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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11. 2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전주

언제부턴가 전주가 붐빈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옥들 사이로 하교하는 여고생들 교복 그림자가 가끔 지나가던 한적한 한옥마을은 게스트하우스와 음식점이 하나씩 들어서더니 어느새 한복 입은 젊은이들의 전동바이크 소리와 셀카봉 앞에 모여든 관광객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남부시장 피순대 집과 동문거리 국밥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당연해 보이고 오월, 영화제를 맞은 구도심 영화의 거리는 팔도 사투리에 여러 외국어가 동시에 들리는, 새로운 문화의 도시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지세 좋은 전주에 사람들이 모여든 건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다. 천백 년 이전에도 이 곳 완산(전주의 옛 이름)은 후백제의 도읍이었다. 한옥마을 동쪽에 보이는 나지막한 승암산 중턱에는 견훤왕궁터라 불리는 동고산성이 있다. 후삼국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인물 견훤의 야망이 시작된 이 전주 땅에는 이제 그의 이름만 허허롭게 산중에 남았다. 그 옆, 전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는 절집 동고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 신라가 망한 뒤 세상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둘째 왕자 김황은 이 절에서 출가해서 범공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되었다. 후백제의 시조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흔적이 이 작은 산자락에 아직 남아 완산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후백제와 신라를 멸한 고려는 그 후로 450여 년을 존속했다. 고려의 무장 이성계는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조상들의 고향 전주에 들러 종친들과 승전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가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오목대(梧木臺)다. 이때 이성계는 흥에 취해 역성혁명의 속내를 내보이고 말았고 함께 참전했던 정몽주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전주의 경기전은 결국 정몽주를 죽이고 왕이 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옛날에도 지금도, 역사는 결국 이긴 자의 기록이다.



전주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 이용되는 객사(客舍)에는 호쾌한 서체로 쓰인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풍패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다. 전주가 조선 건국의 배경이 되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17세기 명나라의 문장가 주지번이다. 관직에 오르기 전 어린 시절, 북경의 영빈관에서 일하던 주지번은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송영구를 만나 여러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이후에 관직에 올라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된 그는 은인을 수소문해 전주에 내려와 이 글씨를 전주객사에 남겼다. 작은 인연이 수백 년을 건너 글씨로 전주 땅에 남았다.


그 조선이 서고 다시 오백여 년이 지난 어느 오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용머리고개 위에서 전주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혁명을 외치며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이 고을에 그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다. 새로운 세상에 몸을 던진 그들의 바람은 결국 외세의 개입 아래 깨어지고 흩어지고 말았지만 이 곳에서 뿌려진 씨앗은 근대를 관통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증산도 역시 그중 하나다. 동학혁명의 실패를 직접 목도하고 세상을 떠돌던 증산 강일순은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 곳에서 증산도를 창시했다. 지금도 한옥마을의 동학혁명기념관과 모악산의 증산도 성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다시 백년을 건너 그들의 생각은 전해지고 있다.



60년대 초반, 전국의 학생 백일장을 휩쓸던 '공포의 자주색'이 있었다. 전주 기전여고의 자주색 교복을 입고 시상대에 오르던 천재 문사 최명희를 부르던 별명이었다. 뛰어난 문재에도 어려운 가정을 부양하느라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평생을 모국어와 글쓰기에 바쳤다. 전라도 방언의 풍부한 표현과 고향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전주를 대표하는 작가로 남았다. 한옥마을 가운데 최명희 문학관과 생가터가 있고 평생의 역작 '혼불'의 이름을 딴 '혼불문학공원'에 묘역이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막말의 시대, 문학관에 걸려 있는 작가의 말이 더 무겁게 들린다.



몇 년 전부터 전주 구도심 한 편에 세련된 카페와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지면서 '객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쇠락하던 거리에 새로운 활기가 가득하다. 쫄면집을 나서는 붉은 뺨 여중생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객리단길 사이 오래된 골목 사이로 임춘앵 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며 자지러지던 50년대 처녀들과 남진 리사이틀이 열리던 극장 앞에서 줄을 서던 70년대 처녀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인다. 그 너머로 조선의, 고려의, 후백제의 목소리들도 낮게 들리는 듯 하다.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에 스며든 사람들의 이야기들 거리마다 골목마다 여전하다. 옛날 옛적부터 이어진, 오래된 도시 전주의 이야기들이다. 밝은 오월 주말, 전동성당과 전주향교, 한옥마을에선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도 전주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2018년 6월, 어느 회사의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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