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인간의 마음이 두 개의 프로그램으로 작동한다고 느껴왔다. 하나는 에고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 깃든 신성이다. 에고 프로그램은 생존을 위해 진화한 마음의 습관이요, 신성의 프로그램은 태어날 때 이미 내면에 주어진 우주적 질서의 코드라고 볼 수 있다. 이 코드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꽃과 나무, 모든 만물에 주어져 있다고 본다.
에고는 늘 비교하고 계산하며,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을 무기 삼아 우리를 몰아세운다. 반면 신성은 시간의 밖에서, 지금 이 순간을 평화롭게 관조한다. 그것은 사랑, 기쁨, 용서, 고요함으로 빛나며, 인간이 본래 속해야 할 의식의 고향으로 여겨진다. 마치 깊은 숲속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심연에도 흐르고 있다. 따라서 에고의 지배하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의 공통 관심사였다. 인간의 운영 프로그램을 에고에서 신성으로의 전환이 추구되어온 셈이다.
철학과 종교는 예외 없이 이 전환을 가르쳐왔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로마서 12:2)”는 말에서부터, “가자, 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반야심경)”라는 외침,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인간의 운영체제를 에고에서 신성으로 바꾸라는 초대의 언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에고를 자신이라고 착각해왔다. 그 동일시는 깊고 끈질겨서, 이제는 마음에서 떼어내려 해도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며, 마음 챙김과 요가, 호흡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불안하고, 분노와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에고 프로그램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인간에게 이 전환이 어려운 이유는, 에고를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에고를 버려야 한다고 배우지만, 사실 에고는 우리 삶의 한쪽 날개이기도 하다. 신성이 빛이라면, 에고는 그 빛이 드리우는 그림자다. 그림자를 없애려는 순간, 빛의 방향도 잃는 역설이 생긴다.
그래서 이것에서 저것으로 건너려고 애쓰는 대신, 이렇게 새롭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에는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없다. 늘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지도자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51 대 49로 나뉘듯, 우리 마음에도 늘 불안과 평화, 사랑과 미움, 자신감과 열등감이 공존한다. 한쪽을 완전히 없애려 하면, 오히려 더 커진다. 중요한 것은 두 세계의 균형을 인식하고, 그 흔들림을 삶의 리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결국 신성으로의 전환이란, 에고를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에고와 함께 춤추는 일일 것이다. 살면서 잘못 훈련된 에고를 달래주고 재훈련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의식이 성숙한다는 것은, 두 프로그램이 서로를 이해하며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완전한 평화를 얻는 대신, 불완전 속에서도 고요를 잃지 않는 능력, 그것이 어쩌면 깨달음의 실제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에고의 작동 아래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신성의 숨결을 알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깨어나진 않았지만, 깨어 있으려는 의식 자체가 길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불완전한 평화 속에서 조금은 더 편안히, 조금은 더 깊이 살아가려 한다.