 고민이니까.”
그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행세를 했다. 사랑하니까 이혼하자는 시답지도 않은 말을 지껄여대는 바람둥이 남편 역할. 고민이나 이혼 쪽이 아니라 행복이나 사랑 쪽을 향해 난 귀를 쫑긋 세웠다. 정명은 W사의 황 대표 말을 편지를 읽듯 전해주었다.
‘지난번엔 만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웠소. 사실 오래전부터 난 당신을 우리 회사의 임원으로 점찍어둔 상태였소. 그건 H사의 이정명 이사가 당신의 외국어 실력이나 기술적 전문성이 뛰어나다고 알려주어서가 아니라오. 당신이 자동차 차체분야에서 정평이 나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 말이오. 그러던 차에 무슨 운명처럼 이 이사가 당신을 소개해주더군요. 그래서 이번이야말로 우리가 당신을 영입할 최적기라 판단했던 것이오. 당신더러 서울에서 만나자고한 날도 어쩌다 시간이 나서 만나는 것처럼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실상은 다르오. 오래 전부터의 영입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쁜 가운데 일부러 시간을 냈던 것이오. 그럼에도 다른 약속을 핑계로 당신이 거부하는 바람에 서운함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소. W사는 현재 터키에 2개의 법인을 보유하고 있소. 그중 한 곳의 법인장은 현재 공석이오. 임시로 한 사람이 두 곳의 법인장을 겸직하고 있지만 그럴 규모가 아닌 탓에 업무의 누수가 심한 형편이오. 난 당신을 그곳의 법인장으로 임명하려하오. 당연히 지금도 그 계획은 유효하오. 부족하지 않은 연봉과 복리후생, 거기다 해외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집이며 차, 집안일을 돌보는 도우미까지도 아낌없이 지원할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사정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한 조건도 수용할 용의가 있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황 대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제발 좀 설득해달라는 통에 정명은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가 고민 운운한 것도 황 대표의 이런 진심어린 적극성을 통감한 때문이었다.
“나 같으면 W사를 선택하겠어.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 봐. 어차피 결정은 박 상무 몫이니까.”
나 역시 대대손손 청백리를 가문의 영광으로 섬기거나 눈앞의 이익을 두고 성인군자타령이나 읊어대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무일수 단 하루라는 기네스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소변차용이라는 희대의 수모와 적성에 맞지도 않는 호색한 역을 감수하면서까지 획득한 자리가 아닌가.
“충분히 혹할 조건이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도와준 너나 나를 뽑아준 김 사장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난 인간적 도리를 저버릴 수 없다면서도 명분에 얽매여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W사의 조건이 워낙에 좋으니. 참, 최상진이 알지? S사에서 같이 근무도 했었잖아. 걔가 지금 공석인 그 터키 법인의 법인장을 했다는데 통화 한 번 해봐. 그럼 그 회사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을 테니. 당장 가타부타 결정하지 말고 그랑 통화한 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겠어?”
상진은 나와 S사 입사 동기였다. 그는 직장생활 내내 학자로서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근무 중 석사와 박사과정을 모두 마친 것만 봐도 그의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다. 몇 년 전 그는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한 사립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랬던 그가 최근에 다시 이직해 W사의 터키 현지법인에서 근무를 했던 모양이었다.
“알았어. 일단 상진이하고 통화해보고 다시 연락할게.”
없어도 고민 많아도 고민이라더니 지금의 상태가 꼭 그 짝이었다. 그 고민 가운데 정명의 말처럼 행복한 고민 같은 건 없었다. 곤란한 현재 상태가 개탄스러웠지만 누굴 탓할 수는 없었다. 다 내 변덕과 욕심에서 비롯되는 문제였으니. 아마 고민이 없어도 그걸 고민할 터였다. 결국 내가 나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시네요. 가시죠.”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회사 앞에 있는 오리전문점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김 사장이 손을 흔들었다. 주문까지 마쳤는지 불판 위에는 커다란 그릇이 얹혀있었고 각 자리마다 수저와 밥, 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근무 중엔 시간이 좀체 안 나서 이렇게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오리백숙을 주문했는데 괜찮으신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걸리는 요리라 제 마음대로 시켰습니다. 허허허.”
나에게 음식은 맛있는 것과 못 먹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는 맛없는 것 따위는 없었다. 그만큼 식도락가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두 가지 음식 사이의 경계지점에 있는 음식이 오리고기였다.
“오리백숙, 좋죠. 워낙 아무 거나 잘 먹는 체질이라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악의의 정직인지 선의의 거짓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아첨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준비해둔 거라 다 익었어요. 자, 듭시다.”
백숙보다 밑반찬 쪽으로 자주 향하는 내 손을 감지한 것일까? 김 사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음식이름이 튀어나왔다.
“박 상무, 혹시 개고기는 먹어요? 실은 이 집 보신탕이 서울에서 제일이거든. 저 홀에 앉은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게 다 보신탕이에요.”
아부도 공부처럼 습관화 훈련이 필요한데 난 아무래도 그쪽으로는 자질이 부족했다. 엉겁결에 진심이 튀어나왔다.
“한때는 먹었는데요. 요즘엔 손이 안 가더라구요.”
“그래요? 그럼 오늘 오리백숙 시키길 잘했구먼. 조 부장은 어때, 보신탕?”
“저야, 사장님만큼은 아니어도 여름이면 자주 즐기는 음식 중 하나죠.”
조 부장은 지휘관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는 유능한 부관이었다. 김 사장은 미리 각본을 준비라도 한 것처럼 보신탕으로 화제를 이어갔다.
“이번에 왜 개 식용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잖아요. 난 도무지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니 먹기 싫은 사람은 안 먹으면 되지 그걸 법제화까지 해가면서 강제로 못 먹게 하냐 말이에요. 다른 나라에서는 안 먹는다거나 또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어서 그런다는데 그것도 말이 안 돼요. 이슬람국가에서 돼지고기 안 먹는다고 우리도 안 먹을 거요? 또 인간에 가장 가까운 원숭이의 골을 파먹는 나라도 있어요. 물론 개를 두들겨 패서 잡는 것 같은 동물학대행위야 엄격하게 규제해야겠지만 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건 식성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행위예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침해라구요. 소나 돼지처럼 도살하는 방법과 장소를 법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하면 될 일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의 열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개고기업자가 개를 두드려 잡았다면 국회의원들은 개고기업자들을 두드려 잡았고 김 사장은 그 국회의원들을 두드려 잡고 있었다. 그들이 혈투를 벌이는 동안 내 몸속에서는 또 다른 개가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건 케르베로스 종으로 참견과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각기 다른 이름의 대가리 셋을 가진 놈이었다. 난 놈을 두드려 잡기 시작했다. 명확한 소신도 없으면서 개의 식용여부를 논하는 토론에 참견하지 않으려 했고, 개식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물학대자들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했으며, 개소주판매업자들이 절대 동물복지 옹호론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도 버리려했다. 괜스레 수저를 들었다 놓기만 되풀이했다. 적극적으로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 내가 못마땅했던지 그의 말이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박 상무. 좀 뭣한 이야긴데 원래 머리 스타일이 그렇습니까?”
용의검사를 하는 선생님의 꾸지람이 내포된 목소리였다. 그때서야 두 사람의 머리가 짧은 스포츠형이란 걸 깨달았다.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급작스레 진행되어 그걸 숨기려 내 머리는 귀를 반쯤 덮을 정도였다.
“왜요? 제 머리가 보기 흉한가요?”
머리가 긴 것과 깨끗하고 단정하지 않다는 건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가 지적한 것이 어느 쪽인지 알고 싶었다.
“우리 회사에 별도로 두발규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머리가 길면 아무래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지 않겠어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깔끔하게 이발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S사에 입사하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여 년 전인 그때만 해도 사규에 두발규정이라는 게 있던 시절이었고 특히 S사는 그게 엄격하기로 세간에 유명했었다. 연수원에 입소하던 날이었다. 딴엔 머리를 짧게 깎는다고 깎았지만 난 두발검사에서 걸리고 말았다. 앞머리를 자로 잰 결과 1센티미터가 오버된다는 게 위반내용이었다. 머리를 한 번 더 깎을 수밖에 없었다. 이발소를 찾은 나는 반항심에 이발사를 향해 반삭을 해달라고 말했다. 군 입대를 하던 날처럼. 연수원으로 돌아오자 교육담당직원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만 두라 윽박지르며 내 반항에 반항했다. 그 반항에 난 또 침묵으로 반항했다. 그걸 한 편의 영화처럼 즐긴 동기들은 연수시절 내내 나를 빡빡이로 부르며 놀려댔다. 내 연수성적은 밉보임 때문에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알겠습니다. 퇴근하면 이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철부지 시절을 답습할 수는 없어 고분고분 굴었다. 그러나 식성의 다양성은 강조하면서 개성의 다양성은 인정하지 않는 그의 야누스적 심성에 불쾌감인지 분노인지 정확히 규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치밀었다. 케르베로스의 서로 다른 대가리들이 게임기 속 두더지처럼 또 여기저기서 솟아올랐다. 뿅망치를 든 내 손이 그것들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W사 황 사장의 제안이 내 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움직임을 자꾸 둔화시켰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약간의 여유가 찾아왔다. 상진과 통화해보기로 했다. 그는 W사를 떠난 후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막상 전화를 한 쪽은 나였지만 난 목적을 선뜻 말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려댔다. 남의 장례식장에 추모를 와서 자랑하듯 청첩장을 내밀 수는 없었다.
“S사를 나오면서 예전의 빡빡이 기질을 또 한 번 보여줬다는 소문이 있더라. 이번엔 바리캉으로 머리를 민 게 아니라 아예 불도저로 계약서를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상진은 나의 퇴사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지구상의 그 어떤 사람과도 관계로 연결된다는 판국에 그와 나 사이라면 말해 무엇 하랴.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어. 잘한 일은 아니지.”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 같으니 미리 결탁한 언론을 통해 내용을 마사지시킨 후 간보기로 슬쩍 퍼뜨리는 몹쓸 정부의 소문에 비해 내 소문은 그 결이 달랐다. 순기능을 발휘해 대화의 물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 반골의 강직함이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작용한 것 아니겠어? 듣자하니 W사 황 대표가 박 전무를 터키 공장 법인장으로 내심 점찍은 모양이더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직접 W사를 언급하며 엠바고의 봉인을 해제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문에 오늘 전화했어. 지인이 소개를 해주어 어쩔까 고민 중인데 최 교수가 그곳에 근무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회사의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최 교수가 그만 둔 배경도 좀 알고 싶어서.”
난 기레기들과는 달리 솔직함으로 질문을 마사지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짐작을 했지. 글쎄, 내가 그곳을 그만 둔 이유는 회사 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어. 박 전무도 잘 알겠지만 나야 생산부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닌가. 개발업무만을 해온 내가 생산 공장을 맡기에는 벅차더군. 기술적인 지식이 부족하니 리더십 발휘도 제대로 안되고 말이야. 당연히 실적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지. 황 대표는 그게 불만이었던 거야.”
“세상에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어디 있다구. 기술이 강하면 다른 부분이 부족한 법이고 다른 부분이 강하면 기술이 부족한 건 당연하지 않나. 법인장이라는 자리가 신들이나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상진의 자기반성은 나의 자기반성이 되었다. 골수 엔지니어인 나는 법인장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인사, 회계, 총무 같은 경영지원 분야는 내 능력의 여집합에 해당하는 영역이었다. 상진의 논리대로라면 나 또한 그 자리에서 내쳐져야하는 대상이었다.
“그 공장은 기술 분야가 강한 사람이 맡는 게 맞아.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터라 생산성이 형편없거든. 설비나 레이아웃, 기타 프로세스 등의 개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게 그 공장의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지. 거기다 W사가 그렇게 큰 공장을 운영해본 적도 없고. 황 대표는 개발을 주로 했던 나에게 그쪽으로 상당한 기대를 했던 모양인데 내가 역부족이었던 셈이지. 아마 박 전무라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거야. 전공도 딱 맞는 분야일 테니. 황 대표가 사람은 제대로 고른 것 같아.”
“내가 뭐 그리 전문가라고. 그래, 앞으로 어쩔 계획이야?”
W사의 문제는 시간을 두고 검토하는 사안들이 담긴 서랍으로 옮겨졌다.
“글쎄,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네. 다들 임용이 끝난 시즌이라. 그래서 W사가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은 들어.”
야속이라는 단어를 내 바이오닉 고막이 놓칠 리 없었다. 그건 그의 퇴사에 W사가 관여되어있다는 암시였다.
“왜, 퇴직할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사직을 권고하기에 내가 시간을 좀 달라고 했거든. 6개월밖에 안 되는 근무기간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외국생활이었는데 그걸 정리하는 것도 그렇고, 가족들에게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또 다음 직장에 대해서도 생각이 필요하고 해서. 처음에 3주라는 시간을 주더라고. 넉넉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감사하다는 생각에 계획을 세워 한창 정리 중이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사흘이 지나자 바로 다음날 떠나라고 비행기 표를 손에 쥐어주는 거야. 정말 냉정하더구먼. 그래 직원들과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쫓기듯 귀국했다네. 출국할 때도 그랬어. 그때는 대학교가 학기 중이었거든. 내 강의시간도 무려 주당 열 시간 가까이 됐고. 사정을 알렸지만 막무가내였어. 급하다면서 당장 출국하라잖아. 어쩔 수 없이 학생들과 학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민폐를 끼치고 말았지. 그랬으니 지금 그리로 돌아가는 게 힘들 수밖에.”
차 수리를 의뢰한 자동차정비소에서 정비사로부터 수리방법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정확한 고장의 원인을 파악하려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된 부품을 새 것으로 교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나도 수리가 가능했다. 조금 전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W사란 부품을 꺼내 과감하게 버린 후 K사란 부픔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랬구나. 너무 걱정 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잖아. 곧 좋은 일 생길 거야.”
상진이 내게 사용했던 단어 새옹지마를 난 전화위복으로 바꿔 그를 위로했다. 동어반복을 피한 건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의 것을 빼앗지 않았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정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상진과 통화했어. W사와의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좀 있었다더군. 고민 끝에 여기 정 붙이고 살기로 했어. 황 대표에게는 잘 봐주어 고맙다고 전해줘,’
‘알았어.’
내 줌렌즈는 짧은 정명의 답 뒤로 괄호 안에 묶인 글자들까지 읽어냈다. 안타깝지만 네 결정을 존중해.
“상무님, 퇴근하시죠.”
작업복을 벗고 정장차림으로 나타난 조 부장이 말했다. 하루 종일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서인지 퇴근이라는 말 때문인지 한결 친밀감이 느껴졌다.
“매일 이 시간이면 퇴근하나요?”
기술본부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책상을 지킨 채 요지부동이었다.
“보통 여덟 시는 넘어야 퇴근하는 걸요. 상무님께서는 오늘 첫 출근이시잖아요.”
적어도 이 회사에서만은 아침형 인간을 강요한 이면에 근무시간의 연장이라는 사술이 개입되어 있지 않기를 바랐건만. 오늘도 나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원치 않는 쪽이 원하는 쪽을 눌러 이긴 것이다. 원하지 않는 승리를 마감하려면 원하지 않는 걸 원해야하는 것일까? K사에서 첫 번째 과제를 근무시간 정상화로 삼고 싶은 빡빡이 기질이 꿈틀거렸다.
“그래요, 퇴근합시다.”
나의 퇴근시간이 그들의 업무마감 기준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김 사장의 지시를 최우선으로 수행해야했다. 30년 근무기간 동안 배우고 익혀온 업무우선순위 철칙에 따른 결과였다. 1순위 상사의 지시, 2순위 타부서와의 협조업무, 마지막 3순위 나의 업무. 그의 1호 지시는 점심식사 때 다분히 모욕감을 느끼게 하던 바로 이발이었다.
“용산역으로 가시는 거죠? 제가 태워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만 가는 길에 머리를 좀 깎으려구요.”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미장원이나 이발소는 샐러리맨과 달리 근무시간을 엄격히 준수했기에 회사 근방이 아니면 오늘 이발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 이유가 연장근무를 할수록 손해라는 희한한 법칙 때문이라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세요? 회사 바로 앞에 미장원이 있는데. 정문을 나서면 길 건너편에 바로 보일 거예요. 가격도 8천원이라 우리 직원들 거기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조 부장의 미장원 리뷰라면 다른 어떤 댓글러보다 믿을만했다.
“알겠습니다. 거기 한번 가 보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예, 상무님께서도 조심해 들어가십시오.”
1층 현관에서 그와 헤어졌다. 아침에 나를 막아섰던 여성이 그 시간에도 근무 중이었다.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출입증이 양복 깃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길 건너편에서는 미장원의 회전등이 뱅뱅 돌아갔다. 또 빡빡이가 나서려는 걸 난 오늘은 아니라며 다독였다.
“웬일이세요? 당신이 머리를 이렇게 짧게 다 깎으시고.”
영숙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멋쩍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최 손에 잡히는 머리숱이 없었다. 거울을 보았다. 낯선 사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 출발하겠다는 다짐이지, 뭘.”
“그나저나 새 직장은 어때요? 다닐만해요?”
첫 출근의 소회를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난 30년째 동일한 직장에서 퇴근하는 느낌으로 답했다.
“직장이라는 게 여기나 저기나 다 똑 같은 것 아니겠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 뿐. 새로운 사람들도 곧 친해질 테니 거기에도 금방 적응되겠지.”
예사롭지 않은 날 예사로운 척하는 말이야말로 오늘 하루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옷을 벗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푸른빛의 꼬마등이 문자가 수신되었음을 알렸다. 정명에게서 온 문자였다.
‘자네의 뜻을 황 대표에게 그대로 전했더니 그가 자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주었어. 통화하고 싶나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번복하기도 싫었다. 저울은 사람을 욕심으로 이끄는 도구일 뿐이어서 저울질을 하면 할수록 미련과 후회만 커질 뿐이었다. 정명이 전화 대신 문자라는 방법을 사용한 것도 그걸 잘 아는 까닭일 것이다. 내가 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조차 그는 이해하려니 여겼다. 반면 황 대표는 달랐다. 집요한 면이 없지 않았다. 막 저녁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황 대표였다. 직접대화는 처음이었다.
“박 전무. 최상진 전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그만 둔 사유에 대해 똑똑히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내가 전화를 했소. 아마도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이건 박 전무가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회사와 나의 이미지에 대한 문제라 명백히 해두고 싶소.”
그가 나를 통하지 않고도 알아낸 나의 내심을 바꾸려하고 있었다. 그를 통하지 않고도 그의 내심을 알아차린 난 난감했다. 취재원 비닉권(秘匿權)의 차원에서 상진은 보호받아 마땅했고, 초면인 그는 무얼 캐묻거나 말을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었다. 침묵이 최선이었다.
“…….”
“우선은 최 전무에 대해 현지인들이 집단 반발을 했소. 기술적인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앞뒤 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의 말에는 귀를 막고 있었으니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고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된 것이지요. 더 큰 문제는 주변의 다른 경쟁사에 수차례나 입사를 시도하면서 지원했다는 사실이오. 우리 회사의 조건이 그리 나쁜 편이 아님에도 조금만 나은 조건이라면 그는 이직을 시도했소. 뿐만 아니라 경쟁사에 우리의 신기술을 거래조건으로 내걸어 좋은 조건을 확보하려했다는 정보도 있었다오. 그건 내가 경쟁사로부터 직접 입수한 것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요. 이 정도라면 그의 행위는 범죄에 해당되는 것 아니겠소? 차마 면직을 시키지 못해 우리는 사직을 권유했지요. 그러니 시간을 좀 달라고 하기에 3주 정도의 시간을 주었더니 이번에는 그 기간 동안 회사의 차량과 유류비로 터키 전역을 여행하겠다는 거예요. 그건 누가 봐도 아니지 않소. 그래서 바로 귀국 조치시켰지요. 박 전무. 같이 생활해보면 알겠지만 나 그리 나쁜 사람 아니오. 오늘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것도 박 전무의 재능이 아까워 그러는 것이니 최 전무의 이야기만 철저히 믿고 우리를 뿌리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소. 자, 다시 한 번 생각해줄 수 있겠소?”
죄수의 딜레마를 체험하는 듯했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들로만 편집해서 들려준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비로소 상진의 터키사태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이 대충 그려졌다. 그들은 결코 거짓진술을 하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알겠습니다.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원래 이런 건 빨리 결정해야하는 법이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도 있지 않소, 왜. 그리고 내가 제시한 조건은 이정명 이사를 통해 전해졌을 거라 믿소만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우리가 만나는 날 이야기를 해 주시오. 비상식적인 것만 아니라면 난 박 전무에 대해 뭐든 받아드릴 의향이 있으니.”
“고맙습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메일을 드리지요.”
나의 케르베로스가 유독 황 대표를 향해 크게 짖었던 건 아닐까 의심이 갔다. 낯선 사람을 향한 짖음이야 개의 충성심을 대변하는 행위가 아닌가.
“기다리겠소. 좌우지간 잘 판단해 주시오.”
통화가 끝났다. 그동안 황 대표에 대한 판단 근거는 모두가 간접적인 정황들이었다. 그를 바라본 건 나의 시선이 아닌 정명과 상진의 시선이었다. 거기에 겨우 한 차례 통화만 더해진 것뿐. 그를 좀 더 알고 싶었다. 대화가 필요했다. 그런 다음에야 내 갈등에 진정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서둘러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을 작성하는 내 손이 바빠졌다.
‘편하신 시간을 정해주시면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드리기로 하죠. 저에 대해 좋은 인상 가져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