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찾아오나 당신도 모르게 놓칠 수 있으니 사소한 것에도 긴장하라.’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습관처럼 신문열람실을 찾아 한 중앙일간지에서 읽은 오늘 내 간지(干支)의 운세였다. 언젠가 보았던 카이로스의 초상이 떠올랐다. 긴 앞머리로 얼굴을 약간 가린 모습. 운세는 그의 가려진 모습까지 세세하게 드러내는 몽타주를 내게 제시하고 있었다. 그건 나의 모래시계 호리병 안에 크로노스의 모래만이 아니라 카이로스, 그의 모래도 함께 들어있다는 의미였다. 기회가 기회를 잡을 기회를 준 것이다. 재미삼아 읽으라는 것을 두고 뭐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 탓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난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설마 내 동갑내기들이 모두 그렇게 똑같은 운세라는 말을 믿는 것이냐 비웃어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읽어보면 뒤에 이어지는 긴장의 여부에 따라 동갑내기들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테니까.
즉시 신체의 각 기관으로 그의 몽타주를 뿌리며 긴급수배령을 내렸다. 뒤통수가 대머리면서 어깨와 발에 날개가 달린 사진도 추가로 공개했다. 생김새로 볼 때 여간 빠른 자가 아닌데다 정면에서 체포하지 않으면 뒤에서는 체포가 어렵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영웅심리에서 혼자 잡겠다고 나서서는 안 되며 철저하게 공조할 것도 명령했다.
구체적인 체포방법은 난상토론 끝에 바람도 새어나가지 못하는 특수올가미를 별도로 준비해 그가 나타날만한 길목에서 잠복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잠복장소를 특정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탐문수사를 통해 취득하기로 했다. 탐문대상인 다른 일간지를 꺼내 역시나 오늘의 운세 면을 펼쳤다. 예상한 대로 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어두운 밤거리를 밝혀주는 빛이 당신에게 내리쬐기 시작했으니 성공이 눈앞에 있다.’ 이건 지문이나 혈흔 같은 그의 고유정보나 마찬가지여서 행방을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였다. 그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이는 듯했다.
그가 출현할만한 장소 일 순위는 그동안 이력서를 접수한 몇 군데 회사일 가능성이 짙었다. 길목이라면 단연코 메일함이었다. 얼른 내 자리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메일함 어딘가에서 합격통보소식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별도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전 감각기관이 운세가 경고한 긴장상태에 돌입해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카이로스를 체포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받은 메일함은 텅 비어있었다. 브레인 포그(Brain Fog) 가 일어났다. 카이로스는 사라졌고 그 주변으로 안개만 잔뜩 몰려들었다.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려 허벅지를 부여잡았다. 의외로 떨림의 원천은 주머니의 핸드폰이었다. 발신자는 K사 조 부장이었다. 그와는 이미 이승에서의 인연이 다한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전화기를 들고 바쁜 걸음으로 열람실 밖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카이로스의 몽타주가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조 부장과 카이로스의 모습은 기묘할 정도로 닮아있었다.
“박윤기 씨, H사의 이정명 이사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다짜고짜 그는 정명의 이름을 들먹이며 통화를 시작했다. 불만이 잔뜩 서린 음성이었다. 정명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카이로스가 정명의 이웃이었던 것일까? K사 면접에서 낙방했다고 알렸을 때 왠지 흥분하는 것 같더니.
“개인적으로 제 고등학교 선배 됩니다만. 왜 그러시죠?”
친구와 고교선배 그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다 난 선배의 편을 들었다. 카이로스가 친구의 이웃이기보다 선배의 이웃일 때 조 부장의 불만이 조금은 줄어들 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이었다. 목소리에 한껏 공손함을 실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저희 사장님께서 그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박윤기 씨 이름이 거명되었다기에 그냥……. 혹시 불합격 결정이 공정하지 못하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의 불만은 정명으로부터 비롯된 게 확실해보였다. 다만 정명을 나에 대한 부정청탁의 장본인으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불공정채용의 당사자로 지목하는 감시원으로 취급해서였다. 그 누명을 벗자고 굳이 나에게 전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카이로스가 개입되어있었다.
“그럴 리가요. 프레스전문가를 필요로 하는데 차체전문가가 지원했으니 당연한 결과죠. 전 조금도 불만이 없습니다.”
행여 어딘가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난 온갖 주의력을 다 집중시켰다.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물어볼 게 있어 전화를 드렸는데요. 아직도 저희 회사에 입사할 생각이 있나요?”
조 부장의 적의가 옅어지면서 아니나 다를까 카이로스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물어보시죠? 그거야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부드러워진 그의 말투가 미끼인지 먹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난 입질을 시작했다. 그것이 카이로스의 몸을 덮어씌운 당의(唐衣)기를 간곡하게 바라면서.
“어차피 꺼낸 말이니 사실대로 이야기하죠. 박윤기 씨와의 면접 이후 우린 몇 사람을 더 찾아 면접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프레스전문가라면서도 하나같이 박윤기 씨에 비해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더 시간을 끌어봤자 나을 게 없다는 생각에 우린 박윤기 씨가 원한다면 채용하기로 입장을 선회한 것입니다. 어떠세요, 생각이 있으신가요?”
추가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카이로스가 확실했다. 올가미를 휙 던졌다. 그는 순순히 포박되었다. 난 그가 쥐고 있던 저울과 칼을 뺏어들었다.
“예, 있습니다. 입사할 목적으로 면접을 본 것이니까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이 가능하시죠?”
조 부장은 출근날짜의 결정권까지 내게 주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그럴수록 내가 내세워야하는 건 기고만장이 아니라 겸손의 자세였다.
“가능하면 일찍 출근하고 싶습니다만, 회사의 사정을 감안해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7월 1일이 어떠세요?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 또 열흘정도 남았으니 저희들 나름대로 준비해야할 일들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따로 이의를 달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뭐.”
“급여나 근무조건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면접 때 상세히 설명 드렸으니 잘 아실 걸로 믿고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입사에 필요한 서류가 몇 가지 있는데요, 그건 박윤기 씨께서 별도로 준비해주셔야 합니다. 서류 목록은 지금 바로 메일로 송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사일까지 남은 날짜가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그것들은 등기우편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 출근하는 날은 지난번 면접을 보았던 그곳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출근 시간은 몇 시부터죠?”
내일 당장 출근이라도 해야 하는 사람처럼 난 서두르고 있었다. 그럴 것이 기다려온 세월이 어느덧 육 개월이었다.
“오전 여덟 시가 출근시간입니다만 그날은 첫날이니 약 10분 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저에게 전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달리 질문사항이 있으신가요? 없으면 그날 뵙도록 하죠.”
통화는 끝났다. 이만하면 오늘의 운세는 믿거나 말거나의 단계를 넘어서있었다. 표현이 워낙 중의적이어서 어떤 상황에도 꿰맞추려들면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것으로 인해 품은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점이었다. 우연의 일치라 해서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아침의 그 글을 곱씹어보았다. ‘기회가 찾아오나 당신도 모르게 놓칠 수 있으니 사소한 것에도 긴장하라.’ 이제 남은 건 사소한 것에도 긴장하는 마음의 자세였다. 그렇다면 사소한 것이란 아마도 입사서류를 준비하는 일이리라. 난 카이로스에 대한 수배령을 해제하는 대신 그를 K사까지 안전하게 압송하기 위한 호송령을 발령했다. 호송수레 전후좌우로 주요감각기관들이 배치되었다.
조 부장은 K사까지의 호송길을 위성지도로 상세하게 표시한 안내문을 보내왔다. 길은 멀었고 여러 구간으로 나뉘어있었다. 신분증 사본부터 시작해 주민등록등본, 경력증명서,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채용신체검사서, 계좌개설확인서등. 그걸 받아든 나는 언젠가 동해안으로 뻗은 해파랑길 770킬로미터를 완주하겠다고 나섰던 때를 떠올렸다. 50코스를 낱낱이 분석해 하루 걸어야 할 거리와 매일의 숙박지를 꼼꼼하게 계획함으로써 3주 남짓한 기간에 무사완주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던 기억이 생생했다.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그때처럼 사전에 경로에 대한 철저한 파악과 대비가 필요했다.
호송길 도중 발견된 첫 번째 보틀넥(Bottle Neck) 구간은 경력증명서였다. 그건 온라인 발급이 불가해서 S사로 직접 연락해 발급받아야한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미우라와의 계약이 파기된 이후 그 회사에서 나는 팀킬의 화신으로 지목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명수의 입이라면 그 정도 악의적 여론몰이야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악조건 하에서도 철가면이나 요즘 자동차 외판 재료로 급부상하고 있는 CFRP(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s)가면을 쓰고서 증명서발급을 의뢰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경력증명서가 아니라 배신증명서가 될 위험이 너무 컸다.
그때 호송을 진두지휘하던 시각(視覺)이 급보를 전해왔다. 조 부장으로부터 경력증명서의 우회로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우회코스는 건강보험 자격득실확인서, 진입루트는 건강보험사이트. 그 정도면 곤란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새삼 팀워크가 돋보여 안심했지만 또 하나 돌파해야할 난관이 남아있어 여전히 께름칙했다. 그건 바로 채용신체검사서였다.
난 20년 가까이 마라톤을 취미로 삼아오는 중이었다. 그 탓에 비교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세월의 파괴력에 겁 없이 맞설 수준은 아니었다. 노화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 나의 자신감을 앗아갔다. 그러면서 나에게 병원은 저승행 버스의 중간정류장으로 인식되어갔다. 현대판 고려장이 버젓이 벌어지는 곳이 요양병원이고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매년행사로 치러지는 건강검진을 받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고 그때마다 불미스런 결과가 나올까 전전긍긍했다. 피지컬은 멘탈을 쉽게 무너뜨렸다. 급기야 의사와 간호사는 히포크라테스의 후예와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백의의 악마들이 되어 화이트가운 증후군이라는 병이 아닌 병을 내게 심어놓았다. 검진을 받을 때면 나의 혈압은 140/90mmHg 언저리를 오갔다. 체온계가 고작인 우리 집 의료기리스트에 혈압계라는 전문적이면서도 고급스런 품목이 추가된 계기였다. 그런 혈압은 내 성격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놈이었다. 측정시간과 횟수를 막론하고 집에서는 항상 더도 덜도 아닌 120/80mmHg를 기록했다. 그럴수록 내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혈압계도, 의사도, 병원도, 집도,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오늘 혈압을 잰다면 그 수치 역시 장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당뇨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소 스윗(So Sweet). 그런 느낌이 말과 행동에서 발산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정작 그 표현의 주인은 엉뚱한 놈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검진 때면 가끔씩 난 소변이 달콤하다는 진단을 받곤 했다. 다행히 매번 혈당치만은 정상수치를 기록해 크게 문제 삼을 건 없었지만 그 때문에 재검사를 받는 불편을 감내해야만 했으니 그것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급하게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기억력, 추리력, 창의력, 논리력, 정보검색력 등이 불려와 토론을 전개했다. 벼락치기에 능하던 학창시절의 주특기가 되살아났다. 시험기간이 임박해질수록 두뇌의 모든 기능이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던 그 시절. 개개 능력의 고효율은 전체적인 시너지 효과도 촉진시켰다. 의장으로 선출된 정보검색력의 지시에 따라 서기인 논리력이 회의록을 보고서의 형태로 작성해 내놓았다.
1. 토론주제 : 완벽한 채용신체검사서를 취득하기 위한 방안
2. 문제점 : 요당검출과 화이트가운 증후군
3-1. 요당검출 대응방안
1) 혈당치가 정상인 이상 요당이 검출된다한들 불합격요인은 아니지만 괜히 꼬투리를 잡힐 필요는 없으니 소변검사부터 적절히 대처할 것을 권고
2) 타인의 소변을 검사샘플로 대체하여 제시하는 방안 권유
3) 대부분의 병원이 자발적 소변적출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이상 작은 밀폐용기를 사용하여 대체물을 미리 준비한다면 쉽게 실현가능
4) 대상자는 건강한 사람이면 무난하나 비밀과 안전을 고려하여 가족, 특히 그 중에서도 성별이 동일한 민수를 추천
3-2. 화이트가운 증후군 대응방안
1) 검사당일 혈압강하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진 다크초콜릿(카카오 함유량 90% 이상) 적당량 섭취 필요
2) 심리적 안정도 중요하므로 검사 직전 청심환 복용 필수
3) 주기적으로 소부혈 지압 병행 실시(참고로 소부혈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었을 때 새끼손가락의 손톱 끝이 맞닿는 위치임)
4) 흰 가운에 대한 거부반응의 일종이므로 의사나 간호사를 대할 때 색안경을 쓰고 쳐다볼 것을 강력하게 권고
5) 아예 흰색을 다른 색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호색한(好色漢) 훈련과정 이수 검토
전략이 수립된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가까운 병원을 찾아 전화문의를 했다. 그들은 작전 수행에 방해할 뜻이 전혀 없음을 내비쳤다. 물론 내가 사전에 비밀전략을 공개한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그것까지 동의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제 할 일은 다하겠다는 뜻이었다. 작금의 뉴스를 대하다보면 법과 원칙의 진의가 강약약강(强弱弱强)(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는 뜻의 유행어)인 경우가 허다해 그마저 의심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상담자의 어조나 어감으로 볼 때 의료계마저 거기에 물든 것 같지는 않았다. 난 비장한 각오로 출전시간을 예약까지 해두었다.
카이로스의 호송에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예약시간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일단 쉬운 구간부터 통과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지나야 할 경로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거점이 있었다. 우회로의 건강보험사이트 외에도 정부24, 주거래은행, 내가 다녔던 모교의 홈페이지 내지는 사이트들이 그곳이었다. 거기라야 코스통과에 관한 인증서가 발급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완주자로 인증받기 위해서 정해진 지점에서 세요(Sello)라는 스탬프를 받아야 하듯이. IT강국으로 손꼽히는 나라의 도서관에서라면, 또 그 나라에서 일등국민을 자부하는 나라면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코스는 단 하나 채용신체검사서 뿐이었다.
마지막 관문까지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회의에서 도출된 결론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권고한 사항을 준수하기 위해 가장 먼저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밤늦어서야 돌아온 녀석의 단잠을 깨우는 게 안쓰러웠지만 내 코가 석 자였다. 긴 통화음 끝에 전화를 받은 녀석의 목소리는 김장을 앞둔 절임배추마냥 숨이 죽어있었다.
“민수야, 미안하지만 아빠가 부탁할 게 있어. 좀 뭐한 얘기긴 한데 네 소변이 좀 필요해. 취업 때문에 신체검사를 받으려다보니까 내 소변에는 당이 섞여 나온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 네 걸 대신 제출하려는데 약병 같은데 좀 받아두지 않을래?”
난 십자군전쟁 때 악마의 칼로 악명 높았던 다마스커스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생물학적 부자관계 사이에도 존재하기 마련인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껄끄러움은 단박에 잘려나갔다. 내 결기와 용기가 가상했던지 민수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대범함을 보였다.
“그럴게요. 그런데 아빠, 요새 내가 술도 많이 먹고 몸도 막 놀려서 소변 상태가 아빠보다 꼭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걸요. 잘못되더라도 실망은 마세요.”
나에 대한 걱정인지 저에 대한 불신인지 아리송한 녀석의 말은 오히려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잘 안다는 게 이런 뜻일까?
“알았어, 인마. 잘못 되더라도 책임은 안 물을게. 혹시 볼일이 있어 나가더라도 아빠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어디다 잘 둬.”
너 또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말이 아슬아슬하게 입술근처에서 멈춰 섰다. 나처럼 초라해진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다.
“엄마가 집에 계시니까 엄마에게 얘기해둘게요.”
여벌옷에 미투리까지 괴나리봇짐은 얼추 꾸려진 셈이었다.
건강검진센터 입구에서 예약사실을 알렸더니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의 간호사가 문진표 작성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주입식교육에 젖어있던 내 머리는 정직한 답보다 정확한 답을 찾아 금세 작성을 마쳤다. 옳은 것보다 맞는 것을 선택할 때 생존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득점이 가능한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녀는 코스를 완주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문진표와 함께 검사기록지가 꽂힌 파일을 든 채 아라비아 숫자가 적힌 팻말의 방들을 차례로 돌아 원위치한 후 그걸 제출하면 완주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관은 시작부터 찾아왔다. 1번방이 혈압측정이었다.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곤 하지만 그것도 한숨 돌릴 겨를이 주어진 후일 때의 말이었다. 어렵게 준비한 많은 대책들이 제대로 적용되지도 못한 채 사장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주어진 운명 앞에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운세는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무슨 유명 맛집의 대기줄이라면 모를까 혈압측정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쩜 그리 많은 것인지. 방안에 있던 간호사가 나를 돌려세웠다. 다른 사람에겐 1번인 그 방의 번호가 나에겐 마지막 번호인 10번이라면서. 우연도 잦아지면 당연이 되고 필연이 되는 법. 그 과정에서 난 카이로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임을 확신했다.
소변검사가 진행되는 7번방이었다. 입구에서 쥐고 있던 파일을 들이밀었다. 파일을 받아든 간호사가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대기하라는 사인을 보내고는 방안으로 사라졌다. 난 지체 없이 괴나리봇짐을 풀어 신비의 묘약을 꺼내 바지주머니에 숨겼다. 가방을 들고 검사장소로 들어간다는 건 아무래도 의심의 소지가 다분했다. 다시 문이 열리면서 조금 전의 그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저 문을 열면 화장실이니 이 스틱에 소변을 묻혀오세요.”
내 손에 서로 다른 네 가지 색상의 띠가 둘러진 종이막대가 건네졌다. 종이컵에 소변샘플을 받을 거란 예상이 빗나갔지만 준비상태로 미루어 문제될 건 없었다. 종이막대는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보았던 리트머스 시험지를 연상시켰다. 알빨파산파빨. 알칼리가 묻으면 빨강이 파랑으로, 산이 묻으면 파랑이 빨강으로 바뀌는 색의 마법을 그렇게 외워댔던 그 종이. 이 막대의 기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색깔과 반응물질만 바뀌었을 뿐.
검사막대를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용소변기도 있었지만 굳이 좌변기가 있는 독방으로 향했다. 은밀한 작전수행을 위해서는 은밀한 곳이어야 노출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그는 주도면밀함도 과시했다. 세심할 정도로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비밀병기를 꺼내들었다. 약병의 뚜껑을 열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막대를 담갔다.
막대는 만족한 듯 꼼짝도 않았다. 아니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는 듯했다. 오염수로 샤워를 하는 대신 정화수로 반신욕을 즐기는 호강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흡족하지 않을까? 적당히 온천욕을 끝낸 놈을 탕에서 끄집어냈다. 놈이 한 바탕 몸을 떨며 물기를 털어냈다. 탕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핏기가 없어보이던 놈의 볼이 발그레했다. 가슴이며 엉덩이 근처도 어째 혈색이 완연해진 것 같았다.
순간 불안감이 치솟아 올랐다. 네 가지 막대 중에는 당과 단백을 검출하는 기능이 포함되어있을 터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보였다는 건 성분의 검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소심하게나마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이 정상이라면 샤워든 반신욕이든 몸에 물도 바르지 않은 상태로 제출하는 부정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그럴싸했다. 설령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재검사를 요청하리라는 복안까지 마련한 나는 그걸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온천수가 되었던 묘약은 원상태로 보존되어야했다.
검사막대가 검사원의 손으로 옮겨갔다. 책상위에는 기준비색표(基準比色表)가 코팅이 되어 유리판 밑에 깔려있었다. 그녀의 눈 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지극히 사소한 병변조차 묵과하지 않는 화타에 버금가는 책임감으로 충만된 시선이었다. 죄의 유무를 두고 최후판결을 기다리는 피의자처럼 난 그 앞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정상이네요.”
동시에 고무인이 기록지에 자신의 발자취를 푸른색 잉크로 선명하게 찍어냈다. 정상이라고.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고개가 조아려졌다. 교도소감방으로 날아든 예승이만큼이나 큰 기쁨을 가져다준 7번방의 선물이었다.
호송작업은 막바지에 도달해있었다. 최후의 순간이 곧 최후의 위기였다. 그런 만큼 긴장감도 극에 달했다. 다크초콜릿을 벌써 몇 조각을 씹었는지 모르지만 몸과 마음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들의 눈을 피해가며 청심환까지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심장박동수는 오히려 증가추세였다. 혈압이란 단어를 아예 머릿속에서 삭제하려 애를 썼다. 쉬 지워지지 않아 더 강력한 덮어쓰기를 시도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소부혈은 양쪽 손 모두 붉게 물들다 못해 피부가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데 방안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 건 흰색 마스크를 쓴 간호사였다. 하필이면 화이트가운만으로도 모자라 화이트마스크까지 착용하다니. 그녀야말로 백의의 악마가 아닐 수 없었다. 순간 백색색맹이 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필요하다면 모든 색을 분별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나를 곤경으로 빠뜨리는 흰색이라면 원추세포가 그 어떤 물감을 써서라도 마구 덧칠하기를 바랐다. 기적을 바라며 눈을 감았다 떴지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육안이 아닌 심안에 색안경을 씌우는 비상대책이 동원되었다. 부정 의료수가, 제약회사와 리베이트 거래, 불법시술관행, 병무비리관여. 그 정도면 흰 가운이 검정 가운으로 변해도 무방하련만 망막에 덧씌운 셀로판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내 앞에는 자동혈압측정기가 금방이라도 나를 삼키려는 듯 동그랗고도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체념하는 마음으로 오른 팔을 그 속으로 깊숙이 들이밀었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튼을 눌렀고 ‘지……’하는 진동음과 함께 놈이 아가리를 다물기 시작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섬뜩함이 밀려들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분명 운명은 카이로스를 나에게 맡기려는 몸짓을 내보였었다. 비단주머니에 든 마지막 돌멩이를 꺼냈다.
옆에 선 간호사의 가운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 꺼풀 벗기고 보니 그녀는 속옷조차 화이트 일색이었다. 잠깐만 참으면 백색의 공포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속옷도 하나하나 벗겨냈다. 마침내 속살이 드러났다. 호흡이 가빠졌지만 그것도 곧 해결되리라 믿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그녀를 향해 사탕발림을 날릴 차례였다.
“저기요, 제가 병원에만 오면 혈압이 높아…….”
“혈압 측정할 때 말하면 안 됩니다. 조용히 하세요.”
모멸차고도 단호한 그녀의 말에 호색한이 되어서라도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기대감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혈압계에서 공기압이 빠져나갔다. 팔이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기기에 붉은 불빛의 디지털수치가 선명했다. 150/100. 흰색가운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다가왔다.
“혹시 고혈압이세요?”
“그런 진단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만…….”
고혈압인지 아닌지 나도 모르는 상황이라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어 선택한 답변이었다.
“혹시 약을 복용중입니까?”
“아니오.”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뜻이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횟수가 많은 게 그랬다. 그녀는 청진기를 귀에 꽂으며 나를 옆자리로 유도했다. 혈압을 재측정하겠다는 게 아니라 거짓말 여부를 검증하려는 듯했다. 그럴수록 나의 색안경을 쓴 호색한 역은 어색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청진기는 거짓말탐지기의 기능을 숨김없이 뽐냈다. 결과치는 더욱 악화되어있었다. 160/110이었다. 사기꾼의 누명까지 덮어쓸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병원에 와서 혈압만 재면 높게 나오네요. 집에서 재면 정상적인 수치가 나오는데.”
혈압측정결과 정상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근거를 제시할 길이 없는 상태에서 난 말에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뭐 그걸 제출한다 해도 어차피 채택여부야 그들 마음이겠지만. 범죄현장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음에도 알리바이를 증명할 길이 없는 피의자의 답답함이 이럴까? 홧김에 비대면 진료 도입을 반대하는 의사들이야말로 집단이기의 전형이 아니냐며 목청을 돋우고 싶었지만 지금 대의명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칫 비정상이라는 스탬프가 날인되기라도 한다면 그게 더 심각한 일이었다. 나의 항변은 하소연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가여워보였던지 그녀가 내 말에 호응해왔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간다는 뭐 그런 의미였으리라.
“그럴 수 있어요. 과하게 긴장하면 일시적으로 혈압이 상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니까요. 잠시 후에 한 번 더 측정하기로 하죠.”
그녀는 기록지에 160/110이라는 숫자를 연필로 기입했다. 동정심의 발로에서 수정을 고려한 조치였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수렁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건 아니었다. 아니 갈수록 지뢰밭이었다. 병원이 병을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병을 만드는 곳이어서 멀쩡하던 내가 고혈압환자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했다. 그동안 배웠던 모든 교육과정을 총출동시켰다. 다크초콜릿의 화학, 청심환의 심리학, 소부혈의 한의학, 하얀색의 미술학, 호색한의 생물학까지. 복습을 마친 나는 수험장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자신감보다는 패배감에 젖은 발걸음이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이번에도 수동측정을 하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도저도 다 기계가 하는 일인데 무슨 차이가 있을라고. 하나가 못마땅하니 모든 게 삐딱선이었다. 공기주머니를 통해 팔에 압박이 천천히 가해져왔다. 가능하면 현실로부터 멀어지려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민수의 대학합격 소식을 접하던 날, 승진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우리 집에 웃음과 기쁨이 넘쳐나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혈압이란 그 사소한 가벼움으로부터 벗어나려 애를 썼다. 백약이 무효였다. 어렴풋이 간호사의 말이 들려왔다.
“150에 100이네요. 다시 한 번 잴게요.”
머릿속이 헤어날 수 없는 아득함으로 새하얘졌다. 똑같은 아득함이어도 눈앞이 캄캄할 수도 있으련만. 하필이면 왜 캄캄한 검정이 아닌 새하얀 하양이 이토록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것일까?
“150에 100입니다.”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한 간호사는 볼펜을 집어 마지막 남은 나의 희망에 종지부를 찍으려했다. 체면이나 염치는 나에게나 떳떳한 도리이지 우리로 범위가 넓어지면 뼛속 깊숙이 뿌리내린 고질병일 뿐이다. 고혈압보다 더 처절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그 고질병인지도 몰랐다.
“저, 죄송하지만 수치를 좀 낮추어 적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오랜 기간 실업 상태에 있다가 취업을 하게 되어 받는 신체검사인데 결과가 나쁘면 기회를 잃게 되거든요.”
창피나 부끄러움은 일순간이지만 그걸 모면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후회는 두고두고 갚아야하는 것이기에 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희들은 측정된 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수치를 조작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찬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그들이 하얀 옷을 입는 목적이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함일까? 무슨 말을 해도 감히 찍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도록. 괜히 분노가 치밀었다. 높은 혈압수치가 어디 내 탓이냐고, 다 너희가 차려입은 그 하얀 옷 때문이 아니냐고 강하게 항의하며 몸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과녁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까닭모를 당당함이 찾아왔다.
“그럴 수 없다는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제 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입니다. 오죽하면 낫살이나 먹은 제가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부탁 좀 드립니다.”
부탁이라면서도 말투는 반 협박조에 가까웠다. 불의의 역습에 당황한 건 그녀였다.
“딱한 사정이야 알겠지만 저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정 그러시면 최종 판단을 하는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 보시죠.”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내가 부담스러웠던지 그녀는 설득의 책임을 의사에게 돌렸다. 무슨 협상이든 아퀴를 짓기 위해서는 권한을 가진 자와 상대해야한다. 난 파일을 받아들면서 눈짓으로 그녀에게 길안내를 요구했다.
백발에 검정색 뿔테안경을 쓴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내 기록지를 유심히 살폈다. 그사이 난 지난 세월의 경험으로 익힌 관상학적 지식을 호출했다. 그는 원리, 원칙, 고집보다는 유연, 온화, 인자 쪽에 가까웠다.
“혈압 문제만 제외하면 아주 건강하신 편이네요. 혹시 몸이 불편하신 데가 있으세요?”
그의 관상에 기대를 걸면서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야 할 시점이었다.
“불편한 곳은 없는데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말씀해보십시오.”
그런 자들에게는 정면승부보다 읍소전략이 상책이었다.
“제가 오랜 기간 실직 상태에 있다가 모처럼 취업의 기회를 얻어 7월 1일부터 출근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최종 입사를 결정하기 위해 채용신체검사서를 제출해달라는 연락이 오늘 왔구요. 전 그걸 발급받기 위해 여기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불미스럽게도 혈압이 높은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만약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으로 판정이 내려진다면 제 취업은 취소되고 말겠지요. 죄송하지만 측정된 혈압 수치를 조금 낮춰 기록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의 손가락이 기록지의 혈압란 위에서 빙빙 돌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가 그려낸 게 영문자 O라면 정녕 예스(Yes)의 의미일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결국 저보고 불법을 저지르라는 말씀이시군요. 하하하. 그런데 너무 걱정을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채용신체검사의 경우 이완기 혈압이 115이상 되는 중증 고혈압만 아니라면 혈압으로 인한 불합격 판정은 내리지 않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려 선생님의 상태는 고혈압 증세가 있긴 하지만 신체검사 소견은 합격입니다.”
합격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그동안의 근심과 고민이 조금씩 해소되어갔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미진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합격이라 하더라도 고혈압 증세가 표시되어 있는 이상 회사에 따라 또 다른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편의를 좀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어차피 합격이라면 숫자를 약간 고친다고 해서 공문서위조는 아니지 않을까? 이왕이면 카이로스의 몸에 어떤 상처도 없이 완벽한 상태로 호송을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에 난 떼를 썼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고용노동부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시면 될 것입니다. 정 불안하시면 혈압 측정을 한 번 더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로고스와 파토스, 그리고 에토스가 정확히 1:3:6의 비율로 포함되어있는 그의 말투를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난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건 막 복도로 나섰을 때였다. 간호사들이 입고 있는 흰색 가운들이 죄다 다양한 색상으로 바뀌어있었다. 마치 제각기 옷을 입은 채 총천연색 염색조에 들어가 목욕을 마치고 금방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의 박동소리도 한결 줄어있었다. 뒷목이 뻐근하던 증상도 사라졌다. 동시에 측정결과도 달라져있었다. 130/85. 정상의 범위를 약간 벗어나있었지만 고혈압이라 말할 수 없는 수치였다. 다크초콜릿과 청심환, 소부혈이 뒤늦게 효능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정작 큰 힘을 발휘한 건 나를 색안경 쓴 호색한으로 만든 하얀 가운의 의사가 틀림없었다. 이만하면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아니라 이백제백(以白制白)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도 됨직해보였다.
“혈압이라는 게 환자분의 심리 상태에 많이 좌우되는 게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거의 정상에 가깝게 나왔네요. 취업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는 고혈압에서 해방된 나를 환자라고 불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믿지 못해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억제하지 못하는 자기불신증 환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어쩌면 화이트가운 증후군이 아니라 그 병이 평생 나를 힘들게 할 불치병인지도 모른다. 의사의 손을 통해 기록지에 합격이라는 커다란 스탬프가 찍혔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깍듯이 인사를 한 나는 방을 빠져나왔다. 어깨가 쫙 펴지는 게 이제야말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느낌이었다.
준비된 서류들을 차곡차곡 갈색 사각봉투에 담았다. 카이로스가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봉투의 입구를 스카치테이프로 굳게 봉했다.
“등기로 부탁합니다.”
창구의 직원이 K사로 카이로스를 인계할 시점을 알려주었다.
“늦어도 모레면 도착할 거예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조 부장에게 문자로 그 사실을 알렸다.
‘입사서류, 막 우편으로 송부했습니다. 그럼 7월 1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편지봉투가 나풀거리며 폰의 화면 위로 춤을 추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