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테리어 디자이너 가 될 것인가? 회사원이 될 것인가?

학교에선 알려주지 않는 현실적 조언

by 인성미남

여는 글


나의 학창 시절의 기억은 꿈 많은 소년이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꿈도 꾸지 못하는

소년의 회색빛 기억뿐이었던 것 같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상처는 될 수 있다.

그 무렵 찾아온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닌 이유 있는 반항심 뒤에 숨어 공부에 대한 필요와 목적은

이미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위안이 되어주고 현실의 답답함 따위를 잊게 유일한 도피처는 그림이었다.

미술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아본 적도 없었고 우연한 계기로 친구에게 선물 받게 된 영화 포스터 한 장을

연필 한 자루로 따라 그리게 되었던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영화 포스터의 제목은 ' 라스트 모히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강렬한 눈빛과 비장함이 녹아 있는 단 한 장의 영화 포스터 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때 그렸던 '모사'(模寫)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나의 보물 1호가 되지 않았을까?

그게 시작이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연필 한 자루는 점점 작아졌고 손에는 연필 자국이 선명했다.

반복적인 일이나 습관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며 잘하게 된다.

학업 성적은 바닥을 맴돌았지만, 그림 실력은 점점 더 발전해 나갔다.

어떠한 사물 혹은 형태를 정해진 구도와 공식 없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툴고 거칠고 정리되어 보이진 않았지만 소년만의 구도가 생겼고 명암이 스며들었다.

그러한 소년만의 유희 속에서 작은 꿈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의 씨앗.

돈이 필요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소년에게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미술 선생님의 도움과 응원이 있었지만,

대학에 합격한들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기에 소년의 마음속엔 이미 좌절감과 패배감이

애써 돌봐온 꿈의 씨앗을 덮고 있었다.

시험은 치르고 싶었다. 다닐 수 없는 대학일지라도 시험에 합격은 하고 싶었다.

'나의 꿈은 가난하지 않다고' '나의 꿈은 살아 있다고'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다.

운명의 화살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그때 대학에 합격했었더라면 지금의 내 삶이 달라져 있었을까? 그렇게 꿈꾸었던 화가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만약 (IF)이라는 명제 (名題 ) 속에 나를 가두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의 감정의 도피처와 내 삶에 도피처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되는 군대라는 사회에서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야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직업 가치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고졸의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만으로 절실함과 간절함이 가득한 가난한 청년의 미래를 책임질 수는 없었으니까.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운 좋게도 조명 설치기사였다.

조명기사라고 하니 먼가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어찌 보면 간단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다세대 주택 혹은 빌라, 원룸 다세대라고 불리는 신축 주거공간에서 조명을 세대마다 설치해 주는 일을 했다. 지금 28년 차 인테리어 업 (業)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에 빛을 불어넣어 주는 일을 조명 설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현장 책임자라는 사람이 와서 조명 설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설치에 대한 불만을 조목조목 따지듯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손엔 도면을 들고 다른 한 손에 그냥 보기에도 멋져 보이는 카메라를 챙겨 든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던 기억. 그 기억과 그 사람의 전문적인 화술이 나를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제가 지금 하고 계신 일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요?' 당돌하고 간절한 질문을 들은 그분은 말없이 날 쳐다보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대학생이세요? 학과가 인테리어 학과예요? 아님 건축과?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었었던 난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 주섬주섬 연장을 챙기곤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학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문성의 문제였고 그러한 전문적인 일에 대한 기초가 있는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의 가치관과 목표는 정해져 버렸다. 모든 감각과 신경과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으니까.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운명 같은 끌림이 찾아왔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어려움과 시련 패배감과 좌절감은 일시에

희망과 도전 구체적인 목적으로 변했다.

그 무렵 내가 찾아갈 수 있었던 인테리어 교육장은 두 가지 선택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디자인 학원의 인테리어 학과를 수강하는 방법과

대학교의 인테리어 디자인 학과를 입학하는 방법이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지만 택할 수 있던 건 오직 하나였다. 디자인 학원을 찾아 인테리어 학과의 기초 과정을 수료하는 것뿐.

낮에는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저녁에 학원을 다닐 수밖에 없는 그때의 상황을 난 담담히 받아들이고 시작이라는 도전이라는 목적에만 집중했다.

하루가 달라졌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더 간절히 공부했다.

뒤늦게 솟아난 학구열은 일상의 고단함을 견디게 해주는 비타민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으니까

디자인 학원에서는 기초적인 미술수업을 다시 했고, 다소 생소한 도면 (圖面)의 작도 법과 그 도면을 바탕으로 하는 투시도를 만들 수 있는 스킬들을 배우게 되었다.

하나의 연필을 이용해서 다양한 선의 굵기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과 도면 글씨체를 배우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도면 글씨체가 연습에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본은 나의 글씨체와 합쳐져 나만의 글씨체가 생기게 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컴퓨터와 주변기기들 그리고 소프트 웨어들의 발달로 인해 도면을 직접 손으로 그리고 도면 제목과 그에 포함되는 수많은 설명 표현을 굳이 직접 그리거나 쓸 필요가 없어서 내가 느꼈던 아날로그 적인 감성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다소 아쉬운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감성들을 느끼게 되었던 그 순간들이

모여 디자이너의 감성이 싹트게 되었던 거 같다.

중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기본적인 감성들과 지식들은 뿌리가 되고 기초가 되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배경이 되었다.

목적이 있는 시간들은 어느새 결과로 나타났고, 디자인 학원을 수료할 무렵에 강의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 왔다.

" 이제 곧 수료할 텐데 내가 아는 인테리어 회사에 소개해줄까 하는데 취업할 의사가 있는 거야?" 고민할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 네 , 해보고 싶습니다." "꼭 취업시켜 주세요"

디자인 학원을 수료한다고 해서 모두가 취업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간절히 배우다 보니 그러한 모든 모습들 속에서 적은 가능성을 보고

소개해줄 마음이 생기셨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 인테리어 시장은 1980 년대의 경제발전과 크고 작은 국제 행사를 치르며

단순히 먹고사는 것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는 것에 서서히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에

편승해 속된 말로 돈 되는 직업이 되어 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인테리어 회사가 생겨났고 난 비교적 작은 회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인테리어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게 시작이었고 정신없이 일하고 배우다 보니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 학원에서 배운 기초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첫 출근을 하는 날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었고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스펀지가 되어야만 했다. 직장 상사들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 글씨체까지 모두 따라 하고 내 걸로 만들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정말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몸으로 배운 경험들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인테리어 학과를 지망하는 인테리어 회사에 취업하고픈 후배들을 위해 여과 없이 알려주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유려한 문장가도 아니고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는 중년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자아성찰과 회고록 정도로 생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며

여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인테리어를 천직으로 알고 다음 생에도
인테리어를 직업으로 갖고 살고 싶은 디자이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