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의 꿈속에 살고 있는가?

by 임풍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세계를 현실이라 부르고, 그 바깥을 상상이라 규정해왔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구분은 결코 고정된 적이 없었다.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세포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자현미경 이전의 인간에게 바이러스와 곰팡이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우주망원경이 등장하기 전에는 우리 은하계조차 우주의 전부처럼 여겨졌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가 수천억 개 이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앎조차도 기술이 허락한 시야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란 언제나 인간의 감각과 도구가 닿는 범위에서만 정의되어 오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은 이 사실을 더욱 급진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라는 소립자를 알고, 그 내부에 쿼크라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지점이 과연 존재의 마지막일까. 만약 쿼크 하나가 하나의 우주라면,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별과 전자, 또 다른 구조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장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세계를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포를 직접 볼 수 없던 인간이 세포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처럼, 우리는 단지 관측 수단의 한계 속에서 세계를 단순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공상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은 본질적으로 스케일에 따라 전혀 다른 법칙을 드러낸다. 양자 세계에서는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로 존재하고, 관측 행위 자체가 결과를 바꾼다. 거시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거의 사라진다. 이는 세계가 단일한 층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현실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음을 시사한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것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에너지 장의 특정한 진동 패턴에 가깝다. 입자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아니라, 에너지가 잠시 응결한 흔적이다.

생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몸은 이산화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라는 단순한 원소들의 조합이지만, 그 결과는 감정과 기억, 자기 인식을 지닌 창발적인 존재의 등장이다. 우리는 비타민과 효소를 발견하며 생명의 비밀에 다가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극히 일부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생화학은 어떻게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 반응이 '나'라는 주관적 경험으로 나타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의식은 여전히 과학의 가장 깊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 지점에서 인간 인식의 구조가 분명해진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까지 축적된 지식의 총합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뉴턴이 자신의 과학적 성취를 바다 앞 백사장에서 주운 몇 개의 모래알에 비유한 것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인식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었다. 우리는 신, 영혼, 다른 차원, 에너지의 물화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추측으로 메우고, 그 추측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한다. 이는 장님들이 각자 만진 코끼리의 일부를 전체라고 주장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꿈은 이 문제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경험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며, 그 세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꿈속의 고통과 기쁨은 현실만큼이나 생생하다. 꿈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이전의 현실이 하나의 층위였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세계는 과연 절대적인가. 혹시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이 역시 하나의 꿈 상태는 아닐까?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외부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이 아니라, 뇌가 외부 감각 신호를 바탕으로 구성한 내부 모델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생존에 유리하도록 편집된 세계를 경험한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이 인간적 특성을 기계적으로 확장한 결과이다. 인간은 본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알고리즘은 그 편향을 대신 수행하며 강화한다. 그래서 사람은 각자의 인식 범위 안에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진리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나와 너의 진리는 쉽게 겹치지 않는다.

이 모든 사유를 하나로 묶으면, 인간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끊임없이 변환되는 에너지가 꾸는 꿈의 프랙털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에너지는 소립자로, 소립자는 원자로, 원자는 분자로, 분자는 세포로, 세포는 장기와 몸으로 이어진다. 각 층위는 이전 층위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성질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전자와 소립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이전의 에너지 상태는 이미 사라진 꿈과 같다. 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립자의 세계는 기억 속의 몽상이다.

이 구조는 인간의 몸 안에서도 반복된다. 인간이 꾸는 꿈속에는 장기와 무의식이 의인화된 존재로 등장한다. 꿈을 꾸는 동안 그 세계는 하나의 완결된 현실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깨어나는 순간, 그 세계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와 무의식의 세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차원으로 물러났을 뿐이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인간 세계 자체도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꾸는 꿈일 가능성이 열린다. 종교가 말하는 신의 형상은 외형의 닮음이 아니라,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을 가리키는 은유일 수 있다. 만약 인간 세계가 신의 꿈이라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은 신화된 이미지들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차원의 이동에 가깝다. 신이 꿈에서 깨어난다고 해서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꿈속의 장기와 무의식이 각자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과 닮아 있다.

결국 인간은 깨어 있다고 믿는 꿈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과학은 그 꿈의 해상도를 조금씩 높여왔을 뿐, 꿈 바깥의 절대적 현실에 도달한 적은 없다. 이 인식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겸손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며, 다음 차원에서는 또 하나의 꿈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