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8월 11일 - 이해와 오해

by 원광우

황 대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온 건 열흘 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자는 말에는 서로 공감하면서도 여건이 허락하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그냥 보내버린 것이다. 단김에 빼자던 쇠뿔은 식어가다 못해 송아지가 어미 소로 자라있었다.

‘8월 11일 오전9시 광주 W사 본사에서 봅시다.’

인사말이나 일체의 수식어가 배제된 채 만남에 필요한 시간과 장소만 적힌 문자는 그의 평소 성향을 여과 없이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급하고 불같은 성정. 겉치레를 싫어하면서 우회 없이 직진을 즐기는 사람. 단도직입적 성격의 소유자. 또 거기에는 만남을 더 이상 미뤘다가는 영영 쇠뿔을 뽑지 못하고 말 거란 위기감이 팽배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기회의 땅이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의심으로 부피를 키워가던 내 조바심은 그 위기감에 빠른 속도로 용해되어갔다.

오늘 그를 만나면 확인할 것들이 몇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소환하기 껄끄러운 대상의 모든 혐의를 단 한 번의 조사로 규명하기 위한 검찰의 치밀하게 설계된 질문지가 들어 있었다. 질문지의 상당한 공간을 경영철학, 가치관, 인재관 같은 고급어휘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건 언론보도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을 뿐 나를 영입하려는 의도의 순수성여부를 판가름하는 게 근본목적이었다. 상진의 불만을 확인하려는 것도 그 길로 가는 디딤돌일 따름이었다. 그의 문자습관은 내가 계획하는 이 모든 일이 별 어렵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광명역 역사로 들어서면서 전광판을 확인했다. 광주행 열차는 5번 플랫폼이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아랫배로부터 묵직한 변의가 느껴졌다. 화장실을 들를 시간은 충분했지만 집밖에만 나오면 심해지는 화장실 낯가림에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참자니 열차 안에서 더 큰 화를 부를지도 몰랐다. 플랫폼과 먼 화장실일수록 이용자의 숫자는 줄어든다는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찾아간 화장실엔 다행히 가릴 낯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친해지지도 익숙해지지도 않는 단어가 고독이지만 그 순간에 찾아온 고독은 해방감이란 카타르시스로 인도하는 모르핀이자 코카인이었다. 약물은 비워내는 쾌감까지 유도하며 나를 환각상태에 빠뜨렸다. 신종희귀병은 말끔히 치유되었고 화장실을 나올 때는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스피커를 통해 10분 후에 열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새어나왔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허전함이 낯설었다. 어? 이상하단 생각에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몽롱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쾌락의 방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핸드폰을 분실했을 때의 후폭풍이 토네이도가 되어 내 몸을 둘러쌌다. 회오리는 도로시를 마법의 대륙 오즈로 날려버린 것처럼 나를 고독의 투약 장소로 날려 보냈다.

그곳에는 고독의 분말이 여전히 비산 중이었다. 내 방이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다는 기대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로 내가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줌렌즈의 부가기능인 서치라이트를 켜 사방을 훑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난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노란 조끼의 여성이었다. 내가 여자화장실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헛것이 보이는 것일까? 약물의 후유증을 의심할 즈음 그녀의 등 뒤에서 야광글씨가 번쩍였다. 청소미화원.

“혹시 여기 있는 핸드폰 못 보셨어요?”

물은 질문이 아니라 나온 질문이었다. 조끼주머니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낸 그녀가 화면을 두드려 켜고는 나를 향해 보여주었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찍은 영숙과 내 사진이었다. 쫓아가 그걸 빼앗다시피 받아들었다. 열차도착방송이 들려왔다. 플랫폼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감격은 차후의 일이었다.

오늘의 승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플랫폼이 위치한 세컨드베이스까지 도루는 반드시 필요했다. 퍼스트베이스를 박차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포수가 던진 공이 KTX 열차로 변해 세컨드베이스로 날아갔다. 기적의 적기는 위기의 순간이다. 위기는 내 바이오닉 허벅지를 가동시켜 우샤인볼트가 가진 세계기록을 경신하게 만들었다. 세컨드베이스에 안착했다. 심판의 사인이 떨어졌다. 세이프.

좌석을 찾아 나섰다. 11호차 11A. 티켓에는 신기할 정도로 1이라는 숫자가 많이 찍혀있었다. 핸드폰의 회수에 이어 도루성공까지 이뤄냈으니 이후의 모든 오늘 일(1)도 일(1)사천리로 풀릴 거라는 계시가 아닐까? 자리에 앉아 난 기분 좋은 상상을 계속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쉴 틈을 주지 않고 견제구가 들어왔다. 내 어깨에 닿는 글러브의 감촉이 느껴졌다. 몸 전체가 베이스에 딱 붙어있었음에도. 눈을 떴더니 중년신사 하나가 나를 향해 종이쪽지를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심코 받고 보니 열차티켓이었다.

“제 자린데요.”

내가 아웃이라 주장하는 그의 말에 손에 쥔 티켓을 유심히 살폈다. 거기에도 1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A라는 영문자와 함께 목적지도 광주송정역으로 똑같았다. 이번엔 핸드폰을 꺼내 내 모바일탑승권을 열었다. 내 거라고 다르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그에게 들이밀었다. 마침 저쪽에서 역무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이 서로 다른 티켓 두 장을 역무원에게 내밀며 비디오판독을 요청했다. 객차 내 모니터를 통해 슬로우비디오가 재연되었다. 내 슬라이딩 동작과 태그하려는 그의 동작은 거의 동시타이밍이었다. 우린 둘 다 판정결과에 주목했다. 아웃이라면 난 오늘의 경기뿐 아니라 이번 시즌에서 탈락이 확정되는 셈이었다. 심판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그가 내 몸을 태그한 게 아니라 베이스를 태그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티켓은 8월 12일 내일 거예요.”

“오늘이 12일 아니에요?”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자리를 떴다. 기차는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하릴없이 그는 다음 역까지 원치 않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휴대폰을 찾지 못했으면 광주까지 장거리여행도 불사해야했을 것이다. 난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일까, 아니면 방해를 한 것일까?

회오리 여행과 필사적인 도루로 피곤했던지 꽤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정형외과에서 저주파 치료를 받을 때처럼 손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떴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에도 핸드폰을 찾을 정도로 핸드폰 노이로제에 걸린 내가 손에 쥐고 잠들었던 핸드폰이 일으킨 몸의 동기화현상이었다. 조 부장이었다. 객실통로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상무님, 오늘 중역회의 있는데 잊으셨어요? 시간이 다 되었는데 참석을 안 하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하루 휴가 낸 걸 조 부장은 모르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일이 생겨 오늘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어제 느지막이 부사장님께 보고 드렸는데 아직 통보를 못 받은 모양이죠?”

황 대표와 만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K사에 내밀 적당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이직이 목적이면서 따로 시간을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입사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 연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무난한 게 가정사였다. 그것도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일 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쉬웠다. 족보에 없는 삼촌을 끌어들였다.

어제 부사장 앞에서 난 그동안 쓴 소설 한 편을 중언부언 늘어놓았다. 지방에 있는 삼촌이 중병에 걸렸다. 초진을 한 병원의 소개로 서울의 대형병원에 검사예약을 했다. 삼촌은 홀아비로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다.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놈도 해외 거주중이다. 수원에 살고 있는 나로서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병원까지의 이동이며 기타 여러 도움을 제공해야 할 형편이다. 연차가 없어 휴가를 낼 상황이 아닌 만큼 몇 시간이나마 외출을 했으면 한다. 볼일을 본 후 늦어도 오후 세 시까지는 돌아오겠다.

세 시라는 기한은 당연히 KTX를 이용해 광주를 오가는 시간까지 감안해 정한 것이었다. 내용에 핍진성이 돋보였던지 부사장은 아무런 의심 없이 허락했다. 외출은 무슨 외출이냐며 그냥 맘 편히 휴가를 다녀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린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호의를 다 베푸는 조조와, 한사코 유비에게로 돌아갈 마음만 품고 있는 관우의 역할연기를 수행하고 있었다. 관우의 충성심이 나의 이기심으로 바뀌어있었지만.

“아, 그러세요. 저는 모르고 그만. 알겠습니다.”

부사장에게 보고했다는 말에 조 부장은 간단히 전화를 끊었다. 짧은 전화는 이쪽의 거짓조차 저쪽은 신뢰한다는 방증이었다.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자리로 돌아와 책을 꺼내들었다.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죄책감을 독서로 삭여보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책의 선택으로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월터의 사망 후 찰스와 키티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W사에게도 K사에게도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온 몸을 베일로 감싸고 있는 내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만 책을 덮어버렸다.

다음 역이 광주송정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때쯤 한 통의 문자가 수신되었다. 주소록에 없는 번호였지만 W사의 직원으로부터 온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역 광장으로 나와 왼편으로 오시면 지하철 역 5번 출입구가 있습니다. 그 앞에 차 대기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차량 번호는 5886.’

광주는 생에 처음이었다. 처음은 새로움이고 새로움엔 도전이 필요하다. 난 무엇에 도전하고자 광주를 찾은 것일까? 터키라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열어가기 위해서? 도전은 성공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그 가치가 인정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내 도전이 보장할 수 있는 성공의 확률은 도대체 얼마일까? 그 어떤 질문에도 난 답할 수가 없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자꾸 위축되고 경직될 뿐이었다.

짙은 색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운전석 문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역사출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가가자 렌즈 위로 내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되었다.

“혹시 W사에서 나오셨습니까?”

내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착시를 깨우듯 그가 선글라스를 휙 벗어젖혔다.

“박윤기 씨?”

그의 말투에서 이곳 사투리의 억양이 강하게 묻어났다. 흰색 와이셔츠는 복부에 이르러 팽팽하게 부풀면서 단추가 터질 듯 긴장상태를 유지했고 구릿빛 얼굴의 이마 한가운데는 내 천(川)자가 굵고도 깊게 패어있었다. 문관이라기보다 무관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예.”

“기차가 제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했군요. 어서 타세요.”

그가 가리킨 조수석으로 향했다. 차종은 고급 에쿠스였지만 곳곳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행색이 묻어났다.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차가 안 막히면 10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그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하는 사이 난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뒷좌석으로 던졌다. 그가 운전대를 잡을 때 난 상부의 손잡이를 잡았다. 출발을 위한 우리의 예비동작은 그렇게 서로 달랐다.

“제가 대표님 차를 운전한 게 10년 가까이 됩니다만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입니다. 대표님 가족 분들을 제외하고 회사일과 관련된 사람을 제가 공항이나 역으로 픽업을 나간 사례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보통 그런 때는 회사의 임직원들을 시켰어요. 그런데 오늘만큼은 저보고 꼭 나가라고 그러시데요.”

그는 다른 손님과 나의 차이를 설명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그 말의 저변에는 자신이 황 대표의 특별한 측근이라는 뜻이 깔려 있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의도를 알아들었다는 내 신호가 반가웠던지 아부성 보답이 이어졌다.

“대표님과 면접을 보는 것도 그래요.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보는 면접은 사장님이나 부사장님이 해왔죠. 면접에 본인이 직접 나서는 걸 저는 본 적이 없어요.”

황 대표가 대표라는 직함을 고집하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휘하에 사장이 있다니 타 회사로 치자면 오너인 회장에 해당하리라. 아직은 젊은 나이인 만큼 회장보다는 대표이사로 불리길 선호한 것이겠지. 내 입에서 간 말에 비해 그의 입에서 온 말이 지나치게 고와 계속 빚이 쌓여갔다. 천 냥 빚을 갚으려면 한 마디 말로 장단이라도 맞추어야 했다.

“아, 그래요?”

그에게 탑재된 내비게이션은 지름길이나 소통이 원활한 길을 찾아내는 일 뿐 아니라 예상시간까지도 정확히 맞춰내는 최첨단이었다. 회사는 ㄱ(기역)자 형태의 공장건물이 사무실의 두 면을 감싸는 구조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사무실은 창을 제외한 전면이 담쟁이덩굴로 뒤덮여있었다. 그 속 어딘가에 베이먼 노인이 밤새 그린 이파리 하나가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모진 겨울의 추위에도 거센 비바람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아 존시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었던 그 마지막 잎새가. 사무실 입구에 차를 세운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여사원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저 사람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대표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줄 거예요.”

“감사합니다.”

난 뒷좌석에 두었던 윗옷을 챙겨 입으며 또 한 번 빚을 갚는 시늉을 했다. 그가 손을 흔들어 영수증을 내보였다. 곧 검정색 에쿠스는 사무실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황 대표에 대한 나의 예측은 적중률이 50퍼센트에 그쳤다. 그의 문자로 예측한 성격은 얼추 맞았지만 그의 통화목소리로 찍은 사진은 실제생김새와 180도 달랐다. 날카로울 줄 알았더니 얼굴도 덩치도 전체적으로 두툼한 게 둥글둥글했다. 그는 만나자마자 상진의 이야기부터 입에 올렸다.

“박 전무가 왜 우리의 영입제안에 처음에 반대했는지 나, 잘 알아요. 최상진 전무 때문이지요? 최 전무와는 잘 아는 사이일 테니 그를 통해 나에 대해 많은 이야길 들었을 것이오. 그 친구 뭐가 섭섭했는지 우리 회사에 대해 많이 씹고 다닌다는 것도 난 들어 알고 있소. 그러니 오늘은 우리 툭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난 이리저리 말 돌려가며 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해요. 상대에게 정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야하지 않겠소? 그런 연후에 무슨 결정이든 내려야하겠지요.”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후보자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인지도 면에서 상진에 비해 열세임을 깨달은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자신의 공약을 펼쳐 보이기보다 상대의 결점을 들추려했다. 양측의 진술을 통해 사건의 개요는 이미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였다. 또 전모가 밝혀진다 한들 상진과 친분이 있는 나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따름임을 그는 잊고 있었다.

“최 전무의 이야기가 일부분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오늘은 W사에서 요구하는 저의 역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성취감이나 보람 같은 것들이 직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일 테니까요.”

배경이 흐릿할 때 표현하고자 하는 피사체는 더욱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난 일깨워주고 싶었다.

“알겠소. 앞으로 최 전무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만 우리 회사의 조치사항만큼은 박 전무가 이해를 해주면 고맙겠소.”

그는 하지 않겠다면서도 구태여 한 마디를 보탰다. 상진으로 인한 실점이 뼈아팠던 모양이었다.

“우리 회사는 최근 몇 년간 급속도로 성장을 해왔소. 회사의 외형이 갑자기 커지다보니 이제는 시스템이 뒷받침할 수 없을 정도지요. 많은 부분이 부족해요. 특히 인력자원은 두말할 것도 없구요. 여기저기서 충원을 했지만 속속 문제가 드러나고 있소. 해외법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요. 큰 공장을 운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보니 생산성이며 품질, 원가 모든 면이 엉망이오. 누군가가 체계를 잡고 이를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라오. 지금까지 어찌어찌 운영이야 해왔지만 올해부터는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고 있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곧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오. 차체와 관련해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오. 그 시점에 최 전무가 입사를 하게 된 것이고. 그런데 그는 기술도 리더십도 모두 부족했어요. 너무 그를 폄하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소. 물론 박 전무라면 다른 얘기가 되겠지요.”

그는 상진의 이야기를 또 덧붙임으로써 실점을 만회하려는 강한 투지를 내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제 전문이 차체이긴 합니다만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무슨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자는 아닙니다. 다만 오랜 기간의 경력이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요.”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현재 황 대표와 나의 지위는 거래의 당사자였다. 거래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얻어야한다. 그러자고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자랑에 나선다면 혐오감만 부추길 뿐이다. 승리의 지름길은 자신감과 겸손의 적절한 균형이었다. 자신이 자만으로 흐르지 않고 겸손이 비하로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일은 힘들었다.

“무슨 겸손한 말씀을. 나도 이 자동차 차체부품이라는 바닥에서 꽤나 잔뼈가 굵었다오. 박 전무의 명성이야 오래 전부터 들어 잘 알고 있지요. 명불허전 아니겠소? 내 보기엔 박 전무를 버린 S사가 큰 실수를 한 것이오.”

“알고 보면 저도 부족한 게 많은 사람입니다.”

“천만에요. 난 만약 박 전무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아예 모든 걸 통째 맡기려하고 있소. 터키법인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 이 말이오. 부디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소신껏 잘 운영해 보시오. 투자가 필요하다면 적극 지원하겠소. 세상에 돈 안 드는 개선이 어디 있겠소. 박 전무의 뜻이라면 과감히 투자할 의향도 갖고 있어요.”

후보자의 공약치고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난 특히 소신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건 자신이 쥐고 있는 권한의 상당 부분을 유권자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으로 웬만한 배포의 소유자가 아니면 쉬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성미 급한 내 빡빡이가 쌍수를 들고 동조하면서 주변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표심이 황 대표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심연 깊은 곳으로부터는 경고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 또한 거래로써 굳이 속마음을 바삐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시간을 좀 주시면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W사나 터키와 관련해서 나조차 불투명한 시선으로 일관해왔기에 영숙과는 일언반구 얘기를 꺼내본 적조차 없었다. 오늘을 계기로 그녀의 의견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 하세요. 단박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하시죠.”

“아뇨. 고맙지만 돌아가는 편 기차를 예약해두어서요.”

공직선거법 위반을 걱정해 식사제안을 거절한 건 아니었다. 밥 한 끼가 표의 방향을 가를 정도로 시민의식이 결여된 나도 아니었다. 기차시간까지는 여유도 있었다. 그저 식사자리에 흔히 등장하기 마련인 사담들이 불필요한 상상이나 억측을 야기해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까봐 기차편을 핑계 삼은 것이다. 괜히 예약해둔 모바일승차권을 찾는 척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머릿속으로 싸한 기운이 지나갔다. 아침에 휴대폰을 분실했을 때의 섬뜩함과 썰렁함이 주변을 맴돌았다. 불길함을 참지 못해 윗옷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아뿔싸. 이번엔 지갑이 만져지지 않았다. 온몸을 수색했지만 그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래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이 사라졌군요.”

기억의 CCTV 녹화파일을 역순으로 재생시켰다. 멀리 가지 않아 의심스런 장면이 포착되었다. 이곳으로 오던 도중 황 대표의 차 안에서 내가 윗옷을 벗어 뒷좌석으로 던지고 있었다.

“혹시 대표님 차 안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올 때 뒷좌석에다 옷을 두었거든요.”

오늘따라 무슨 마가 낀 것일까? 휴대폰에 기차좌석에 지갑까지. 그들은 대체 무엇이 불만이어서 주인인 나를 버리고 떠나려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 호사다마(好事多魔)임을 알리려는 가브리엘을 내가 못 알아보는 것일까?

“그래요? 박 전무가 온 이후 차량운행은 하지 않았으니 만약 거기서 흘렸다면 아마 그대로 있을 게요. 자, 가 봅시다.”

기대를 품었지만 황 대표의 차 안에 가브리엘은 없었다. 좌석이며 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가브리엘 날개에 붙은 깃털 하나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앞일이 까마득했다.

“잃어버린 것을 어찌 하겠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하지 않소? 신용카드 분실신고부터 빨리 하시오.”

발등에 용암이 떨어져있었다. 평생 예가근대가원(預可近貸可遠)(예금은 가까이 하되 대출은 멀리한다는 뜻으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차용변조한 말)을 생활신조로 삼아온 덕분에 관계가 소원했던 거래은행과 카드사인지라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일처리에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 긴 시간을 황 대표는 제 일처럼 꼬박 내 곁을 지켰다. 유권자를 향한 후보자의 구애치고는 진정성이 한층 돋보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 불찰로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그 정도로 진정성을 갖춘 그라면 내 사과의 말에서도 진정성을 쉽게 찾아낼 수 있으리라.

“당치도 않는 말씀을. 저야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한 걸요. 그건 그렇고 식사라도 하고 가셨으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식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요. 여러 모로 감사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이건 가져가시오. 몽땅 분실했으니 밥값도 없을 것 아니오. 내가 빌려주는 거니 나중에 꼭 갚으시고.”

황 대표는 오만 원 권 몇 장을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 또한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겠지만 난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말처럼 여길 벗어나는 순간부터 구걸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으니. 빌려준다는 그 말 또한 나의 부담감을 한결 덜어주었다. 작별인사가 이어졌다.

“말씀대로 다음에 꼭 갚도록 하죠. 그럼 전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시오. 우리 제안에 대해 충분히 잘 검토해 주시고.”

선글라스 사내가 운전석에 앉아 나에게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수석에 앉으면서 나도 모르게 뒷좌석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갔다. 미련은 사람을 미련하게 만들 뿐이라 말하듯 그가 차를 재빨리 출발시켰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역사 내 간이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카페를 찾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한여름이었지만 아이스(Ice)가 아닌 핫(Hot)으로. 내 몸은 자고로부터 뜨거운 커피라야 카페인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아데노신의 유입이 차단되고 중추신경계가 자극을 받으면서 오늘 하루의 여정이 슬라이드로 구성되어 한 장씩 넘어갔다. 매 프레임마다 크고 굵은 고딕체의 글자가 제목처럼 선명하게 따라다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장면들이 잠시 멈추어 설 때마다 난 묻고 있었다. 지금 보여주는 장면은 원인에 해당하는지 결과에 해당하는지. 그건 인과응보(因果應報)가 흥진비래(興盡悲來)인지 고진감래(苦盡甘來)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내 눈은 점점 사시가 되어갔다. 오늘의 해프닝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어 K사를 떠나 W사로 이직하는 명분이 되었으면 바랐다. W사가 제공하는 조건에 속물이 되어가는 것인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의 기준이 무너져버린 것인지.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돌아보았더니 황 대표가 웃고 서있었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부끄러운 상상을 들킨 것만 같아 당황하는 내 앞에서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헤어진 지 몇 시간 사이에 그는 마술사가 되어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하얀 비둘기가 아닌 내 지갑이 딸려 나왔다.

“박 전무 지갑 맞지요? 찾았어요. 혹시나 벌써 출발했으면 어쩌나하고 달려왔는데 출발 전이라 다행이오.”

지갑은 손에 잡히는 느낌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게 분명 실물이었다. 마술이라는 게 눈속임일 따름이라 철석같이 믿었건만 이쯤 되면 그건 철저하게 잘못된 믿음이었다. 불신과 맹신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우리 운전기사가 박 전무를 배웅해주고 나서 세차를 하러 간 모양이오. 세차가 끝나고 차를 찾으러 갔더니 세차장의 주인장이 차 안에서 발견했다고 주더라지 않겠소. 조수석 의자 밑에 있었다 하더군요. 그놈이 거기까지 굴러갔으니 우리가 못 찾을 수밖에. 그나저나 이렇게 귀중한 걸 찾아주었으니 박 전무는 그것까지 감안해서 우리를 선택할지 말지 고민해야 할 거요.”

그의 웃음에 묘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더군다나 대표님께서 직접 가져오시기까지…….”

“물론 전화로 알릴까도 생각했지요. 다음번에 전해주거나 택배로 보내는 방법도 있을 테구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대에게는 훨씬 절실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소. 솔직히 지갑이란 게 그 안에 본인만의 소중한 것들이 많이 간직되어 있는 법이잖소. 내가 조금 수고해 상대의 걱정을 덜어주고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리 하는 게 맞는 것이지요. 공치사를 받자고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오. 어쨌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오. 자, 그럼 잘 가시오.”

몸을 돌리는 그를 내가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대표님. 이것 받으세요.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빚은 빨리 갚을수록 그 이자가 줄어드는 법, 황 대표가 빌려주었던 돈을 갚겠다는 취지였다.

“어차피 그건 다음에 갚기로 하지 않았소? 다음에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겠지요. 차 시간 바쁠 테니 자, 그럼 이만.”

그는 구태여 약속한 이자를 받으려했다. 그리곤 더 이상 협상의 의지가 없음을 내보이듯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보폭을 크게 벌려가며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유난히 넓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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