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블랜드(Jeffrey Bland)는 <질병은 없다(Disease Delusion, 원서 2014년 출간)>에서, 현대의학이 이룩한 성과인 기존의 단기 염증 및 응급 치료 중심의 전통적 의료 체계를 넘어, 현대인이 주로 겪는 만성질환의 근본 원인을 다루는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감염병으로 고통받아왔지만, 항생제와 백신의 발견, 위생 환경의 개선 등을 통해 감염병을 상당 부분 정복해 왔다. 그러나 수명 연장과 함께, 현대인은 과거 조상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만성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질병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대의학은 여전히 분야별로 특화된 급성 질환 중심의 치료 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겪는 만성질환에 대한 대응은 미비한 상태다. 만성질환의 치료에는 개인별 맞춤 치료와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만성질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최근 부상하고 있는 기능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2003년 완성된 인간 유전자 지도와 유전자 편집 등의 기술을 기능의학에 접목하여, 개인 맞춤형 치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저자가 책에서 설명하는 핵심 내용을 살펴본다.
▪︎ 현대의 질병은 급성 질환이 아니라 만성 질환이다: 기존 의학은 감염, 외상, 수술 등 단기적 문제에 매우 효과적으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만성 염증, 대사질환, 자가면역 질환, 정신질환 등 만성질환에 더 많이 시달린다. 이러한 만성질환은 단순한 약 처방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삶의 방식, 환경, 유전자와의 상호작용 등 복합적인 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 유전자 결정론에서 유전자 발현 조절론으로: 과거 의료계는 "유전자는 운명이다"라는 유전자 결정론적 관점에 기초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병에 걸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이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전자에 대한 해독이 진행되면서, "유전자 발현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관점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병이 발병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정크 유전자(Junk DNA)로 불렸던 부분은 전체 유전체의 약 98% 이상을 차지하며, 기능이 불분명한 비부호성(non-coding) 유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이 정크 유전자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정크 유전자는 촉진 유전자 부위(regulatory DN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간은 동물보다 유전자 발현이 환경의 영향을 더 쉽게 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새로운 유전자에 대한 이해에 따라, 저자는 “우리는 처음부터 병에 걸리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환경과 생활 습관을 바꿈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타고난 원래 '유전자형'은 실제 '표현형'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주변 환경에서 오는 신호가 유전자 발현을 바꿀 수 있고, 그 신호가 세포 내 전달 과정을 통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거나 끌 수 있다는 원리이다. 그래서 이 신호를 만드는 세포의 환경 요인을 변화시킨다면, 유전자 발현 방식과 나아가 건강 상태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유전자는 바꿀 수 없지만, 유전자가 노출되는 환경은 바꿀 수 있으며, 그 결과 유전적 질병의 악화 위험 또한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간단히 말해, 환경이 유전자에게 전달하는 신호가 달라지면, 유전자도 그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현한다. 유전자 발현 스위치를 조절하는 학문을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 하며, 이는 결국 환경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개념이다. 식습관, 수면, 스트레스, 운동, 감정, 사회적 관계 등은 모두 유전자의 스위치를 실시간으로 조절하는 환경 요인이다. 특히 감정과 스트레스를 잘 다루려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하므로, 마음의 상태도 세포의 유전자에게는 환경요인이 된다. 유전자 자체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하느냐는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다. 이러한 후성유전적 변화는 일방 유전자의 돌연변이보다 훨씬 빠르고 유연하며, 심지어 그 변화가 다음 세대에까지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 기능의학: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저자는 기능의학의 확산을 강조한다. 기능의학(Functional Medicine)은 단순히 질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증상이 생겼는지,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접근 방식이다. 주요 구성 요소로는 개인 맞춤형 식이요법, 스트레스 관리, 신체 활동과 운동, 숙면, 독소와 환경 요인 관리 등이 포함된다.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의 약물은 전체 인구 중 약 30~50%에게만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약물 중심 치료의 한계를 보여준다.
▪︎ 저자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생활 태도나 주변 환경 변화> 그에 따라 유전자가 전달받는 메시지가 변화(정크 유전자가 조절 유전자로 작용)> 유전자의 발현 방식이 달라짐(유전자 발현 스위치가 개폐됨)> 결과적으로 유전병이 생길 수도 있고, 반대로 억제되어 건강 상태도 변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