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난 질그릇으로서의 인간

by 임풍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낸다. 우리는 생명을 마치 비싼 도자기처럼 다룬다. 쉽게 깨질 수 있음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들고, 함부로 내려놓지 않으며,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긴장감을 품고 산다. 이런 태도는 단순한 본능이나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의 삶이 견고하지 않으며, 언제든 균열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비싼 도자기가 귀한 이유는 단단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깨지기 쉽기 때문에 귀하다. 쇠붙이나 돌덩이처럼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물건과는 다르다. 보호와 조심은 언제나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면, 모든 하루는 의미를 잃고 선택에는 긴박함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고이 모시고 사는 이유는 생명이 유한하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역설이 있다. 도자기를 지나치게 아끼면, 결국 그것은 진열장 안에만 있게 된다. 깨질까 봐 사용하지 못하고, 빛을 보지 못한 채 보존만 된다. 인간의 삶 역시 이와 비슷하다.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시도하지 않고, 상처받을까 두려워 관계를 피하며, 무너질까 두려워 움직이지 않을 때, 인간은 살아 있으나 단지 보존된 상태에 머문다. 보호는 생존을 연장하지만, 삶의 충만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고이 모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질문은 존재의 방향에 관한 문제다.

성경에서 인간은 질그릇으로 비유된다. 질그릇은 값비싼 보석함이 아니다. 쉽게 금이 가고, 충격에 약하며,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그릇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닌 보배가 담겨 있다는 비유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릇의 완전성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신성과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 놓여있다. 이때 질그릇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을 의미한다.

금이 난 균열은 결함이 아니다. 완벽하게 밀폐된 그릇이라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밖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균열이 있는 그릇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에 담긴 빛을 흘려보낸다. 상징적으로 보면, 인간의 상처와 실패, 노화와 질병, 흔들림과 불안은 모두 질그릇에 나타난 균열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인간을 덜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더욱 투명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인간은 무너질 때 더 깊이 질문하고, 약해질 때 더 분명하게 존재의 의미를 의식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질병과 고통 자체가 신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고통은 본질이 아니라 촉매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인간을 깎아내리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단순한 기능이나 성과물로 오해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장치다. 인간은 멈출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묻게 된다. 깨질 수 있음을 아는 존재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

따라서 잘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흠 없이 보존되는 것도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깨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삶의 밧줄 위에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빛을 담은 채 안전한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일상 속으로 나아가 내면의 빛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고이 모시고 산다. 그러나 그 생명은 진열을 위해 맡겨진 것이 아니다. 잠시 빛을 담고, 잠시 세상을 비추고, 다시 내려놓기 위해 주어진 질그릇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깨질까 봐 걱정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바로 그런 자각 속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