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0월 5일 - 잘못된 선택

by 원광우

고속도로 위에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서해대교가 가깝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갑자기 주변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개였다. 가로등과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간신히 유지되던 가시거리가 더욱 짧아졌다. 산란을 일으킨 빛들의 경계가 흐릿했다. 속도를 줄이고 안개등을 켰다. 갈수록 안개의 밀도는 높아졌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허연 입김을 마구 뿜어댔다. 두터워진 입김은 멀리 가지 못하고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젠가 새벽녘 대청호로 출사를 떠났던 날이 기억났다. 그날 난 몽환적인 새벽물안개를 성공적으로 카메라에 담아 돌아왔다. SD카드는 한 줌 유실도 없이 그걸 액자로 옮겨 내 방에 토해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도원경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안개는 성질이 판이하게 달랐다. 멀리서 보는 안개는 환상이지만 가까이서 보는 안개는 현실이다. 사진사에게는 누림의 대상이지만 운전자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다. 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안개로부터의 탈출은 차단되어있었다. 비록 그 경계가 강하고 단단한 벽이 아니라 부드럽고 여린 울타리라 해도 건널 수가 없었다. 장막은 겹겹이 두터웠다. 거기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안개 밖이 아닌 중심으로 향해있었다. 내가 직면한 현실도 그랬다. 오늘 이후의 길은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주말부부가 되는 것만으로 부족해 연말부부가 되고 이 땅도 좁아서 5천마일이나 떨어진 타국에서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해 다른 모습의 나로 살아가기 위해 소설 속 안개의 도시로 ‘무진기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정도의 안개라면 나를 나 아닌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것과의 단절이 가능할 테니. 앞으로 펼쳐질 가족과 친지, 친구들로부터 멀어져야하는 생활이 못내 두려웠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갈등의 불씨는 항상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법, 단절은 갈등을 줄이고 이해와 신뢰를 더욱 증진시키리라.

안개는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차를 해 쉬어가고 싶었지만 갓길 정차는 자살행위에 다름없었고 휴게소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안개를 헤쳐 나가는 길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오감을 곤두세웠다. 과도한 에너지소모가 일어나면서 피곤이 몰려왔다. 입사일 변경을 종용한 일련의 사태가 원망스러웠다. 오늘의 안개가 아름다운 예술이 아닌 고단한 생활로 추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애초 W사 입사일은 11월초로 예정되어있었다. 터키에서 취업을 위한 노동비자를 발급받는데 한 달 가까운 시일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입사를 했으면 하는 황 대표야 불만이었지만 난 그 소식에 오히려 콧노래를 불렀다. 앞으로 누리지 못할 많은 것들에 대한 보복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확보된 셈이었으니. 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줄 뿐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는다. 며칠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는 남은 그 시간이 나보다 황 대표에게 더 필요하다는 신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영숙이 제수장보기에 나섰다. 난 신개념 대리운전 서비스를 무기로 그녀에게 접근했다. 마트까지의 차량운전과 마트에서의 카트운전, 푸드코트에서의 점심메뉴운전에 제수용품의 배송서비스까지 풀 패키지로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불완전판매의 오명을 덮어쓰지 않기 위해 고객이 원하지 않아도, 호출하지 않아도 제공되는 팩토리프리셋(Factory Preset) 서비스라는 반 강매 조항이 있음도 미리 알렸다. 굳이 그녀가 원치도 않은 일을 벌인 데는 나름의 영악한 노림수가 있었다. 이맘때면 대한민국 주부에게 찾아오기 마련인 명절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한 방역대책이란 포장지로 그동안 나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가부장적 이미지를 예쁘게 둘러싸기 위함이었다. 생과부와 생홀아비 삶을 살아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라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들을 서로 몇 가지쯤은 간직할 필요가 있었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어색하지 않을 나이라 해도 의지할 구석이라도 있으면 삶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는 법이 아닌가. 색다른 기억들은 생활에 지치고 환경에 짓눌릴 때 분명 삶의 활력소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카트를 밀며 영숙의 꽁무니를 쫄래쫄래 따를 때였다. 가식적인 내 행동이 역겨웠던지 전화기가 시샘하듯 내 발을 멈춰 세웠다. 062 숫자가 첫머리를 장식한 게 광주의 W사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전무님, 저 총무팀의 김 다연인데요. 통화 괜찮으세요?”

비자발급을 포함해 내 입사와 관련한 제반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비자신청서나 첨부서류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문제가 없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거꾸로 문제가 생겨 출국일이 조금이라도 지연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의문이었다. 성급한 기대에 말이 생각을 앞질렀다.

“괜찮아요. 왜 그러시죠?”

“입사일자에 대해서 여쭤보려구요. 혹시 10월 5일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그녀는 전혀 엉뚱한 질문을 다시 했다. 결승선 앞에서 어설프게 세리머니를 펼치다가 추월당해 메달을 놓쳐버린 기분이었다.

“11월 초에 입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벌써 비자가 나온 건가요?”

몇 개월이나 쉬었던 지난날을 그토록 못 견뎌했으면서 앞으로의 쉼이 단축된다는 그 말도 난 못 견뎌했다. 끝이 정해진 쉼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쉼의 차이였다.

“아뇨, 아직 비자는 발급전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강 전무님께서 전화를 드려보라고 해서요. 그냥 가능하다고 그럴까요?”

상대방의 사정이나 복잡한 내막은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쉽고 간단하게 업무지시만을 이행하려는 사무적인 태도였다. 무사안일 뒤에 숨은 무소신과 무책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름의 곤란한 심경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보장된 내 권리를 포기해야했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앞둔 휴가에 비하면 그녀의 업무효율향상은 그야말로 새발에 피였다.

“가능하면 입사일을 바꾸지 말고 계획대로 했으면 하는데요. 꼭 바꾸어야하는 겁니까?”

다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대화의 창에서 사라졌다. 데이터에만 기반해 말을 하는 AI에게 입력된 내용이 죄다 소진되면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송신기를 손으로 막고 있는 그녀에게 새로운 데이터를 주입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감정이나 직관, 상상력이 결여된 AI와 통화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할 일이라며 난 인내심을 발휘했다. 데이터 입력 장치도 출력장치도 모두 장애가 생겼는지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목소리가 달라져있었다.

“여보세요. 박 전무님. 그냥 입사일자를 바꿉시다. 저희들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요. 다음 주는 추석 휴가가 끼어 있으니 아무래도 출근이 어려울 테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는 것으로 하세요.”

황 대표를 만나던 날 잠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강 전무였다. 상대에 대한 멸시가 속속들이 녹아있는 그의 말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분노를 자극했다. 처음부터 마치 하급자를 대하듯 여직원을 시켜 전화를 건 에티켓 부재로부터, 자신이 누군가를 밝히지도 않은 채 제 할 말만 마구 뱉어내는 몰상식에, 호칭 뒤에 님이라는 존칭형어미가 따라붙긴 했지만 상대의 의견을 구하기보다 명령하는 듯한 어투에 이르기까지. 직급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내가 그에게서 그런 대우를 받을 처지는 아니었다. 삶터를 찾아온 철새에게 텃세를 부리는 텃새의 행위였다.

“대체 누구시죠?”

불쾌감을 한껏 장착한 질문으로 그의 존재를 모른 체하면서 나 역시 순순히 물러설 뜻이 없음을 확실히 밝혔다.

“아, 강 전뭅니다. 아니 글쎄…….”

“강 전무세요? 난 또 누구라고.”

그의 말을 사정없이 중간에서 끊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난 그와 달리 호칭 뒤에 님자 붙이기를 과감하게 거부했다. 말할 틈 또한 주지 않았다. 빡빡이 기질을 감추고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바꾸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유를 좀 설명해주면 좋겠습니다. 꼭 그래야한다면 바꾸어야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편한 사람이 되겠다고 만만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서로를 존중하려는 마음이 없이 깔보려드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편한 사람으로 자리 잡는 것이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방법이다.

“당연하시겠죠.”

강 전무의 자세가 경계태세로 전환되면서 말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상대성이론은 자연현상에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제 저희들이 박 전무님께서 입사하신다는 사실을 H사의 구매팀으로 통보했습니다. H사의 터키현지법인과 우리 법인 사이에도 똑같이 1차 협력사의 관계가 유지되는 만큼 법인장이 바뀌면 알리는 게 관례거든요. 그러자 H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해외공장으로 부임 전에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본사에서 근무를 한 후에 출국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죠. 이유인즉슨 한두 달도 아닌 장기간을 해외에서 근무해야하는데 본사의 사정조차 잘 몰라 협조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힘들어질 게 뻔한 이치고, 결국 적응도 어려워 중도에서 그만두는 사례로 발전한다는 거예요. 원청회사라고 협력사의 인원구성까지 참견을 하는 듯해 갑질한다는 인상이 심하게 들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지난 법인장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직함으로써 H사가 입은 피해랄까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전무님께서 협조를 좀 해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입사일 결정에 상진이 역할을 했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어차피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로 했으면 그로 인해 생겼던 근심과 걱정까지도 말끔히 제거하는 게 H사에 대한 W사의 의무이자 W사에 대한 나의 의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그날 몇 시까지 어디로 출근하면 되겠습니까?”

“출근시간이 아침 8시니까, 7시 반까지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전무님에 대한 대우와 조건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내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자 그는 보란 듯이 텃새의 깃털을 곧추세웠다. ‘출근시간’에도 ‘대우와 조건’에도 텃세의 낌새가 완연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어야한다. 아침형 인간 양성이라는 사회적 추세에 동조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경영이념과 부합한다면 당연히 따라야한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는 있어야 했다. 내 거주지가 수원이라는 것, 수원에서 광주까지 그 시간에 대중교통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 차량으로 움직이면 네 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것, 그 모든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에 꼭 출근이 필요하다면 전날의 숙박지를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안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나의 대우와 조건을 재정리하겠다는 것도 건방의 극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노련한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나에게 전달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불편을 감수하라고. 고개를 숙이자니 빡빡이가 가만있지 않았고 꼬치꼬치 따지자니 빈틈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행세로 보아 그는 눌러서 들어가기 시작하면 터질 때까지 계속 누를 유형의 인물이었다.

“대우와 조건 문제라면 모든 걸 황 대표와 매듭지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결정되지 않고 남은 게 있나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내 인내의 마지노선이었다. 또 황 대표가 결정한 사안이라면 그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저도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관리부문을 총 책임지고 있는 저로서는 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하는 것이니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는 슬그머니 완장을 팔뚝에 걸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이 조직으로 들어올 수 없음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이 황 대표가 채워준 공인실세의 완장인지 자신이 주워 꿰찬 비선실세의 완장인지 모르지만. 샘솟는 전투력에서라기보다 강한 두려움 때문에 큰 소리로 짖어대는 개의 모습이 그의 주변에서 어른거렸다. 통화는 끝났지만 관리본부장인 그와는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 계속 엮일 일이 많을 터여서 앞으로도 소소한 충돌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아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먼동이 트면서 안개는 서서히 걷혔다. 안개의 도시를 벗어났지만 내 앞에는 또 하나의 안개도시 무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달을 지내야 할 광주는 다른 나로 살아가야하는 다른 무진이었고 기약조차 할 수 없는 터키는 새로운 나로 살아가야하는 새로운 무진이었다. 언젠가는 끝날 나의 무진기행을 그렇게 열심히 상상한 덕분에 강 전무의 요구사항인 일곱 시 반 전 출근을 맞출 수 있었다.

회사입구에서 경비가 막아섰다.

“강 전무와 약속되어있습니다.”

첫 출근이라는 말이 어색하기도 하거니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니 길어질 것 같아 강 전무의 완장을 빌려 찼다.

“직원이 아니면 사내에는 주차할 수 없으니 바깥에 주차한 후 방문자 등록을 하고 들어가시죠.”

내 완장이 복제품이란 걸 간파한 것인지 그의 완장이 원래 위력이 없는 것인지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어디다 주차하면 되죠?”

“따로 정해진 곳은 없으니 그냥 적당히 세워두세요.”

이것도 강 전무의 계략이었을까? 차를 몰고 올 걸 알았으면 입차할 수 있도록 나에게 미리 방법을 알려주거나 경비실로 조치를 취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서운함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거기서 경비와 실랑이를 벌여봤자 강 전무가 나에게 해대던 완장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주변을 몇 바퀴 돌아 겨우 한 곳에 주차를 한 후 다시 정문으로 돌아왔다.

“박윤기 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 대표의 운전수였다. 그의 손에서 선글라스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또 다른 완장이 되었다. 나의 팔뚝에는 강 전무의 것이 아닌 황 대표의 완장이 새로 채워졌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오늘 대표님 만나기로 했어요?”

그의 질문에 난 짤막하니 첫 출근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가 나를 막아섰던 경비에게 다가가 나의 완장을 가리키며 몇 마디를 나누었다. 경비의 태도가 삽시간에 바뀌었다.

“차를 어디 주차하셨어요? 키를 주시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됐습니다. 나중에 제가 다시 가져오죠.”

완장의 힘이었다. 하지만 난 그걸 행사하지 않았다. 완장이 없는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라 완장을 찬 사람을 향할 때 그 완장의 가치가 더 크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선글라스의 안내를 받아 강 전무 방에 도착했다. 일곱 시 삼십 분이 지났지만 그는 출근 전이었다. 그 역시 아침형 인간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아침형 인간이 그토록 싫고 힘들었으니 나더러 밤샘형 인간을 만들며 분풀이를 한 것이겠지. 어제가 휴일임을 말해주듯 그의 자리는 깨끗이 정돈되어있었다. 난 그 위에 지필묵을 가지런히 놓은 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공자의 말을 써내려갔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 재방무원(在邦無怨) 재가무원(在家無怨).(출처 : 논어 안연(顔淵)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으면 나라에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집안에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강 전무의 성향은 첫인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작고 가늘게 쭉 찢어진 눈에서 배타성과 이기심을, 입 꼬리 양쪽으로 깊게 패인 세로주름에서 자기과시욕을, 등이 내려앉은 채 끝만 뭉툭하니 솟아오른 코에서 간교함을 읽어냈던 내 직감은 대화를 할수록 굳어졌다.

“업무 중 불편함이 있거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다른 누구보다 저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세요. 해외공장의 일차적인 관리 책임은 저에게 있으니까요.”

그는 특별한 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부당한 지시도 그의 입을 거치면 도움의 제공으로 둔갑했다. 관리를 책임과 섞어 표현함으로써 없는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터키법인은 본사와 완전히 다른 별도 회사였다. 경영실적을 본사로 통보하긴 했지만 그건 그룹 내 실적을 통합관리하려는 단순목적에서였다. 모든 게 조직 내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컷본능에서 우러난 행위였다. 속마음을 읽은 이상 서둘러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전략은 노출되는 순간 그 수명이 다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처우에 관해서는 대표님과 합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오늘 저랑 재확인한 후 서명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걸 살펴보시죠.”

근로계약서였다. 인생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걸 통과의례로 여겼다가 낭패를 당할 뻔했던 지난 일이 선했다. 대부분이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난 행간 속에 숨은 뜻까지 파악해내려 눈에 불을 켰다. 연봉이 적힌 마지막 줄 해외근무수당 단어 아래로 빨간 펜이 쭉 줄을 그었다.

“해외근무수당이 기본급여의 50%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30%라고 적혀있군요.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겠습니까?”

공직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린 듯했다. 제출 자료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문서조작행위를 따져 묻는 청문위원 앞에서 후보자는 당황하고 있었다. 상세한 수치검증까지 할 줄이야. 그런 표정이었다.

“아, 그것 말씀이군요. 저희 회사의 해외근무수당은 30%가 원칙입니다. 박 전무님은 대표님께서 특별히 50%로 결정하신 거구요. 그런데 제가 깜빡 잊고 다른 입사자와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다보니 그걸 고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그 부분을 고쳐서 다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변명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난 똑바로 입력했는데 컴퓨터의 키보드 배열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노골적으로 이죽거려주고 싶었지만 다행히 이성이 감정을 막아섰다.

“그럼 자리를 안내해 드릴 테니 가실까요?”

화제를 급히 바꾸며 위기를 벗어나려는 태도 역시 실수가 아니라 실수를 가장한 고의라 말하고 있었다. 권력게임에 임하는 전술도 진부했다. 초지일관 오직 상대를 깔아뭉개는 작전이었다. 가르쳐준들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난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가 전무님 자립니다. 현재 비어있는 중역실이 없어 부득이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오랜 기간 계실 게 아닌 만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허둥대는 바람에 그는 나를 잘못 인도한 것 같았다. 찾아간 곳은 사무공간이 아닌 재활용품수거장이었다. 삐뚤빼뚤한 파티션이 둘러싼 곳에는 책상과 의자 한 세트만 덜렁 놓여있었다. 급조한 냄새가 흥건했다. 책상 위에 놓인 데스크탑은 주변의 먼지를 죄다 빨아들인 진공청소기의 모습이었고 의자 옆에 삐쭉하니 서있는 목재옷걸이도 몸통과 걸대의 색깔이 달랐다. 파티션 너머 앞쪽에는 찌그러진 철제 캐비닛과 파일박스들이 폐기처분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있었다. 재활용품수거장이 아니라면 나를 입사자가 아니라 해고자로 착각해 창고로 데려온 것인가? 부당해고에 대항하는 임직원을 보직해임 시킨 후 책상을 옮겨놓곤 하던 그런 창고. 한 달이 오랜 기간이 아니라는 말에 그런 깊은 뜻이 숨어있었던 것일까? 이게 전부 황 대표가 짜놓은 각본일까? 아니면 강 전무가 계속 힘겨루기 도전장을 내미는 것일까?

“대표님께서 출근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가서 인사하시겠습니까?”

그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려 앞장서 걸어갔다. 잔말 말고 모든 걸 주어지는 대로 순순히 수용하라는 의미였다.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 의외로 높다는 걸 실감했다. 난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알아야 할 재질과 높이 같은 제원 분석을 일단 유보하며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황 대표를 만나면 보다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어서 오시오. 오늘부터 출근한다는 이야길 들었소. 추석은 잘 보냈소?”

변화 없는 황 대표의 말투와 표정에서 난 변화를 찾아내려했다. 장벽을 넘으려면 거기서부터 도움닫기를 시작해야했다.

“추석은 잘 쇠었습니다만 새로운 환경이 영 녹록치 않군요.”

우리 둘 사이의 약속에 심심찮게 방해세력이 준동하고 있음을 흘리려했다.

“왜 불편한 점이 있소?”

나에게 질문하면서 그는 강 전무 쪽을 쳐다보았다. 답할 사람이 내가 아닌 강 전무라는 듯. 내 의사의 반은 이해한 것 같았다. 강 전무가 움찔했다.

“그건 아니구요. 바뀐 환경에 쉽게 적응되질 않아서요.”

대답을 하면서 나도 강 전무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허둥대고 있었다. 오늘의 일이 그의 권력욕에서 촉발된 단독범행이라는 자백에 다름 아니었다. 안테나 정명에 바람잡이 황 대표, 기계 강 전무로 구성된 소매치기조직을 의심한 건 나의 지나친 확대해석이자 피해망상이었다. 내 표정이 풀린 것을 확인한 그가 준비하고 있던 지남철 화술로 일정 부분 철성분이 가미되어있는 나의 바이오닉 생체시스템을 통째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 전무는 자리를 떠 보이지 않았다.

“우리 터키 공장이 문제가 많소. 덩치만 컸지 속을 들여다보면 껍데기뿐이란 말이오. 초기투자비가 많이 들어갔고 지금도 끊임없이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도대체 수익구조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요. 이래 갖고는 공장운영이 어려운 상태요. 박 전무께서 이번에 부임하면 무엇보다 이윤을 극대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주시오. 이윤이 남는다면 그걸 바탕으로 나는 박 전무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할 의향도 갖고 있소.”

개천이라고 용이 나지 말란 법이 없고 외양간이라고 인류를 구원할 성인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재활용품수거장도 창고도 내 하기에 따라 훗날 W사의 사사(社史)에 남을 뜻 깊은 장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달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과 스톡옵션이라는 다소 생소한 언어가 일으킨 화학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공장의 환경도 많은 개선이 필요하오. 정리정돈이 잘 되지 않다보니 선입선출이 지켜지지 않아요. 그건 불량으로 이어지는 지름길 아니겠소? 당연히 비용은 올라가고 원가는 상승하겠지요. 이것 또한 전문가의 시각에서 확 뜯어고쳐주시오. 뿐만 아니라 생산성에도 문제가 많소. 문외한인 내가 봐도 설비 배치가 효율적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해요. 작업자별로 적절한 작업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쓸모없이 많은 인원이 편성된 곳도 허다하구요. 이런 것들이 다 낭비지요. 제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공장을 한번 만들어봅시다.”

엔지니어의 삶을 사는 동안 누구보다 공장개선활동의 선봉에 섰던 나였다. 생산성향상, 품질향상, 비용저감, 납기단축, 안전강화, 사기진작. 여섯 가지라면 내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였다.

“제가 가는대로 전체적으로 검토해서 따로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하루아침에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만큼 시간을 좀 주십시오. 또 필요에 따라서는 적절한 투자가 이루어져야하니 그 또한 염두에 두시고요.”

“이제야말로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난 박 전무만 믿을 것이니 마음대로 뜻을 한 번 펼쳐보시오. 그리고 참, 오늘부터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해야할 터인데…….”

어째 바람잡이의 주특기가 되살아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며 풀어놓았던 방심을 다시 거둬들였다. 한시라도 기계가 모습을 드러낼까봐 바짝 긴장했다. 그의 침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빌라가 공장 주변에 몇 채 있어요. 일부 타 지역 거주자들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는데 박 전무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 그걸 사용했으면 해서요. 다른 중역들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주 형편없는 그런 곳은 아니오.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 점 이해를 좀 해주시오. 호텔을 잡아주면 좋겠지만 가까운 곳에 마땅한 호텔도 없을뿐더러 비용의 문제도 있고 해서 말이오.”

최악의 경우를 걱정했는데 차악의 상황이 벌어진 형국이었다. 줄어든 걱정의 부피를 자위가 채웠다. 생활하는 집이 아니라 잠을 자는 숙소로 의미를 축소한다면 그 정도야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평소 잠자리에 민감한 편이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잊혀졌다.

“걱정 마십시오. 숙소가 있는데 괜히 호텔비를 들일 필요는 없는 일이지요. 그걸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이해를 해주니 고맙소. 그리고 혹시 골프는 치시오?”

그가 의외의 질문을 해왔다. 또래의 친구들치고 골프를 취미로 갖지 않은 사람이 드무니 의외의 질문이 아니라 질문이 의외인지도 모른다.

“골프는 치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큰일인데요. 터키에 가면 휴일을 어떻게 보내시려구요? 취미생활을 하지 않으면 향수병이 쉽게 찾아오지요. 아니 어떻게 아직 골프를 배우지 않으셨나 그래.”

“…….”

대답을 생략했지만 줄인 말 속에는 수백 개의 웃음 이모티콘이 숨어있었다. 다른 병보다 유독 향수병에 저항력이 떨어지는 신체긴 하지만 골프 말고도 그걸 극복할 방안은 얼마든 있었다. 매일아침 달리기를 제외하더라도 여행, 사진, 글, 그 세 가지 취미만으로 향수병 정도는 쉽게 물리칠 수 있으리라. 주말마다 이스탄불이라는 세계 제일의 관광지를 두 발로 구석구석 누비며 사진을 찍고 거기에 기행문을 더해 한 권의 여행기를 완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어찌 골프에 비할까? 그걸 알 턱이 없는 황 대표가 급히 전화기를 들어 강 전무를 불렀다.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강 전무, 박 전무 출국예정일이 언제요?”

황 대표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우린 둘 다 어리둥절했다.

“비자 발급일을 고려하면 11월 초가 될 것 같습니다만…….”

대표의 복심까지 읽어내는 심복이란 글귀를 완장에 추가하고 싶었던 그는 흔치않게 찾아온 찬스를 살리지 못한 안타까움을 흐린 말꼬리에 실었다. 난 강 전무의 만행에 더한 빌미가 주어질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예의주시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았네요. 박 전무가 글쎄 골프를 안 한다고 그럽니다. 어떻게 그 한 달 동안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프로와 초보 사이의 손쉬운 게임을 직감한 그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배우는 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김 이사도 채 잡고 한 달 만에 머리를 얹은 걸요.”

김 이사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제자를 키워낸 스승의 자부심이 뿌듯한 말투였다. 그쪽 세상에서 난 이방인이었기에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강 전무가 책임지고 오늘부터 당장 박 전무를 골프연습 시키세요. 터키 가기 전에 두어 번은 필드에 데리고 나가시고.”

적이자 경쟁자였던 우리 사이가 황 대표의 그 말에 사제지간으로 변경되었다. 점점 유리한 방향으로 기우는 운동장이 만족스러운지 강 전무는 황은망극(皇恩罔極)이 아닌 황은망극(黃恩罔極)을 읊조리며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골프에 저는 별 취미가 없습니다. 그냥 두시면 안 될까요?”

배움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강 전무와 연계된 배움이 싫어서였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타박이, 잘 하면 잘하는 대로 생색이 이어질 것이 뻔했다.

“거기 가면 골프 말고는 할 일이 없어요. 더구나 가족도 없이 혼자지 않소. 요즘은 고객들도 술을 마시는 것보다 골프 치는 걸 더 선호하니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되고 말이오. 박 전무를 위해서라기보다 회사를 위해서 시키는 거니 모른 척하고 이번 기회에 배워보시오.”

회사를 위해서라는 말에 거부의 모든 명분이 사라져버렸다. 하긴 그 또한 급여봉투에 기록되는 수당 중 하나에 해당하는 의무인지도 모른다. 트러블메이커와의 시간이야 늘겠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무언가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을까? 친구는 가까이 두되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 대표와의 만남이 끝난 후 터키공장의 정보를 익히면서 창고지기의 사명을 다하고 있을 때 강 전무가 또 나를 찾아왔다. 함께 갈 때가 있다면서 그는 구체적인 장소의 언급을 피했다. 기대감을 키우려 벌인 연막전술이었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했던 나는 시큰둥하니 김 빼기 전술로 응수했다. 제풀에 지친 그는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한 단어면 표현 가능한 목적지를 한 편의 단편소설 분량으로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이며 늘어놓았다.

골프연습의 왕도는 다다익선(多多益善)도 좋지만 조조익선(早早益善)이 우선이다. 그걸 실천하는 의미에서 지금 바로 가서 친분이 있는 유명 프로를 일대일 강사로 소개해주겠다. 당장 강습등록을 하고 오늘부터 바로 연습을 시작하라. 그리고 여기 머무는 동안 특별히 주어진 업무도 없으니 오후 다섯 시만 되면 퇴근해 연습장으로 달려가라. 3주 후쯤 필드에 나갈 예정이니 그때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연습해야할 것이다.

말만으로도 주눅이 들어버린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모든 걸 맡겨두었다. 골프연습장에서 레슨등록을 했고 거금을 들여 골프채와 신발, 장갑 등을 구입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업무의 일환이라는 황 대표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이왕 할 거 조조익선도 다다익선도 모두 실천해 골프에서조차 강 전무에게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나중 일이지만 나의 다짐은 굉장한 결과로 이어졌다. 첫 라운딩에 나선 날, 난 강 전무 앞에서 실로 가공할만한 성적을 냈다. 100타를 넘긴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89타의 경이적인 스코어를 기록했다. 또 하나의 명귀를 족자에 써서 그에게 선사한 셈이었다.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 빙수위지이한어수(氷水爲之而寒於水).(출처 : 순자 권학(勸學)편, 청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로 이루어졌지만 물보다 차갑다.)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퇴근시간이 지나있었다. 나의 전담마크맨으로서 남은 강 전무의 오늘 마지막 역할은 숙소길잡이였다. 그는 이번에도 소설 창작재능을 뽐내려했지만 각자의 차로 나뉘어 이동한 탓에 아쉽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았지만 난 곧 변덕을 부렸다. 출발한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차는 골목길로 접어든 후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르기도 했고 공동묘지를 지나가기도 했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어도 좋고 대하소설이어도 좋으니 산악과 사막지형을 겸비한 서킷에서 포뮬러원 경주를 펼쳐야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었으면 싶었다.

강 전무가 차를 세운 곳은 주택은커녕 텐트 하나 없는 산등성이에 덩그러니 지어진 3층 건물 앞이었다. 난 그의 뒤에 차를 세웠다. 있는 힘을 다해 파킹브레이크를 당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차가 굴러 내려갈 듯한 급경사였다.

“키 받으세요. 203호가 전무님 방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계단 바로 앞에 있는 집이에요. 그럼 오늘은 쉬시고 내일 출근해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내리자말자 그는 키만 달랑 내 손에 쥐어준 채 제 차에 황급히 도로 탔다. 처음 입주를 하는 만큼 집의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짐 운반을 도와주기도 하고 생활하는데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펴볼 수도 있는 일이건만 그런 배려들이 일체 생략되어있었다. 아무리 화해불가능한 적대적 관계라 해도 구구절절 상황이며 배경들을 상세하게 묘사했던 그의 스타일을 고려할 때 미심쩍은 구석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거나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내 경험이 축적한 빅 데이터로 분석하자면 후자의 경우에 해당했다. 도움을 강요할 수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가 떠난 빈자리를 땅거미가 채웠다.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인공조명이 하나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귀신들의 밤길을 돕기 위해 별빛들이 하나둘 출현했다. 그 사이로 강 전무의 차 브레이크 등이 점멸등처럼 자주 깜빡거리며 주의를 환기시키듯 내려갔다.

차에서 꺼내든 캐리어를 들며 끌며 계단을 올라 203호 앞에 섰다. 멀리 이곳까지 고흐의 영혼이 여행을 다녀간 듯 출입문에는 스티커와 전단지가 임파스토 기법으로 두텁게 중첩되어 소용돌이 형태를 이루며 붙어있었다. 그 사진과 그림만으로도 가스 불 한 번 켜지 않은 채 넉넉히 일 년은 음식 걱정 없이 생존가능해보였다. 일일이 그것들을 뜯어 구겨 쥐고는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찾아 올리자 방 하나가 단출한 모습을 드러냈다. 살림살이로 치차면 있어야 하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았다. 책상도 침대도 옷장도 아무 것도 없이 휑뎅그렁했다. 벽촌구석의 싸구려여인숙도 이럴 수는 없었다. 200리터쯤 될까하는 냉장고와 땟국이 줄줄 흐르는 이불은 오히려 방이 아니라 쓰레기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형편없는 곳이 아니라더니 황 대표의 형편은 저 냉장고와 이불을 뜻하는 것일까?

쓰레기장에도 별도의 쓰레기통이 있었다. 손에 쥔 전단지 뭉치를 그 속에 밀어 넣었다. 쓰레기통은 며칠째 급식중단에 항의 농성을 벌이는 것인지 좀체 아가리를 벌리려하지 않았다. 강제로 아가리를 벌렸다. 입과 항문이 동일한 놈의 구조상 목구멍까지 꽉 차있는 내용물을 배설하지 않고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분을 못이긴 나는 입이 아닌 뱃구레로 종이더미를 쑤셔 넣는 악행을 저질렀다.

오늘 하루의 일들이 영화의 장면으로 변해 지나갔다. 회사입구에서 차량출입을 막던 경비원, 연봉이 잘못 적힌 근로계약서, 창고 같은 사무실, 쓰레기장 같은 숙소. 기승전결이 제대로 갖춰진 스토리라인이었다. 골프연습장이라는 생뚱맞은 요소가 끼어들긴 했지만. 3인조 소매치기 조직이 내가 가진 모든 걸 털어낸 후 낮엔 창고지기로 밤엔 환경미화원으로 투잡을 뛸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내몰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을 일망타진하지 않고는 헤어날 길이 없었다. 혼자 힘으로 추적을 하든 신고를 해 공권력의 도움을 얻든 어떤 식으로든 용단을 내려야 했다. 문제는 북받치는 모멸감을 지금 당장 해소할 묘책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 더러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결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을 거듭거듭 검토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일단 샤워라도 하면서 심기일전의 효과를 누리기로 했다.

욕실의 문을 열었다. 또 한 번 눈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철거중인 집을 잘못 찾아든 것 같았다. 물때가 시커멓게 내려앉아 수세식인지 퍼세식인지 구별이 안가는 변기, 꼭지가 사라진 채 이슬람화장실의 뒤처리용 호스로 변신한 샤워기, 내 얼굴을 대각선으로 길게 찢어놓는 흉기가 된 거울, 바닥에 주저앉아 세숫대야로 전락한 세면기. 도로 문을 닫았다.

속이 심하게 메슥거렸다. 냉수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순간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내가 연 것은 냉장고가 아니라 음식물 처리기였다. 내 뱃속에서 미처 처리가 덜 끝난 음식물들이 갈 길을 찾았다는 듯 폭포수처럼 그 속으로 쏟아졌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 서 있는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구실을 하려면 한시라도 그곳을 빨리 벗어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심기일전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캐리어를 챙겼다. 찾아보면 오늘 하루 숙박할 곳이야 근처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터. 퇴로를 차단당했다는 두려움에 그동안 너무 수세적인 자세를 취한 게 이런 결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이 수모를 더는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내일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강 전무가 서있었다. 눈에 띄기만 하면 멱살부터 쥐려한 소매치기단의 일원이 제 발로 찾아왔건만 난 어쩔 줄 모른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말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녹아들었다.

“박 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키를 잘못 드렸습니다. 전무님 방이 여기가 아니고 302호입니다. 이 방은 터키에서 연수생들이 왔을 때 공동 숙소로 이용했던 곳이라 청소도 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곳인데……. 정말 미안합니다. 자, 빨리 방을 옮기시죠.”

그의 어깨너머로 노란 반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매치기단이라는 그의 혐의는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방을 나가야하는지 방을 옮겨야하는지 판단도 잘 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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