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상무, 혹시 이 사직서가 며칠 전 내가 부탁한 일과 관계가 있나요?”
켕기는 것이 있는 듯 부사장의 질문이 뾰족했다.
“아닙니다.”
그때의 일이 분명 백퍼센트 원인은 아니었다. 도화선이 되었을 뿐. 그러나 난 그마저도 부정하고 있었다. 입술이 움찔거렸다. 겉바속촉(겉은 바싹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뜻의 줄임말)의 이중식감이 입속에서 느껴졌다.
“그럼 사직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입사에 목을 매던 면접 때의 상황을 시종 지켜본 그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두 달 만에 사직을 감행하는 나의 입속에 아폴론은 침을 뱉었다. 그때부터 나의 모든 말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설득력을 상실했다. 궁여지책으로 난 회사와 구성원들로부터 느낀 실망감을 사직의 구실로 삼았다. 안타깝게도 작의적인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정도야 W사 이직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면 평소의 내 참을성으로 볼 때 인내력 테스트쯤으로 여기며 넘길만한 일이었다. 부사장 앞에서 그렇다 태연스레 대답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시시콜콜 얘기하다보면 괜한 일까지 알려져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다. 거짓이 거짓으로 되지 않으려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했다. 나를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안전했다.
사흘 전 난 부사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 상무, C업체 대금 지불 건 말이오. 그거 기술본부에서 승인 사인이 나지 않아 경리부에서 지불을 못하고 있다는데 맞는 말이오?”
C업체는 프레스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금형을 공급한 업체였다. 도입된 금형을 그들과 함께 시운전한 후 생산에 적용하는 건 내가 속한 기술본부의 책임이었다. 생산적용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면 업체는 대금을 수금하게 되는데 그 근거가 우리의 승인 사인이었다.
“맞습니다. 아직 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승인을 해주지 않은 상태지요.”
일을 진행하다보면 설비에 이런저런 품질문제가 발생하는 건 다반사였다. 특히 이번의 경우에는 업체의 비협조로 우리 직원들이 여러 면에서 애로를 겪고 있었다.
“요즘 C업체가 유동성 문제로 많이 어려운가 봐요. 업체가 살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열어주는 게 어때요?”
말에서 역겨운 구린내가 풍겨났다. 어려운 하청업체를 살린다는 그의 정의감은 우리의 피고름을 담보 삼을 때라야 가능했다. 눈앞의 걸인을 위해 자신의 속옷을 벗어주는 의인을 내가 못 알아보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도 업체에 대해서도 심지어 신에 대해서도 믿음이 부족한 난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남은 문제점에 대해서도 그들과 한 번 협의를 해보구요.”
“박 상무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금형이란 게 원래 ‘끝’ 하고 손을 탁 터는 그런 설비가 아니라오. 감성품질이라는 게 어디 수치로 명쾌하게 규정되어있는 게 아니잖소. 무슨 일이 있어도 남은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그들로 하여금 다 해결하도록 할 테니 그냥 오늘 사인 좀 해줘요. 부탁 좀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나를 무시하는 전략이 동원되었다. 비위가 상했다. 그럼에도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판돈으로 내건 책임에 비해 내 판돈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W사로의 이직을 염두에 두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하고 말았다. 잘못되어봤자 나에게는 안전한 도피처가 있으니 안도하면서. 그러나 실상은 그 이전에 벌써 난 이 회사에 반쯤 식상해있었다.
광주에서 황 대표를 만난 직후였으니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입사 이후 이 회사에서의 존재감을 비로소 느끼던 날이었다. 그날 우리에게 주어진 업무는 생산설비의 공급업체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공급업체 결정은 구매부문의 고유영역이지만 기술적 지식이 없는 그들로서는 설비가동의 책임을 지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업체로부터 견적서가 접수되면 그걸 검토해 최종업체를 선정하는 건 관례상 우리 권한이었다. 구매부문은 그걸 기초로 금액협상을 진행해 최저가 낙찰이라는 구색을 맞추는 게 고작이었다.
직원들의 검토가 끝난 서류가 결재를 위해 막 나에게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생산본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상무님, 혹시 업체선정 작업 끝났나요?”
그의 음흉한 미소가 왠지 석연찮았다. 눈은 호시탐탐 남의 입에 든 먹이를 탈취하려 안달이 난 하이에나의 것이었다.
“다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그는 의도를 숨기려 머뭇거렸지만 그런 걸 찾는데 특화된 내 눈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내 후각세포 또한 진동하는 부정청탁의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잘 모르시겠지만 견적업체 중에 A업체가 우리 회사와 특수 관계에 있어요.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그곳으로 선정이 되었으면 해서요. 자세한 내막은 차차 알게 될 테니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일단 상대를 폄하하고 들기만 하면 부탁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모르는 것을 자신은 안다면서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슬그머니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들쳐보았다. 구매 1순위는 P업체였고 A업체는 세 개 업체 중 제일 후순위였다. 이제 그는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 ‘잘 모르시겠지만’ 따위의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오늘만은 경기운영 스타일을 트레이드마크인 인파이터에서 아웃복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 운운 하는 것으로 볼 때 원칙과 상식을 들먹여봤자 쇼용이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검토결과가 올라오면 제가 한 번 살펴보죠.”
정면승부를 피해 뒤로 물러서는 나를 향해 그가 잽을 던지며 다가왔다. 난 방어를 위해 커버를 올렸다. 여의치 않았는지 그가 내 팔을 겨드랑이에 끼며 클린치를 시도했다. 몸이 가까워지자 귓속말이 들려왔다.
“A사 사장이 이걸 전해드리라더군요.”
두툼하니 손에 잡히는 게 현금이 틀림없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걸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크게 달아났다. 사양하겠다는 의지라기보다 사양해야한다는 의무에서 나온 반사행동이었다. 연봉조정도 고려하겠다던 김 사장의 언젠가 말이 생각났다. 이곳 사람들은 부족한 연봉에 대한 보너스를 이런 식으로 받는 것일까? 행동과 달리 마음 한 편에서는 과연 얼마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아닙니다. 이건 가져가십시오. 이러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A사 사장께 전해주시구요.”
공짜로 주어지는 음식에는 쥐약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공짜의 법칙을 역사적 사실보다 더 신봉한 탓에 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실랑이 끝에 밀려난 그가 멋쩍은 듯 돌아섰다. 그동안 숨을 죽이던 빡빡이 본성이 기다렸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 그가 돌아가자마자 난 직원들의 검토내용에 단 한 글자도 수정하거나 첨가하지 않은 채 서류에 사인을 했고 그걸 구매부문으로 보냈다. 며칠 후 업체선정결과가 회신되어왔다. 가격경쟁력이 가장 높은 A업체로 선정함. 내 사인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칼이 아니라 무기력한 형식적 종이칼이란 것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생산본부장과 구매부문을 등에 업은 A업체가 휘두른 펀치에 난 캔버스에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내 눈 속으로 생산본부장의 비웃는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맡은 일과 제 전문분야가 다르다는 현실을 극복해낼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근무한다면 회사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고, 그건 제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거야 입사면접을 할 때 이미 거론되었던 문제였죠. 그 때 박 상무께서는 사장님 앞에서 그 정도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부사장은 비꼬고 있었다. 사직서 어느 귀퉁이에선가 자신을 비꼬는 듯한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을 미연에 막으려 나를 향해 경고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두 달 정도 업무를 맡아 진행해보니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았습니다. 기본적인 지식만으로도 관리능력을 통해 사업부를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결국 상당한 수준의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업무수행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문지식이 부족하다 탓한 건 당신이지 않느냐? 그걸 무기로 나를 로봇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냐? 발끈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튀어나오려던 그 말은 오랜 기간 업데이트를 반복하면서 고도화된 몸속 자동번역기에 의해 순화되었다.
“애초에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알면서 시작한 일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저로서는 이해가 잘 가질 않는군요. 이처럼 쫓기듯 급하게 사직의 뜻을 전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화제의 방향이 선회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돋아난 가시가 고슴도치의 가시였다는 게 밝혀졌다. 힘자랑이 아니라 경계신호였던 것이다. 그걸 안 이상 공격은 무의미했다.
“몇 달을 실업의 상태에 놓이다보니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이 당장의 일자리에만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면접 당시에 반 억지를 부리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구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고민 끝에 회사와 개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사직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다른 뜻은 결코 없습니다.”
난 공격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했다. 전후의 말에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 것도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알았습니다. 저와는 이것으로 면담을 끝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장님께서 면담을 할 것입니다. 오늘 H사의 협력사 대표단 간담회가 있어 급히 울산으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오후에는 돌아오시기로 되어 있으니 좀 기다려주시죠. 오시는 대로 면담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협력업체와의 떳떳하지 못한 상생에 내가 협조한 보답인지 몰라도 나의 떳떳하지 못한 퇴사에 그는 기꺼이 협조했다. 나로서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창 앞에 서자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63빌딩이 금빛으로 아침햇살을 되받아내고 한강철교 위에서는 전철이 오갔다. 이곳이 목적지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난 또 떠나기 위해 전철에 탑승해있었다. 나의 최종목적지는 어디일까? 고개를 들어 전철의 정면 위에 적힌 행선지를 확인했다. 회송(回送). 내가 탄 전철은 떠나는 편이 아니라 돌아가는 편이었다. 전철의 노선이 인생의 고산준령(高山峻嶺)이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 삶은 오르막을 오를 때처럼 보려는 것만 보겠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리막에서 누릴 수 있는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디 오늘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문득 마지막이어도 맡은 일에 소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을 켜 전자결재시스템에 접속했다. 결재를 기다리는 몇 건의 문서에 서명했다. 이어 업무용 노트를 펼쳤다. 메모된 내용 중에 오늘 안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는지 살폈다. 없었다.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노트를 접었다. 노트 갈피 사이에서 편지봉투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외면할 수가 없어 봉투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입사할 때 작성했던 근로계약서가 곱게 접혀있었다.
처음으로 출근한 날 그걸 받던 장면이 생생했다. 반면 기억은 허술했다. 손은 서명하던 볼펜의 미끄러짐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눈은 그것이 문서였는지 백지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줌렌즈에 이상이 생겨 서명란만을 인식하는 사팔뜨기가 되어버렸던 걸까? 서류는 두 장짜리였다. 정상시력을 확인이라도 하듯 적혀진 조항들을 하나씩 읽어내려 갔다. 퇴직을 하는 날에야 읽는 근로계약서라니. 내 근로자의 권리는 이미 폐기처분된 뒤였지만 무엇을 버렸는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심정이었다. 반쯤 뒤졌을까? 생판 처음 보는 차용증이 툭 튀어나왔다. 채무자는 끝없이 갑을 꿈꾸지만 만년 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였다.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지만 바뀌지 않았다.
‘을은 본인의 사정으로 회사를 퇴직할 경우 향후 1년간 H사의 1차 협력사에 입사할 수 없다. 이를 어기고 입사할 경우 그에 따른 모든 민형사상의 책임은 을이 진다.’
K사가 H사의 1차 협력사이듯 W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K사를 경유해 W사로 가는 모든 길은 봉쇄되어있었다. 말인즉슨 오늘 아침 K사와 벌인 바둑에서 내가 반상에 놓은 돌은 최대의 패착이란 뜻이었다. 통상적 룰이겠거니 지레짐작하며 그들만의 룰을 간과한 결과였다. 난 외통수에 걸리고 말았다. 알파고가 와도 국면전환은 불가능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응수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게임의 룰을 바꾸거나, 아니면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한 수 물러달라고 애걸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깨끗이 승복하고 다른 바둑판을 찾아 떠나거나. 그 셋 중에서도 자력으로 가능한 건 세 번째 하나뿐이었다.
황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괜히 모르고 있을 나의 K사 입사사실을 들추어낸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가려운 순간을 참지 못해 긁다보면 부스럼이 되고 급기야는 남에게 내보일 수도 없는 흉터가 되고 만다. 이럴 때일수록 말하는 건 적게 그리고 느리게 해야 하며 듣는 건 빠르게 많이 해야 한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대책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을까? 그랬다. 정명이 있었다. K사와 W사를 연결하는 H사의 이사 직분을 가진 그라면 해결사는 되지 못해도 해법은 제시해줄지 모른다. 급히 정명에게 조난신호를 보냈다.
“엊그제 황 대표와 통화했어. W사 이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면서. 잘 생각했어.”
내 조난신호는 구조요청 신호가 아니라 구조완료 신호가 되어있었다.
“문제가 생겼어. 오늘 여기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글쎄 복병이 나타났지 뭐야. 근로계약서 상에 H사의 1차 협력업체로는 이직을 못하는 조항이 있더구먼. 어째야 좋을지 막막해 전화했어.”
“아, 그거?”
신호판독이 잘못되었음을 알리자 이번에는 다 안다는 반응이 나왔다. 난 그 말이 들어는 봤지만 상세한 내용을 모를 때 내지르는 아주 위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했다.
“알고 있던 내용이면 왜 미리 얘기 안했어? 이직하길 권했으면서.”
“말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미 사문화된 조항이야. 왜, 그걸 그쪽에서 문제 삼는 거야?”
그가 보내는 신호를 내가 잘못 판독하고 있었다. 그는 정곡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우연히 알게 됐어. 근데 사문화되었다는 건 무슨 말이야?”
“협력사간 이직이 자유로웠을 때 사람들이 걸핏하면 그만두어 버리는 폐단이 있었어. 거기다 회사도 능력이 우수하다 생각되는 사람이 보이면 연봉을 올려주면서 공공연하게 스카우트에 나서기도 했고. 그렇게 인력유출이 잦자 회사마다 보유기술에 대한 보안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었지. 그래서 우리 회사가 주도해서 각 협력사 대표들을 모아놓고 서로 이런 행위를 자제하자고 합의를 했지. 그렇다고 꼭 지켜야하는 강제조항은 아니고 도덕적 차원에서 만든 불문율 같은 거라 할 수 있어. K사도 그때부터 그 조항을 근로계약서에 넣었을 거야. 이후 심심찮게 그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말이 나왔어. 맞는 말이지. 기술유출이나 기타 범법행위에 대한 문제 때문이라면 거기에 맞는 사회적 처벌이 따르니 그것만으로 예방효과는 충분하니까. 그래 작년 이맘때쯤 우리가 다시 회의를 소집해서 그냥 유아무야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렸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문서로 버젓이 기록되어있으니 저쪽에서 안 된다면 나로서는 방법이 없잖아.”
“설마 그럴라구. 김 사장하고는 얘기해봤어?”
제삼자가 당사자의 마음을 어떻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당사자가 될 수 없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설마’라 했겠지만, 난 그가 내 걱정을 하찮게 취급하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김 사장은 오후에 면담할 예정이야. 면담을 해도 W사 얘길 내 입으로 어떻게 꺼내?”
“그럼 퇴직사유를 뭐라 말하려고?”
“전공이 달라 힘들다고 해야겠지. 제일 무난할 테니까.”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나 봐. 그 양반 꽉 막힌 사람 아니니까 어쩌면 이해해줄지 몰라. 거짓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게 떳떳한 방법이기도 하고.”
그는 꼼수가 아닌 정석을 권했다. 이번 판은 깨끗이 돌을 던져 승복하고 새로운 룰로 새로운 판을 시작하라고. 좋은 책은 어렵고 좋은 운동은 힘들다는 말이 진리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그의 충고는 바람직한 것일까?
“그래 알았어. 생각 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문자를 또 보내왔다. 내 속을 꿰뚫는 내용이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 없겠지만 걱정을 해도 걱정이 생기니 그게 또 걱정이다.’
김 사장과의 면담은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후에야 이루어졌다.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섰을 때 그는 막 윗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물방울무늬의 붉은색 넥타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내가 첫 면접을 보던 날의 넥타이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적지 않았던 그의 도움이 눈에 밟혔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자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사를 받았다. 사직 사실을 보고받아 알고 있을 터인데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반대로 나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박 상무, 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 이렇게 빨리 사직하겠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는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놀람을 표시하는 특별한 재능을 선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싸움의 승기는 반 이상 그에게 넘어가있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능력과 제가 가진 능력의 차이가 예상보다는 훨씬 컸습니다. 제가 회사에 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참고 견디면 월급이야 받으면서 살 수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식충이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식충이로 스스로를 비하한 건 사전포석이었다. 책임전가의 부도덕을 커버하면서도 책임전가의 효과를 노리는 고도화된 양동작전을 위한. 회사에 만연한 조직적 비리라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까지 거기에 연루되어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여하튼 그는 비난의 대상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관계가 있다면 공범으로서의 책임이 있고 관계가 없다면 무능한 상사로서의 책임이 있으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무엇을 할 작정이오?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그의 말은 나를 걱정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논점이 다른 방향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무능한 상사보다는 공범 쪽일 확률이 높았다.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할 건지는 앞으로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W사로의 이직을 굳힌 상태지만 아직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으니까. 난 적당히 탐색전을 이어가면서 치명적 약점인 근로계약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많이 생각해서 결론을 내렸겠지만 여길 그만 두는 순간 사업이나 하면 모를까 재취업은 굉장히 힘들 겁니다. 박 상무 경력이 쓰일 데라고는 H사 협력사가 대부분일 텐데 그리로는 회사 규정상 1년간 이직을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말씀입니다. 지금 나이로 보아 1년이면 굉장히 긴 기간일 테고 그 시간이 지나면 박 상무는 잊힌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상황은 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김 사장은 설득이 아니라 겁박을 선택하며 급소를 찔러왔다. 조직의 문제를 무기 삼으려는 내 전략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숨통을 조여 오는 행동에 일체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결정적인 카드를 손에 쥐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언행이었다. 어떤 루트로든 나의 계획 전모를 입수한 게 틀림없었다.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방어체계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엄포에는 회유와 협박이 함께 들어있었다. 버틸 힘이 없었다. 평소의 신념이나마 지키자며 또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래, 원칙대로 살자. 지금 시점의 원칙은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일 터. 마침내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휴전을 요청했다. 아니 항복했다.
“사실은 제가 이곳에 입사하던 날 W사로부터 입사제의를 받았습니다. 이곳보다는 훨씬 좋은 근무조건과 대우를 보장받았죠. 갈등을 많이 겪었습니다. 김 사장님의 저에 대한 배려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얼마 전 W사의 황 대표를 만나 보다 구체적인 조건들을 듣게 되었지요. 아마 그때 결심이 섰던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그 동기는 절대 대우 때문만이 아닙니다. 차체기술 분야가 전문인 저로서는 W사에서 더 쓸모가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장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금형이 주 생산품인 이 회사보다 차체부품이 주 생산품인 그곳에서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몫은 훨씬 큽니다. 자연히 저의 보람이나 성취감도 배가되겠지요. 회사로 보나 저 개인으로 보나 이직이 옳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최종목적지가 K사로부터의 탈출을 넘어 W사로의 망명이라는 자백에 김 사장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가식과 거짓이 사라진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증거였다. 이직금지가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말한 정명의 말과 일부나마 회유성이 녹아있던 김 사장의 말을 상기하며 난 더욱 힘을 냈다.
“이직 금지조항이 근로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오늘에서야 근로계약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런 조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처음 입사했을 때 근로계약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서명을 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건 분명히 저의 잘못입니다. 변명으로 들릴지는 모르는 일이나 취업한다는 그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안보였던 그때 무엇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불리한 조항이 있었더라도 서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사장님께는 염치없는 일이 되겠지만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발 저에게 찾아온 기회가 무산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한바탕 웅변을 토해낸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일 겸허한 자세를 취했다. 후련했다. 자존심은 구겨졌지만 자존감은 되살아났다.
“나는 그렇다 치고 W사의 황 대표가 이 사실을 알면 반대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는 저쪽의 아그레망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대사를 파견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나의 작전이 먹혀들고 있었다. 캄캄하고 암울하기만 하던 고단한 내 항해 길에 희망의 등대 불빛이 비쳐들었다.
“황 대표에게도 저의 사정을 털어놓고 부탁 드려야겠지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이라면 하프코스는 별 힘들이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법이다. 도중에 마주칠지 모르는 불의의 부상을 유념해야겠지만. 난 평소의 체력으로 부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감을 가졌다.
“박 상무께서 W사로 가시더라도 우리 회사의 기술이나 기밀이 유출되는 일은 없겠지요?”
보안시스템의 존재는 고사하고 그곳에 접근할 권한이 부여되어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나였다.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은 도와주겠다는 협조의사 표시에 틀림없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회사에서 보안을 요하는 데이터를 복사하거나 열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믿으셔도 좋습니다. 만약 저로 인해 불상사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뻔한 질문에 뻔하지 않은 대답을 하는 것만큼 뒤통수를 치는 짓은 없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가 무산되지 않도록 난 또박또박 그가 원하는 뻔한 대답으로 화답했다. 그의 미소가 뜻한 바대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알렸다.
“박 상무, 오늘 협력사 간담회 자리에서 나 황 대표를 만났어요.”
협력사 간담회가 있었다니 오늘의 만남이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그 어감에서 예전과는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만남이었음이 느껴졌다. 대화의 내용이 은밀할 때 행해지기 마련인 물밑접촉의 기운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다. 나의 솔직한 고백을 그가 그대로 모방한 점 또한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건 우리 둘 사이에 교감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간주해도 무방한 성질의 것이었다.
“…….”
“그 자리에서 우연히 박 상무 이야기가 나왔지요. 황 대표가 터키 법인장으로 마침 맞는 사람을 구했다며 한 시름 놓았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사람이 박 상무였어요. 순간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우리 회사에 근무한지 두 달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도 해주었지요. 그 역시 놀라더군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황 대표가 특별히 나에게 부탁을 해왔습니다. 박 상무가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차체분야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며 가진 기술을 썩히지 말자고 하더군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박 상무의 능력이 그 정도인 줄 미처 나는 몰랐습니다. 나야 금형으로 밥을 먹고 살았으니까요. 황 대표의 그 말에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는 길이라는데 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걸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분 좋게 황 대표의 뜻을 받아들였죠.”
당사자를 배제한 거취논의. 그 당사자가 바로 나였지만 불쾌함보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그 행위를 치르면서 그들은 불합리를 합리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사의 조아림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두 분 뜻이 잘못되지 않도록 앞으로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사셔야지요. 이거 우리 인연이 이것밖에 안되어 아쉽긴 합니다만 박 상무에게는 잘된 일이니 어쨌든 축하합니다. 그리고 나보다는 황 대표에게 더 감사해야 할 겁니다. 그 양반 박 상무에게 아주 목을 매고 있던 걸요.”
김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왔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난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사람의 손이 어쩜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는지.
“처음부터 이런 소식을 알렸더라면 박 상무의 마음이 훨씬 편했을 텐데 그러질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회사를 떠난다는 박 상무가 결코 예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입사할 때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 놓고는 단순히 조금 조건이 좋은 곳이 생기니 이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어요. 말하자면 좀 괘씸했다고나 할까요. 다행스럽게 솔직히 말해주는 바람에 그런 생각은 걷혔지요. 조건보다 성취감이나 보람 때문에 이직한다는 그 말에 공감하기도 했구요. 이제는 W사에서 박 상무가 가진 실력을 마음껏 펼쳐보세요. 우리가 맺은 인연이 헛되지 않도록. 혹시 압니까, 우리가 다음에 또 만나게 될지.”
사람의 말이 어쩜 이렇게 다정할 수가 있는지. 난 계속 그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과의 인연은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지만 그의 말처럼 인연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리라. 밖으로 나오자 인연의 장이라는 게 잠시의 공백도 허용할 수 없는 공간이기라는 한 듯 김 사장의 빈자리를 황 대표가 금세 채워왔다. 아직 그에게 입사하겠다는 뜻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상태였다.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눌러 화면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K사에 근무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부족한 저를 받아주신 점,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지켜봐 주신다면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으로 차근차근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쁜 일이 있는지 몇 분이 지나도 문자는 읽지 않음으로 표시되어있었다. 이전에 영입의사를 확실히 표명하긴 했지만, 또 김 사장을 통해 오늘의 입장을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했다. 혹시 내가 숨긴 사실로 신뢰에 금이 간 것은 아닐까? 약한 믿음의 지표면을 뚫고 불안과 초조가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몇 분째 핸드폰의 화면만 지켜보고 서있었다. 참다못해 한 통의 문자를 더 보내기로 했다. 갚아야 할 건 또 있었다.
‘빌렸던 돈은 언제 갚으면 되는지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는 곧바로 손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당장 내일 갚으시오. 넉넉한 이자와 함께.’
답답하던 가슴이 한순간에 확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