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변화 추구

by 임풍

같은 자동차라도 누가 운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능을 보여준다. 숙련된 운전자는 같은 차로도 더 안전하고, 더 빠르고, 더 유연하게 길을 통과한다. 이 비유를 인간에게 적용해 보면, 몸은 자동차이고 정신은 운전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평생 같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몸이 발휘하는 역량은 정신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정신은 몸 밖으로 꺼내 교체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은 수양과 훈련을 통해 분명히 변화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를 정신 수양이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성격 형성, 즉 character building이라 불렀다. 표현은 다르지만 전제는 같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과 판단력, 습관과 성향의 총체인 정신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적 표현 속에서도 반복된다. 성경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거듭나라”,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를 위해 죽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말들은 모두 이전의 정신 상태를 내려놓고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요청이다. 동양 격언의 일신우일신, 혹은 “살아서 죽어야 진짜로 산다"라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낡은 정신의 해체와 재구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노력과 의지를 통해 같은 몸으로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학교 교육이나 군대 훈련이 단순히 체력을 단련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규율, 인내, 책임이라는 정신적 틀을 새로 형성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은 이러한 정신적 변화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지만, 동시에 정신을 붙잡아 두는 강력한 장치로 변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매달린 생활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에너지가 분산된다. 조용한 자연을 떠나 번잡한 도시로 옮겨온 인간은 이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흐름 속에까지 휩쓸리고 있다.

인간 역사의 진보가 과연 인간 정신의 명료함을 함께 키워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장시간 앉아 있는 생활 방식, 눈을 혹사시키는 기기 사용, 뉴스와 광고, 프레임과 가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신은 쉽게 피로해진다. 이런 환경은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성찰하고 변화시키는 정신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외부 환경이 정신을 흐리게 할수록, 인간은 의지와 원칙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발전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정신은 방치될 때 퇴화하지만, 훈련될 때 성숙한다.

사람은 언제나 같은 몸 안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환상이나 윤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가능한 변화다. 한 배우가 같은 몸으로 매 작품마다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정신을 단련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역할을 선택할 수 있다. 굳이 죽음을 기다려 다른 존재로 태어날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생에서, 이 몸으로, 이전보다 더 명료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정신적 변화란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다른 눈으로 보고, 같은 몸을 사용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존재다. 이 가능성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변화 과정에서 도움이 될만한 위인들의 전기가 언제나 주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